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1925

영혼의 안식(1) / 정용섭목사

그대는 오늘도 즐겁게 하루를 보내셨을 줄로 아오. 우리는 모두 즐거움을 찾고 있으니, 당연히 즐거워야 하지 않겠소. 그런데 문제는 간혹, 또는 자주 즐겁지 않게 산다는 거요. 즐겁지 못한 이유는 찾아보면 거의 끝이 없을 정도로 많을 거요. 그런 거야 다 알고 있는 것이니 일일이 확인할 필요도 없소. 즐겁지 못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우리가 일상을 심심하게 생각한다는 게 아닐까 생각하오. 이게 정확한지는 나도 잘 모르겠소. 나의 주관적인 판단일지도 모르오. 심심한 걸 해소하기 위해서 더 자극적인 걸 찾고 있소. 그 대상이 무엇이든지 자극적인 것만은 분명하오. 그게 돈일 수도 있고, 권력일 수도 있고, 오락일 수도 있소. 그런 것들은 우리의 감각을 긴장시키는 능력이 있소. 그래서 그런 것들을 만났을 때 살아..

오래된 미래 / 정용섭목사

그대는 아마 위 제목을 들어보셨을 거요. 안 들어봤어도 괜찮소. 이제 내가 조금 소개할 터이니 듣기만 해도 고개를 끄덕일 것이오. 사실은 책 제목이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라는 스웨덴 출신 여성학자가 16년간에 걸쳐 티베트의 라다크를 체험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오. 그녀가 1975년에 라다크를 처음 방문했다는데, 런던 대학교 동양 언어학과의 학위 논문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하오. 잠시 탐방하려다가 아예 눌러 않은 셈이지. 달라이 라마가 서문을 썼소. 서문을 적은 날짜를 보니 1991년 2월26일이오.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1쇄가 나온 날짜는 1996년 9월1일이고, 제4쇄가 나온 날짜는 1997년 1월27일이오. 간지 여백에 내가 서명을 해두었소. 1997년 2월5일이오. 당시 이 책을 읽고 삶에 대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 정용섭목사

그대는 어디서 오셨소? 이 질문은 사람이 사유(思惟)하기 시작할 때부터 계속된 것이오. 너무 진부한 질문처럼 들릴지 모르겠소. 아니오. 이것보다 더 근본적인 질문이 우리에게는 없소이다. 이런 질문을 그치는 날, 우리는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거요. 그런 질문은 배부른 사람이나 하는 거라고 투덜거리는 사람들도 있을 거요. 그런 사람과는 뭐,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소. 사람이 배불리 먹으려고 사는 거는 아니지 않소. 조금 덜 먹을 생각만하면 먹는 문제로 우리 삶이 소진되지 않아도 좋을 거요. 더구나 배고플 때부터 이런 질문을 할 줄 알아야 어느 정도 배고픔을 해결한 뒤에도 이런 질문을 계속할 수 있는 법이라오. 그대는 어디서 오셨소? 대학공부하고, 자식들 키우고 취미생활하고 교회에 다니느라, 세상살이에 너무 ..

비오는 날 / 정용섭목사

그대, 무엇 하오? 요즘 며칠 동안 비가 오오. 늦은 겨울비요. 이제 추위가 끝났나보오. 비오는 날은 사람들을 감상적으로 만드오. 이뤄지지 못한 첫사랑은 대개 비오는 날과 연관해서 사연이 많소. 각자 따로 우산을 갖고 나왔지만 함께 붙어서 걸을 때는 한 개로 충분하니, 두 사람 사이가 얼마나 애틋하겠소. 초등학교 시절도 비오는 날은 낭만적이오. 가사가 정확한지 모르겠구려.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 우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 빨간우산, 파란우산, 찢어진 우산을 들고 학교에 오가던 시절이 그립고 그리운 오늘이오. 1980년대 초 내가 잠시 신학공부를 하던 중부 독일에는 비오는 날이 참으로 많았다오. 특히 라인 강 근처는 워낙 날씨도 나쁘고 땅도 나빠서 로마 제국이 공격을 아예 포기했다는 말도 있소...

새로운 글쓰기를 시작하며

새로운 글쓰기를 시작하며 지난 2006년 3월20일에 ‘마가복음 매일묵상’을 쓰기 시작해서 2010년 2월10일로 끝냈습니다. 40일이 모자란 4년 동안 매일 마가복음을 붙들고 씨름한 셈입니다. 대학 4년의 세월과 비슷하군요. 길다면 긴 세월이지만 실제 느낌은 한 순간입니다. 아마 죽을 때도 이런 느낌이 아닐까요? 마가복음이 끝났으니 이제 무엇을 써야할까요? 성서묵상은 이제 그만해도 될 것 같습니다. 계속해서 구약의 예언서나 신약의 서신을 선택해도 좋긴 하지만, 이제는 성서의 틀을 벗어나서 좀 편하게 글을 쓰고 싶은 거지요. 일반적인 주제로 글을 쓴다고 해서 무조건 편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텍스트에 묶이지 않을 수 있으니까 글 쓰는 사람으로서는 편할 것 같습니다. 가장 자주 쓰게 될 소재는 아마 일상에..

마가복음 후기(19)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막16:20) 어제 묵상의 결론에서 하나님과 동일한 심판의 권능이 예수님에게 주어졌다는 초기 기독교의 신앙을 변증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사실을 마가복음 공동체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 흔적을 위 20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전했습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었고, 거부하는 사람도 있었겠지요. 초창기에는 거부하는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많았을 겁니다. 십자가에 죽은 자를 그리스도로 믿는다는 것 자체가 설득력이 없는 주장이었으니까요. 예수가 부활했다는 사실은 믿기가 더 어려운 주장이었으니까요. 오죽 했으면 제자들도 예수의 부활을 믿지 못했겠습..

마가복음 후기(18)(막16: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막16:19) 승천에 이어서 ‘하나님 우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신자들은 이런 구절을 읽으면서 하나님에게도 우편과 왼편이 있는가,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지 모르겠군요. 이런 표현들은 모두 종교적 메타포입니다. 절대적인 하나님에게 상대적 개념에 불과한 우편과 좌편을 그대로 적용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으로 구성된 이 세상의 위치 개념에 제한받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마가복음 기자는 왜 굳이 하나님 우편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걸까요? 구약의 영향을 받았다는 게 그 대답입니다. 시편 110: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들로 네 발판이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

마가복음 후기(17)(막16: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막16:19) 예수를 ‘주님’으로 부르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예수님에게 일어난 부활입니다. 부활은 죽음을 근본적으로 넘어서는 궁극적인 생명 사건입니다. 제자들과 초기 기독교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들도 그런 부활 생명을 얻는다고 믿었습니다. 죽음 너머의 생명을 주는 존재보다 더 위대한 존재는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다는 건 당연한 결과입니다. 예수의 부활이 궁극적 생명이라는 초기 기독교의 가장 근원적인 믿음은 구약성서가 말하는 승천 및 하나님 우편 표상과 연결되었습니다. 엘리야는 “회오리바람으로 하늘로 올라”갔습니다.(왕하 2:11) 이 엘리야는 복음서에서 그리스도에 앞서 올 자로 묘사됩니다. ..

마가복음 후기(16)(막16:19)

'주 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신 후에 하늘로 올려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니라.'(막16:19) 이제 우리는 마가복음의 마지막 단락에 이르렀습니다. 지난 4년 동안 매일 묵상의 방식으로 따라오다 보니 벌써 이런 순간이 왔군요. 우리의 인생도 마지막이 순식간에 느닷없이 오겠지요. 막 16:19절과 20절은 마가복음의 결론이라 말해도 좋습니다. 19절은 예수님의 승천에 관한 것이고, 20절은 제자들의 복음 전파에 관한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마가복음만이 아니라 신약성서 전체의 핵심 주제이기도 합니다. 우선 19절을 봅시다.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주 예수’라는 표현은 복음서 중에서 이 대목에만 나온다고 합니다. 그 표현은 원래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에 잘 알려진 것이라고 하는군요. 예수님을 ‘주’로 경험하..

마가복음 후기(15)(막16:18)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막16:18) 다섯 번째 표적은 치유입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에는 치유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옵니다. 예수님은 많은 병자와 장애인을 고치셨습니다. 사도들에게도 그런 일들이 흔히 일어났습니다.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행 4:30) “예루살렘 부근의 수많은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행 5:16) 손을 얹거나 내밀면 병이 고쳐질까요? 이런 질문은 크게 의미가 없습니다. 우선 사람의 손에 치유 능력이 있다는 건 분명합니다. 배가 아픈 아이들의 배나 머리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