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바르트의 신학 이야기(45) / 정용섭목사

새벽지기1 2024. 9. 18. 06:43

신학자는 하나님을 선행하는 그 어떤 선험(Apriori)도 인정할 수 없다. 따라서 힐라리우스(Hilarius)의 원칙에 의하면 “실체가 말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말이 실체에 종속된다.”(Non sermoni res, sed rei sermo subjectus est.) 혹은 안셀름의 용어로 표현하면 신학적인 인식의 ratio(방법, 이성)와 necessitas(필연성, 위급)는 그의 대상의 ratio와 necessitas에 준하여 방향 잡혀야 한다. 이것의 순서가 뒤바뀔 수 없다. 물론 신학은 모든 다른 학문들처럼 하나의 인간적인 학문으로서 항상 그리고 어디서나 각 시대와 각 상황에서 전해졌고 새롭게 수용하는 통찰들, 개념들, 영상들 및 언어수단들을 사용한다. 이와 같은 것들은 고대말엽, 중세기 바로크 시대, 계몽주의 시대, 관념론 시대, 혹은 낭만주의 시대에서 각각 다르게 형성되었다. 그런데 신학은 그 어느 시대 어느 상황에서도 그 어떤 일반적인 통찰법칙, 개념법칙, 그리고 언어법칙도 신학체계의 중심으로 인정할 수 없으며, 구속력 있는 법칙으로 인정할 수 없다. 그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것이든, 데카르트의 것이든, 칸트의 것이든, 헤겔의 것이든, 하이데거의 것이든 간에.(102쪽)

 

     위에 고대 신학자들과 라틴어 개념들이 나와서 더 헷갈릴 것 같소. 의미는 간단하고 명백하오. 신학이 각 시대마다 다른 형태로 진술되긴 했지만 그 형태에 구속되지 않소. 그런 형태는 하나님에 대한 각 시대의 독특한 인식일 뿐이오. 그것보다 더 우선하는 것은, 그것들이 종속되어야 할 주체는 하나님의 계시오. 예컨대 해방신학이 있소. 그것은 라틴 아메리카의 상황에서 발생한 신학이었소. 소수의 부자들이 부를 독점하고 대부분의 가난한 사람들은 생존에 급급했던 상황에서 나온 신학이오. 그래서 정치적인 투쟁과 경제적인 해방을 말할 수밖에 없었소. 심지어는 마르크스의 계급투쟁까지 끌어들였소.

 

바르트에 의하면 이런 방식으로 신학을 끌어가면 곤란하오. 그것은 계시의 신학이 아니라 상황의 신학이 되오. 그것은 하나님에게 주도권이 있는 게 아니라 사회과학에 주도권이 주어지오. 이런 바르트의 입장에서는 자칫하면 인간의 구체적인 역사가 간과될 수 있소. 신학이 너무 관념으로 흘러서 이 세상의 삶과 무관한 것처럼 보일 수 있소. 바르트는 20세기 자유주의 신학과 21세기 히틀러 시대의 독일교회에 의해서 신학의 독립성이 훼손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소 관념적으로 보이는 입장을 취한 것 같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