좋은 말씀/-매일 묵상

바르트의 신학 이야기(34) / 정용섭목사

새벽지기1 2024. 9. 8. 07:14

성령은 전제로서의 영이 아니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성령을 전제하는 신학은 비영적인 신학에 불과하다. 성령은 자신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교회 공동체와 신학에게 자유롭게 은혜를 베푸시는 생명력이다. 이처럼 비영적인 신학을 돕는 분은 오직 성령뿐이다. 성령은 신학으로 하여금 그때마다 신학이 만들어 낸 전제들의 비참성에 대하여 의식케 하고 인식케 한다. 따라서 교회공동체와 신학은 항상 새롭게 성령의 임재와 역사를 경험하려면 “창조자 성령이여 어서 오시옵소서.”,(Veni, creator Spiritus!) 그리고 “오시옵소서 오시옵소서 당신, 생명의 성령이시여!”라고 탄식하며 부르짖어 기도해야 한다.(74쪽)

 

     위 글로 ‘성령’이라는 항목이 끝나오. 그대는 바르트가 성령을 신학과 연결시켜서 생각하는 것을 보고 좀 신기하게 생각했을 거요. 신학은 성령보다는 사람의 이성을 따르는 학문이라는 평가가 한국교회에 만연해 있으니 말이오. 목회를 잘 하려면 신학보다는 성령을 받아야 한다고 열변을 토하는 이들이 있소. 가관이오. 그들은 성령이 누구인지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오. 기껏해야 자기 열망에 사로잡히는 심리적 기제를 성령으로 생각하는 거요.

 

바르트는 신학을 철저하게 성령의 작업이라고 주장하오. 이는 곧 성령에 의존하지 않으면 신학은 가능하지 않다는 말이오. 또는 신학이 성령을 의존하지 않고 악령을 의존할 수도 있다는 말이오. 성령은 무조건 전제되지 않소. 따라서 교회 공동체와 신학은 성령이 임하기를 기도해야 하오.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하고 기도한다는 게 무슨 뜻이오? 이것을 주술적인 차원으로 이해하면 곤란하오. 신학 공부는 전혀 하지 않거나 치열하게 하지 않은 채 기도만 하면 저절로 모든 진리를 깨닫게 된다는 뜻이 아니오.

 

“성령이여, 오소서!”라고 기도하거나 찬송을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히지 않고 말씀 앞에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는다는 뜻이오. 이게 쉽지 않소. 대개는 개인이나 공동체의 목적을 전제한 채 신학을 하거나 목회를 하오. 교회를 성장시켜야겠다는 열망에 사로잡히면 결코 성령이 임할 수 없소. 바르트 당시에는 독일의 많은 신학자들이 히틀러의 정치적 이념을 신학적으로 합리화했소. 우리나라의 군사독재 시절에도 그런 일들은 있었소. 그들은 성령을 의지하는 게 아니라 어떤 이데올로기를 의지하는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