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사순절 영성(8) / 정용섭목사

새벽지기1 2024. 8. 30. 06:16

     위에서 설명한 십자가 신학, 또는 십자가 영성이 우리의 삶에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것이 바로 사순절 영성에서 우리가 귀를 기울어야 할 마지막 근본적인 질문이다. 이에 대해서도 독자들은 이미 답을 알고 있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고난을 감당해야 한다든지,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총에 가까이 다가간다고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너무 일반론적이다. 그것의 현실성(reality)이 제시되어야 한다. 그런 현실성과의 접촉을 통해서만 우리의 영성이 허공에 떠돌지 않고 실제적인 역동성을 얻을 수 있다. 두 가지로 정리하겠다.

 

     첫째, 사순절이 가리키는 고난의 영성은 고행이나 자학과 다르다. 이 문제는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신앙 정서와 긴밀히 결탁되어 있다. 신앙을 죄책감이나 자책감과 혼동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어떤 목사는 설교 때마다 당신들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알아야 한다고 외친다. 모든 행위를 도덕적인 죄와 연결시킨다. 술, 담배마저 죄의 항목에 넣는다. 강단에서 실제로 대성통곡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런 자학적인 설교에 반복해서 노출되면 신자들은 마조키즘 상태에 빠져든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 말씀의 깊이보다는 심리적이고 감성적인 위로에 매달린다. 악순환의 반복이다.

 

     이런 신앙의 모태는 유럽의 청교도 신앙과 미국의 부흥운동이다. 신자들을 단순히 회심과 도덕적인 기준으로만 재단하는 방식의 영성이다. 18, 19세기의 유럽과 미국에서는 그런 기준들이 필요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전혀 다른 인간 이해와 기독교 신앙에서, 즉 생명 중심의 영성에서 살아가는 21세기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여전히 청교도 영성과 부흥운동의 신앙을 강조한다는 것은 청년이 된 자녀들에게 초등학교 때 입던 작고 낡은 옷을 입히려는 형국과 비슷하다.

 

     이런 일들이 한국 교회에 목회적인 방편으로 버젓이 행해진다. 자책감에 빠진 신자들을 다루기는 쉽다. 목사들은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지 말라고 가르치면서 물질적인 고난을 신앙이라고 강변한다. 자녀들의 등록금을 교회당 건축 헌금으로 바치는 걸 좋은 신앙으로 부추긴다. 이런 일들이 어디 한 둘인가. 먼 곳에 출타했다가도 주일이면 본(本)교회에 반드시 돌아와서 예배를 드려야 온전한 성수주일인 것처럼 주장한다. 신자들이 당하는 불편과 고통을 신앙이라는 명분으로 호도한다.

 

     예수의 십자가는 극한의 고통이었지만 예수는 그걸 의도하지 않았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가능하면 십자가를 피하고 싶었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 신뢰와 순종이 결과적으로 십자가 처형에 이른 것뿐이다. 여기에 미묘한 차이가 있다. 그리고 오해가 생길 수 있다. 결과적으로만 놓고 본다면 예수는 고난과 고통의 운명을 살았다. 그러나 거기에 이르는 과정은 그렇지 않았다. 오늘 예수의 십자가 사건에 근거해서 신자들에게 고난과 고통을 강요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 바로 서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바로 선 사람이라고 한다면 경우에 따라서 고통을 감당해야 할 때가 있고, 아닐 때도 있다. 다시 말하지만, 고통 자체를 신앙적인 것으로 주장하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 영성에 대한 오해이며, 더 나아가 왜곡일 수도 있다.

 

     거꾸로 요즘 기독교인들 중에는 영악하고, 출세 지향적이고, 세속적인 출세에 도취된 신자들도 많다. 한국교회에 속칭 고지(高地)론이 지성적 기독교인들에게 팽배한 적도 있었다. 고지론은 복음 사역을 위해서라도 사회적으로 좋은 자리에 서야 한다는 주장으로, 세속적인 기복주의를 지성적인 용어로 바꾼 것에 불과하다.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할 기독교 신앙이 건전한 중산층 시민을 길러내는 시민종교로 변질되었다는 뜻이다. 자기 부정적인 신자들에게는 부끄러움이라도 있지만 긍정의 힘에 매료된 오늘의 신자들에게는 그것마저 없어서 기독교인의 특징을 찾으려고 해봐도 찾기 힘든 실정이다.

 

     세상과 삶을 무조건 비관하면서 자책감에 빠지는 신앙이나 믿는 자에게는 불가능이 없다는 식으로 성취감에 사로잡히는 신앙이나 모두 고난의 영성을 왜곡하는 것이다. 전자는 고난을 심리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며, 후자는 고난을 세속의 가치로 전락시킨다. 전자는 고난을 즐기며, 후자는 고난을 두려워한다. 전자는 고난의 무게에 눌려 있으며, 후자는 아무런 근거도 없이 피한다. 전자의 신앙은 너무 엄숙한 반면에, 후자는 너무 가볍다 못해 천박하기까지 하다. 전자는 신앙의 색깔이 너무 어둡고, 후자는 너무 밝다. 조금 도식적으로 분류하면 전자는 부활 신앙이 턱없이 부족하고, 후자는 십자가 신앙이 턱없이 부족하다. 양쪽 모두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고난의 영성을 제대로 확보하고 있지 못한 탓이다. 십자가 영성은 부정의 영성도 아니요, 긍정의 영성도 아닌, 그야말로 순종의 영성이다. 생명의 주인 앞에, 그 신비 앞에, 그 약속과 미래 앞에 순종하는 삶을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