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바르트의 신학 이야기(36) / 정용섭목사

새벽지기1 2024. 9. 8. 07:20

신학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엄습하는 놀라움은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다. 이 놀라움은 인간을 놀라움으로 몰아넣고 배움을 강요한다. 신학에서 신학자가 어느 날 배움을 끝내고 비상한 것이 평범한 것으로, 새로운 것이 옛 것으로 되어버리는 일은 일어날 수 없다. 신학은 낯선 것을 결코 지배할 수 없다. 만약 누가 이 낯선 것을 지배한다면 그는 신학을 아직 착수하지 않았거나 이 신학 하는 것으로부터 이미 벗어난 것이다. 신학의 건전한 뿌리인 이 놀라움으로부터 우리는 결코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신학의 대상은 집안에서 사용하는 기구처럼 신학자를 만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참된 신학의 대상은 항상 신학자의 전 표상의 세계를 초월하면서 신학자를 만나신다. 신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자신의 대상에 대한 당황과 질의, 즉 놀라움은 항상 신학을 지배한다. 이와 같은 놀라움의 경험이 결코 그 어떤 점에서도 신학자에게 상실될 수 없다. 이 놀라움의 경험이 그에게 일어날 때 그는 전적으로, 그리고 유일회적으로 놀란 사람이 된다.(77쪽)

 

     목사들이나 평신도들에게 가장 큰 신앙의 위기는 그리스도교를 이미 알고 있다는 선입견에 사로잡히는 순간이오. 더 이상 배울 게 없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소. 그들이 알고 있다는 것은 세례 받을 때 얻어들은 교리문답에 불과하오. 창조와 종말의 관계에 대해서 깊이 있게 생각하지 않소. 모두 사전풀이의 수준에 머물고 있소.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문장에만 집착하는 거요. 이런 차원에서는 바르트가 말하는 놀라움을 경험할 수 없소.

 

사람은 놀라움의 경험 없이 신앙생활을 지속하기 힘드오. 그래서 다른 방식으로 자극을 받으려고 하오. 교회당을 건축한다거나 선교사를 파송하는 일에 자극을 받는 거요. 한국교회가 프로그램에 매달려 있다는 사실은 바로 그것을 의미하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교 교리는 그야말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오. 더 중요한 것은 다 그 아래에 숨어 있소. 그 깊이가 얼마인지 추정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세계가 심연에 놓여 있소. 이것은 사실 신학이나 신앙의 세계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도 그대로 적용되오.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이런 삶은 표면적인 것에 불과하오. 그것에만 매달려 있으면 놀라움은 불가능하오. 세상의 신비로움 앞에서 놀라는 삶이 아니면 우리는 사는 게 아니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