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여기 하양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렸소. 그대가 사는 곳은 어땠소? 이왕이면 주룩주룩 쏟아졌으면 했지만 찔끔거렸소. 명주실 같은 빗줄기였소. 그래도 땅은 촉촉이 젖어들었소. 한동안 가물었는데 이제 나무들도 약간이나마 해갈을 했을 거요. 내가 다니는 노천 클레이 테니스 코트도 흙먼지가 잦아들게 됐으니, 두루두루 좋은 비요.
이런 날은 벽난로가 있는 카페에 가서 말이 통하는 사람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눠야 하오. 밖에는 비가 내리고, 낮이라도 좋고 밤이라도 좋은데, 안에는 장작불이 타오. 음악이 없어서는 안 되오.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는 어떻소? 겨울 나그네의 원제는 Winterreise라 하오. 겨울여행이라는 뜻이오. 그게 어떻게 겨울 나그네로 번역이 됐는지는 모르겠소. 젊었을 때 저 곡을 많이 들었소. 특히 독일 유학을 하던 시절에 많이 들었소. 그 연가곡 안에 ‘보리수’라는 노래도 있소. ‘성문 앞 우물가에...’로 시작되는 곡을 그대로 중고등학교 때 배웠을 거요.
젊은 시절 이야기를 잠간 하겠소. 이해해 주시구려. 이게 나이가 드는 증거인지 모르겠소.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낭만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오. 나중에 천국에 가서 지구에서의 일을 되돌아보면 극도의 낭만으로 다가오지 않을까 하오. 겨울비를 천국에서는 경험할 수 없을 게 아니오. 겨울방학이 끝나서 학교에 갔다가 우산 쓰고 돌아오는 꼬마들을 볼 수 없을 게 아니오. 그걸 다시 기억할 수 있다면, 정말 대단한 거 아니오? 이런 일이 없는 천국이라니, 얼마나 지루할는지. 너무 진지하게 듣지 마시오. 농담이오.
젊은 시절 이야기를 하려다가 옆으로 빠졌소. 다시 기분을 내서 말을 꺼내려니 좀 멋쩍게 되었소. 그래도 한 마디만 하겠소. 다른 건 아니오. 젊은 시절에는, 더 어린 시절까지 포함해서, 비가 무척 좋았소. 우산을 받쳐들고 빗속을 걷던 순간들이 아직도 아련하게 그리워지오. 지금도 대개의 젊은 친구들도 그렇게 느낄 거요. 사람들은 원초적으로 비를 좋아하는 것 같소. 그럴 수밖에 없소. 우리의 몸이 거의 물일뿐만 아니라 태아일 때도 물에 떠있었소. 태초에도 처음 창조 사건인 빛이 있기 전에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에 운행했다고 하오. 창조 기사의 세계관에 따르면 우주는 온통 물바다였소. 하나님은 물을 위와 아래로 나누었소. 그 중간을 궁창이라 부르셨소. 오늘은 오랜 만에 겨울비를 맛본 탓인지 말이 자꾸 옆으로 빠지는구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거요. 겨울비를 즐기시라. (2011년 2월8일, 화, 약한 겨울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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