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귐의 소리

땅에서 누리는 하늘 (골 1:9-14) / 김영봉목사

새벽지기1 2024. 9. 11. 06:46

해설:

앞에서 사도는 골로새 교인들을 칭찬하면서 “우리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도할 때에, 항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3절)라고 썼다. 그는 먼저 그들로 인해 감사하는 이유를 밝힌 다음(4-8절), 그들에 대한 기도의 내용을 밝힌다. 그는 에바브라로부터 골로새 교회의 소식을 들은 날부터 그 기도를 계속해 오고 있다. “우리”(9절)라는 대명사를 통해 사도는 자신과 함께 있는 동역자들이 그들을 위한 기도에 동참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한다. 

 

그가 골로새 교인들을 위해 구하는 첫번째 기도 제목은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채워 주시는”(9절) 것이다. “신령한”은 ‘프뉴마티코스’의 번역으로 “영적인” 혹은 “영적인 세계에 관한”이라는 의미다. “지혜”(‘소피아’)는 주어지는 상황에서 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고, “총명”(‘쉬네시스’)은 통찰력을 가리킨다. 그 지혜와 총명은 하나님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에게서 얻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얻으려는 이유는 그분의 뜻을 따라 살기 위함이다. 지식도 중요하지만 “주님께 합당하게 살아감”(10절)은 더욱 중요하다. 그럴 때 그들은 “모든 일에서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다. 이렇게 앎과 삶이 일치할 때 그들은 삶에서도(“모든 선한 일에서 열매를 맺고”), 앎에서도(“하나님을 점점 더 알고”) 계속 성장할 수 있다. 

 

사도가 골로새 교인들을 위해 구하는 두번째 기도 제목은 “하나님의 영광의 권능에서 오는 모든 능력으로 강하게 되는”(11절) 것이다. “영광의 권능”은 “영광스러운 권능”이라는 의미다. 여기서 사도는 부활의 영광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의 능력이 지금도 자신들 가운데 역사하고 있다고 믿었다(엡 1:20).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하게 되면 “기쁨으로 끝까지 참고 견딜” 수 있다. 하나님의 능력은 세상에서 겪어야 하는 고난들을 제거하는 힘이 아니라, 그런 고난을 견디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하는 힘이다.

 

그럴 때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 수 있다. 그 하나님은 믿는 이들에게 “성도들이 받을 상속의 몫을 차지할 자격”(12절)을 주셨다. “빛 속에서”는 “감사를 드리게 되기를”이 아니라 “상속의 몫을 차지할”을 꾸민다고 보아야 한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사도 요한이 본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빛을 비추어”(계 21:23) 태양빛도 무색해진다. 우리가 영원한 상속을 얻을 때는 그 빛 가운데 임할 때다.

 

마지막 날의 그 현실은 믿음 안에서 그들에게 이미 일어났다. 믿는 이들은 “암흑의 권세”로부터 건짐을 받아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졌다(13절). “암흑의 권세”는 사탄을 의미할 수도 있고, 영원한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다.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는 하나님의 나라, 새 하늘과 새 땅을 의미한다. 믿는 이들은 그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었을 뿐 아니라, 지금 그 나라의 현실을 경험하고 산다. “그 아들”(14절)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묵상:

태아에게 있어서 모태는 아홉 달 동안 세상의 전부입니다. 태아는 모태 안에 있는 동안 충분히 행복할 것입니다. 만일 의식이 있다면, “나는 모태 안에서의 생으로 충분히 만족해”라고 말할 지 모릅니다. 하지만 태아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때가 되면 그는 세상에 태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태아는 그것을 알지 못하지만, 부모는 그것을 알기에 건강한 아이로 태어나도록 최선을 다합니다. 

 

마찬가지로, 길면 구십 년 동안 우리에게는 이 물리적 세계가 전부입니다. 많은 이들이 이것을 전부로 여깁니다. 사람들 중에는 “나는 내세니 영원이니 하는 것에 관심 없습니다. 나는 이 땅에서의 삶으로 충분히 만족합니다”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 태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어떤 사람은 영원을 누리기에 합당하게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그것을 누릴 수 없는 상태로 태어납니다.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인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채워 주시기를 빕니다”(9절)라고 기도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을 얻으려면 “신령한” 지혜와 총명이 필요합니다. 영적인 세계를 꿰뚫어 보는 혜안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선물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바울 자신도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 위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에야 영적인 지혜와 총명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제서야 그는 하나님의 나라와 영원한 생명에 대해 알 수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에서 받을 영원한 상속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 겪는 고난을 견디면서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 영원한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 것일 뿐 아니라 지금 여기서 그 나라의 현실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권능”이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