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결혼하는 이에게 / 정용섭목사

새벽지기1 2024. 9. 1. 07:01

오늘 나는 어떤 이의 결혼 주례를 맡았소. 대구에서 예식장이 있는 서울로 올라가는 기차에 앉아서 주례 말씀의 요점을 정리했소. 그 내용을 들려줄 테니, 기록해둘 필요도 있고 해서, 그대가 앞으로 결혼을 앞두고 있으면, 혹은 결혼한 사람이라면 참고하시오. 별 내용도 아니니 너무 기대하지 마시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고린도전서 13장1-13절은 그 유명한 사랑예찬이다. 그리스도인들만이 아니라 누구라도 읽으면 감동을 받기에 충분하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고 시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견딘다고 한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이런 사랑을 주고받고 싶어 한다. 그러나 삶을 조금이라도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런 사랑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이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에서도 이런 사랑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일시적으로, 예의 상, 교양으로, 형식적으로 그럴듯하게 행동할 수는 있어도 전인적으로 사랑을 실천할 수는 없다. 바울의 사랑예찬에 나오는 내용은 우리가 실천해야 할 도덕규범이 아니라 사랑의 실패에 대한 경고로 읽어야 한다.

 

     오늘 결혼하는 신랑과 신부는 이 사랑예찬에 나오는 것을 서로에게 요구하지 않는 게 좋다. 그걸 요구하면 이루지지 않았을 때 실망할 뿐이다. 그걸 요구받으면 부담이 늘어갈 것이다. 그것보다는 각자가 이 사랑의 능력에 사로잡히도록 힘쓰는 게 옳은 길이다. 각자가 그런 능력에 사로잡힌다면 저절로 사랑의 관계로 돌입하게 될 것이다. 이런 길을 가기 위해서 신랑과 신부는 너무 밀착하지 말고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하는 게 좋다. 2인3각이라는 게임이 보기에는 좋지만 실제로 길을 가기에는 너무 불편하지 않겠는가. 서로 한쪽 다리를 묶지 말고 자유롭게 걷는 게 좋다. 그게 섭섭하다면 손을 살짝 잡는 정도로 그냥 도반처럼 길을 가는 게 좋을 것이다.

 

     카릴 지브란의 <예언자>에 ‘결혼에 대해서’라는 항목이 있다. 그는 신랑 신부에게 이렇게 권면한다. 서로를 응시하지 말고 서로 다른 곳을 함께 보며 살아가라고 말이다. 칼 힐티는 <잘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에서 부부를 포함한 모든 인간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각자 자기 수준의 삶을 상대방에게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등산으로 설명한다. 높은 곳에 오를 수 있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높은 곳에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이 상대방을 억지로 그곳으로 끌어올리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위의 내용은 영적인 방향을 말한 것이다. 이제 두 사람에게 구체적인 삶에 대해서 한 마디 하겠다. 오늘의 신랑과 신부에게는 두 가지 정체성이 있다. 하나는 지식인이요,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인이다. 지식인은 ‘노블리스 오블리쥬’라는 말이 있듯이 자신들의 지적 능력을 권한으로 사용할 게 아니라 섬김의 수단으로 사용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모든 삶을 하나님의 선물로, 즉 소명으로 생각하는 이들이다. 선물을 받았다면 빚진 자 아닌가? 지식인과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오늘의 신랑 신부가 자신의 삶을 이런 섬김으로 채워나가기를 바란다. 쉽지 않겠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