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사도는 당시 편지 양식에 따라 먼저 발신자가 누구인지 밝힌다. 그는 때로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고전 1:1; 고후 1:1; 갈 1:1; 엡 1:1)로 소개하기도 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종”(롬 1:1; 빌 1:1)으로 소개하기도 한다. 이 편지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나 바울”(1절)이라고 소개한 이유는 사도로서의 권위를 강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 편지를 쓰는 동안 디모데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밝힌다.
수신자에 대해 사도는 “골로새에 있는”이라는 표현과 “그리스도 안에 있는”이라는 표현을 겹쳐 사용한다(2절). 그들의 지리적 위치는 골로새였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 위치다.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이라는 표현에 더하여 “거룩한”(‘하기오스’)이라는 형용사와 “신실한”(‘피스토스’)이라는 형용사를 동원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기 때문에 “성도”(거룩한 사람들)가 되었다.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하는 사건인 동시에 그분 안에서 살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래서 헬라어 ‘피스티스’는 “믿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고 “한결같음”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발신자와 수신자를 소개한 후, 사도는 그의 편지에서 일관되게 사용하는 인사법으로 축복한다. “은혜”는 그리스-로마인들이 인사할 때 사용하는 단어였고, “평화”는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단어였다. 사도는 그 둘을 묶어서 모두를 위한 인사로 만들고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이라는 표현을 더하여 신앙고백으로 만들었다. 우리가 누릴 진정한 은혜와 평화는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온다.
다른 편지에서와 마찬가지로 사도는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감사와 기도”를 쓴다. 그는 일인칭 복수 대명사 “우리”(3절)를 사용하여 자신과 같이 있는 신도들까지 포함한다. 그는 골로새 교인들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항상” 감사를 드리고 있다고 고백한다. 그가 감사하는 이유는 에바브라로부터 전해 들은 그들의 믿음 때문이었다(8절). 사도는 구체적으로 세 가지를 언급한다.
첫째,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여러분의 믿음”(4절) 때문이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 준 사람은 에바브라였다(7절). 그에게서 복음을 들은 날로부터 지금까지 그들의 믿음은 “열매를 맺으며 자라고 있다”(6절).
둘째, “모든 성도를 향해서 여러분이 품고 있는 사랑”(4절)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은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열매 맺게 되어 있다. 믿음은 눈에 보이지 않으나 사랑은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행위는 믿음의 증거다.
셋째, 그들의 믿음의 살아 있어서 사랑의 행위로 열매 맺힌다는 사실은 “여러분을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두신 소망”(5절)을 그들이 실제로 믿는다는 의미다.
이 소망에 대해 사도는 3장 1-4절에서 좀 더 자세히 설명한다.
이렇게 말하면서 사도는 그들에게 전해진 복음이 온 세상에 전해지고 있고 열매 맺고 있다는 사실을 전한다(6절). 온 세상에 퍼져 나가는 복음의 역사에 그들도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 준 에바브라에 대해 사도는 “우리와 함께 종이 된”(7절) 사람이라고 표현한다. 바울이나 에바브라나 “여러분을 위해서 일하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묵상:
바울 사도가 “믿음”, “소망” 그리고 “사랑”을 기독교 신앙의 세 기둥으로 여기고 있었다는 사실은 여러 곳에서 드러납니다. 그 생각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곳이 고린도전서 13장입니다. “사랑의 찬가”라는 별명을 가진 이 시편의 마지막에서 그는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고전 13:13)라고 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해서는 “믿음의 행위”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살전 1:3)에 대해 칭찬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에바브라에게서, 골로새 교인들이 믿음 안에 든든히 서 있고, 그 믿음이 사랑의 행위로 열매 맺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습니다. 그 소식을 전해 듣고 사도는, 그들의 믿음과 사랑이 하늘에 속한 것에 대한 소망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감사를 드립니다.
믿음의 대상은 “보지 못하는 것”이며 “바라는 것”(히 11:1)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모세를 예로 들어, 믿는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분을 보는 듯이 바라보면서 견디어 내는 것”(11:27)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자신은 “우리는 믿음으로 살아가지, 보는 것으로 살아가지 아니합니다”(고후 5:7)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소망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 손으로 잡을 수는 없지만 물질계를 초월하는 하나님의 세계 그리고 목숨으로 끝나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진실로 믿는다면 그것을 소망하게 됩니다. 하늘에 속한 것에 대한 소망이 강해지면 믿음은 더욱 강해지고, 그 믿음은 사랑의 행위로 열매 맺습니다. 사랑은 자기를 내어 주는 것입니다. 하늘에 속한 것에 대한 믿음과 소망이 없이는 자신을 내어 줄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보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서로 뒤엉켜 있는 한덩이에 대한 서로 다른 이름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소망한다는 것이고, 소망하는 것은 믿는다는 뜻이며, 진정한 사랑은 믿음과 소망에서 맺혀지는 열매입니다. 그런데 사도가 “그 중에 제일은 사랑입니다”라고 말한 이유는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 날이 오면 믿음의 대상과 소망의 대상은 현실이 됩니다. 그 현실은 사랑의 완성입니다. 그 미래를 소망하며 오늘 이 땅에서 그 날이 온 것처럼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현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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