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다른 이유는 십자가 처형이 과연 하나님이 선택한 인류 구원의 유일한 길이었는가, 하는 그 다음의 질문과 연관된다. 십자가 처형이 인류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이 분명하다면 예수가 그 길을 마다할 이유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예수가 그것을 피해보려고 시도했다는 것은 그것이 세상과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는 뜻이다. 쉽게 생각해보자. 하나님은 전지전능 하시고, 무소불위하신 분이다. 그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한 분이고, 종말에 세상을 완성할 분이다. 그런 절대적인 분이 한 유대인 남자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만 인류를 구원할 수 있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우리의 상식적인 논리에서 그렇다는 뜻이다.
이런 논리가 이상하게 들리는가? 아니다. 예수에게 십자가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야 한다는 사명과 충돌한다.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의 모든 설교와 메시아적 행위들이 수포로 돌아가는 사건이었다. 십자가는 죽음 자체이며, 실패이며, 좌절이었다.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희망하고 믿었던 예수에게 그것보다 더 큰 절망은 없다. 그가 그런 상황을 피해보려고 했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십자가 죽음의 절망과 저주는 당시 모든 이들에게 자명한 것이었다. 오죽했으면 바울이 이렇게 말했겠는가?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 1:23) 이런 맥락을 모르면 십자가 신학의 깊이를, 즉 사순절 영성의 깊이를 따라갈 수 없다.
십자가 처형을 통해서 인류가 구원받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예수가 확신하지 못했으며, 그래서 십자가 죽음을 피해보려고 했다면,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근본적으로 무의미한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그가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에 십자가의 의미가 훨씬 더 빛난다. 십자가 처형 사건에서 중요한 것은 십자가 자체가 아니라 거기에까지 이르게 된 예수의 순종이다. 십자가를 지기까지 하나님 아버지에게 순종했다는 사실이 핵심이다. 예수가 로마의 식민지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십자가로 죽으신 것이지 다른 시대, 다른 나라에서 태어나셨다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죽었을 것이다. 예수는 철저한 신뢰와 순종으로 그가 피하고 싶었던 십자가에 처형당했으며, 그것은 곧 인류 구원의 유일한 길이 되었다.
이 대목에 예수의 부활이 있다.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의 십자가는 그야말로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열광적으로 사로잡힌 한 유대인 남자의 완전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을 것이다.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은 창조의 하나님이 역사에 개입한 사건이었다. 실패라고 생각한 그 십자가에서 궁극적인 생명이 발현된 것이다. 기독교 영성의 진수는 바로 이것이다. 죽음을 넘어선 생명!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행하신 분이시다. 아니 창조자인 그분만이 이런 일을 행할 수 있다. 사순절의 영성도 이 구도 안에 들어 있다. 죽음에 이미 부활의 생명이 약동한다. 고난에 이미 기쁨이 싹트고 있다. 어둠에 이미 빛이 비추기 시작한다. 선취의 방식으로, 은폐의 방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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