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여호와를 송축하라! / 정용섭목사

새벽지기1 2024. 9. 17. 07:18

아래는 오늘 수요성경공부의 강의안이오.  A4 한쪽 분량의 요약인데, 이 강의안만으로는 내용이 충분하게 전달되지 않겠지만, 그냥 참고하시라고 올리오. 본문은 시편 134편이고, 지목은 <여호와를 송축하라!>요. 오늘은 교회에 가는데 중간에 비가 무지하게 쏟아졌소. 차의 비상등을 키고 천천히 운전했소. 국지성 소나기인 것 같소. 벌써 장마가 시작되는 건지, 4대강 사업은 어찌되려는지.

 

시편 120편부터 134편까지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일종의 순례자의 노래집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성지 순례 장소는 예루살렘이다. 예루살렘은 성전이 있는 거룩한 도시였다. 경건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중요한 절기인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에 성지를 순례한다.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제사를 드릴 수 있었기 때문에 성지 순례는 그들에게 절대적이었다. 134편은 이 순례자 노래집의 결론이다.

 

1절-송축하라

134편의 각 절의 키워드를 꼽는다면 1절과 2절은 ‘송축’이고 3절은 ‘복’이다. 송축과 복은 순례자들의 최대 관심사다. ‘밤에 여호와의 성전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는 가을 축제에서 거행되던 밤샘 제사를 배경으로 한다. 종들은 성전에서 그런 일에 종사하던 이들을 가리킨다. 가을걷이를 마치고 드리는 축제가 얼마나 즐거웠을지 생각해보라. 그 축제는 초막절일 것이다. 고대인들에게 추수는 생존의 토대다. 흉년이 들면 많은 아사자들이 생긴다. 어느 정도 곡식을 거두었다는 것은 한 해의 생존이 보장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나오는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노래한다.  

 

2절-손을 들고

2절에서 시편기자는 다시 성소를 향하여 손을 듣고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노래한다. 성소는 여호와 하나님이 임재 하는 곳을 가리킨다. 물론 성소는 일종의 상징이다. 손을 든다는 것은 기쁨과 평화의 표시이다. 고대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생존을 지켜주시는 여호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기쁨과 평화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그들은 송축한다.

 

현대인들은 생존의 기쁨과 평화를 상실했다. 생존의 조건은 비약적으로 좋아졌는데, 삶의 근본은 허약해졌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삶의 근본은 생존 조건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일 수도 있고, 오히려 조건이 열악할 때 삶의 근본이 풍요로워진다는 것일 수도 있다.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도 여기에 해당된다. 오늘 우리의 문제는 삶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간과한다는 것이다. 기쁨과 평화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거나 초라하다. 이런 상태에서는 여호와를 송축할 수 없다. 오늘 우리는 척박한 현실에서 살았던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보다 영적으로 궁핍한 사람들이다.  

 

3절- 천지를 지으신 분

시편기자는 송축해야 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밝힌다. 그는 하늘과 땅을 지은 이이다. 창조주가 여호와이고, 여호와가 창조주이다. 그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근원이라는 뜻이다. 그를 창조주라고 믿는다는 말은 우리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뜻이다. 이걸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사람은 스스로 창조주처럼 되고 싶어 한다. 그게 죄의 본질인 교만이다. 어떤 대상을 소유할 수 있는 것처럼 살아가는 삶의 태도가 바로 그것이다.

 

창조주가 복을 주신다는 말을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그의 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 그분이 그분의 기준으로 복을 주신다는 사실을 제대로 알기만 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송축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자기 합리화가 아니라 세상에 대한 정확한 통찰에서 나온 신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