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귐의 소리

뒤집어진 세상 (빌 3:4-11) / 김영봉목사

새벽지기1 2024. 9. 5. 03:13

해설:

참된 할례가 무엇인지를 밝히면서 사도는 “육신을 의지하지 않는 것”(3절)이라고 했다. “육신을 의지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기 위해 사도는 자신의 이야기를 예로 든다. 누가 자신의 인간적인 조건을 내세우려 한다면, 자신에게는 그럴 만한 것이 더 많다고 말한다(4절). 

 

“난 지 여드레만에 할례를 받았다”(5절)는 말은 레위기 12장 3절에 제시된 율법을 지킨 정통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서도 베냐민 지파요”는 “이스라엘 민족 출신이요, 그 중에서도 베냐민 지파요”라고 번역하는 것이 좋다. 베냐민 지파는 유다 지파와 함께 당시 살아 남은 유일한 지파다. 바울의 히브리 이름이 사울이었는데, 베냐민 지파가 자랑스럽게 여긴 초대 임금 사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 분명하다. “히브리 사람 가운데서도 히브리 사람”이라는 말은 이스라엘의 민족적/종교적 전통을 충실하게 지켜 왔다는 뜻이다. “율법으로는 바리새파 사람이요”라는 말은 바리새파에 속할 정도로 율법에 열심이었다는 뜻이다. 

 

“열성으로는 교회를 박해한 사람”(6절)이라는 표현에서 “열성”은 유대교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덕이다. 율법에 대한 열심이 얼마나 강한지가 그 사람의 믿음의 정도로 판단되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압 땅에 이르렀을 때, 어떤 사람이 모압 여인을 데리고 장막에 들어가 성행위를 하자 비느하스가 창을 들고 들어가 두 남녀를 꿰뚫어 살해했다(민 25장). 그 이후로 비느하스는 율법에 대한 열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모델이 되었다. 율법에 대한 열심이 있다면 율법을 범하는 모습을 보고 그냥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회심하기 전에 사도가 교회를 박해한 이유는 예수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율법을 모독하고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가 율법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율법으로는 흠 잡힐 데가 없는 사람”이었다고 덧붙인다. 그는 당대 예루살렘에서 가장 존경 받았던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서 촉망받는 바리새파 율법학자였다.

 

5절과 6절에 열거된 일곱가지 이력은 어느 유대인과 비교해도 뒤질 것이 없는 탁월한 스펙이다. 사도 자신도 그 스펙을 “육신에 신뢰를 둘 만한 것”(4절)으로 여겼다. 하지만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그의 세상이 뒤집어졌다. 그는 그 모든 것이 “나에게 이로운 것”(7절)이라고 여겼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보니 “해로운 것”으로 보였다. 그것들을 의지하는 한 하나님을 제대로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에게는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8절)이 가장 고귀한 것이 되었다. “아는 지식”은 머리로 아는 정보가 아니라 인격적인 체험을 통한 지식을 가리킨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그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라는 말은 자신이 2장 6-8절에 그려진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고 있다는 뜻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자리를 “누릴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자기를 비우고 낮추신 것처럼, 사도 역시 촉망 받는 바리새파 율법학자로서의 모든 특권을 버리고 이방인을 위한 전도자로 자신을 낮추었다. “오물”은 “쓰레기”로 번역되기도 하고 “배설물”(똥오줌)로 번역되기도 한다. 과거에 자랑스럽던 이력이 이제는 해로운 것이 되어 버렸다는 뜻이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얻고”(8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9절)는 까닭이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은 우리가 “하는 것”(능동성: “그리스도를 얻는 것”)이기도 하고 “되는 것”(수동성: “그분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것이 구원이다. 성경은 그것을 “의”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 원래 의도한 관계로 회복되는 것이 의요 구원이다. 사도는 율법을 행하여 그것을 얻으려 했으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의를 얻었다. 그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께 선물로 받는 것이다. 

 

10절과 11절은 사도의 인생관이라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 사도의 인생관은 뒤집어졌다. 그는 율법 연구에 생애를 걸었던 사람이다. 하지만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 생애를 걸었다. 따라서 그는 1) “그리스도를 알고”(인격적으로 체험하여 더 친밀하게 되고), 2)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닫고”(지금도 역사하고 있는, 그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려내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3)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여”(예수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비우고 낮추는 삶을 살아), 4) “그분의 죽으심을 본받는 것”(죽을 때까지 자신을 낮추고 비우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결국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를 것이다. 그것이 사도가 바라는 궁극적인 소망이다.

묵상:

죽음의 문턱에 당도 했다가 살아난 사람들 중에는 삶의 태도에 있어서 완전히 달라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절대적인 문제 앞에 서고 보니 현실이 달라 보였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중요해 보였던 것이 중요하지 않게 보였고, 전에는 의미 있어 보였던 것이 의미를 잃습니다. 

 

죽음 앞에 서는 것이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는 것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분은 죽음을 넘어선 분이요 죽음을 정복한 분입니다. 그분은 영원한 생명의 주인입니다. 그분을 제대로 만나면 영원하고 절대적인 하나님 나라에 눈 뜨게 됩니다. 그렇기에 그분을 제대로 알고 믿는다면, 세상이 달라 보이게 마련입니다. 인생을 대하는 태도 역시 달라집니다. 예수님은 “밭에 숨겨진 보물의 비유”(마 13:44)와 “값진 진주를 발견한 보석상의 비유”(마 13:45-46)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발견한 사람에게 일어나는 변화를 설명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눈 뜨면 그동안 귀하게 여겼던 모든 것들이 달리 보인다는 사실을 전하려는 뜻이었습니다.  

 

바울은 그러한 전환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의 인생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의”를 얻는 것에 있었습니다. 죄로 인해 어그러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그분의 사랑 안에 받아들여지는 것이 그가 추구하던 의였습니다. 사도는 율법에 대한 열심을 최고도로 끌어 올리면 그 의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전혀 다른 곳에서 그것을 발견했습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예기치 않은 방문을 받은 그는, 그분 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으셨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분 안에 머물러 사는 것이 의를 얻고 누리는 길임을 알았습니다. 

 

그로 인해 그의 인생관이 뒤집어졌습니다. 율법에 인생을 걸었던 그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 인생을 겁니다. 그분과의 인격적인 친밀함을 추구하여 그분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부활의 능력을 힘 입어 그분이 걸으신 십자가의 길을 걸어 완주하는 것이 그의 새로운 목적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그분처럼 자신의 위치를 누릴 것으로 여기지 않고 비우고 낮추어 다른 사람들에게 종 노릇 하는 삶입니다. 그렇게 하여 더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를 발견하도록 돕는 일에 자신의 인생이 쓰임 받게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에 참여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고 믿었습니다. 

 

바울의 자기 고백을 읽고 묵상하며 스스로에게 묻습니다. “나는 그리스도 예수를 진정으로 아는 사람인가?” 지금 제가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네가 잘 알잖아”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부끄러이 고개 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