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귐의 소리

성숙한 믿음 (빌 3:12-16) / 김영봉목사

새벽지기1 2024. 9. 6. 05:43

해설: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에게 일어난 전격적인 변화를 설명한 후에 사도는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12절)라고 말한다. 여기서 “이것”은 1) 11절에서 언급한 “부활”을 의미할 수도 있고 2) “내가 바라는 것”(10절) 즉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의 부활의 능력을 깨달아 그분의 고난에 참여하여 그분의 죽으심을 본 받는 것”을 가리킬 수도 있다. 

 

당시에도 “구원파적 신앙”(구원은 이미 완성되었다고 믿는 신앙)을 전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혹은 빌립보 교인들이 사도를 완전한 신앙인으로 인식하고 있었기에 이렇게 말했을 수도 있다. 사도는 자신이 완성점을 향해 “좇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헬라어 ‘디오코’의 번역인데, “박해하다”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전력을 다해 추적하고 있다는 뜻이다. 사도는,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기 때문”(12절)이라고 밝힌다. 그분에게 사로잡혔기 때문에 더욱 온전히 사로잡히기 위해 전심전력 하고 있다는 뜻이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 쪽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무엇을 추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추적 당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분에게 잡히는 것이다. 사로잡힌 자로서 더욱 사로잡히기 위해 힘쓰는 것이 우리의 영적 생활이다. 

 

바울은 자신의 구원이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강조하면서, 달리기 경주자처럼 “뒤에 있는 것”(13절, 즉 과거의 일들)을 잊고 “앞에 있는 것”(즉 완전한 구원)을 향하여 전심으로 달리고 있다고 밝힌다. 그가 지향하는 “목표점”은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14절)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숙한 사람은 이와 같이 생각하십시오”(15절)라는 말은 “이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이 성숙한 사람입니다”라고 의역할 수 있다. “여러분 중에 완전한 구원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생각을 고치십시오”라는 의미로도 풀 수 있다. 사도는, 만일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드러내실 것이라고 덧붙인다. 

 

“어쨋든, 우리가 어느 단계에 도달했든지 그 단계에 맞추어서 행합시다”(16절)는 “우리가 어느 단계에 이르렀든지, 그것을 출발점으로 여기고 계속 나아갑시다”라는 의미로 풀 수도 있고, “우리 각자의 성숙도에 맞게 행동합시다”라고 풀 수도 있다. 

 

묵상:

구원파적 신앙은 바울 시대부터 오늘까지 면면히 이어져 오면서 믿는 이들을 흔들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이 완성되었다고 믿는 것이 구원파적 신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그렇게 믿을 근거가 있습니다. 그분 안에 거하는 사람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요 5:24)고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믿는 이들은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거듭남을 통해 “이미” 부활을 경험했고, “이미” 영생을 얻었고, “이미” 영원한 유업을 상속 받았습니다. 따라서 구원파적 신앙이 완전히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또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믿는 이들은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야 하고, 거듭난 사람으로서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며 살아야 하며, 이 땅에서 천국을 누리며 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믿음으로 받은 모든 구원의 현실들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실 때 완전 해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이미” 얻었지만, “아직” 하나님의 자녀로서 완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령에 의해 “이미” 거듭났지만, “아직” 완전한 거룩성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유업을 “이미” 약속 받았지만, “아직”그것을 누리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구원파적 신앙은 “이미” 이루어진 일에만 초점을 두고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외면합니다. 그들은 자주 “나는 다 얻었다”고 말하기도 하고 “나는 목표점에 이르렀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미 얻은 구원은 어떤 일이 일어나도 손상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그로 인해 죄악을 범하는 것에 대해 거리낌이 없습니다. 육체적인 행위는 이미 얻은 영적 구원을 손상시킬 수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편지를 쓸 때 바울 사도는 매우 높은 영적 경지에 이르러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출발선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미” 얻어 누리고 있는 구원의 은혜로 인해 그는 “아직” 남아 있는 목표점을 향해 전력질주 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이 성숙한 믿음이고, 그것이 온전한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