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당시 가정을 구성하고 있는 또 다른 축은 주인과 종의 관계였다. 아내와 남편, 자녀와 부모에 대해서는 간략한 지침을 주는 것으로 만족한 사도는 종에 대해서는 비교적 길게 지침을 준다. 노예 제도가 당연시 되던 시대에 종들은 자주 주인에게 억울한 일을 당하곤 했다. 그래서 사도는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종에 대해 지침을 준다.
자녀에게 요청한 것과 같이 동일하게, 사도는 종에게, “모든 일에 육신의 주인에게 복종하십시오”(22절)라고 명령한다. 종은 주인의 절대 권한에 속하는 존재로서 모든 명령에 순종해야 한다. 그것이 당시 제도 하에서 종에게 기대되던 의무였다. 하지만 사도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주님을 두려워하면서, 성실한 마음으로 하십시오”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사회적 통념에 신앙적인 색깔을 입힌다. “성실한 마음”은 “정직한 마음” 혹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
“주님을 두려워하면서”라는 말은 살아계신 주님의 눈을 의식하라는 뜻이다. 주님을 의식하게 되면 “눈가림으로” 하지 않고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게 된다. 주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주인을 위해 일할 때 종은 주인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럴 때 “진심으로”(23절) 행하게 된다. “진심으로”는 “마음 다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이어서 사도는 종 된 신도들의 변화된 신분에 대해 상기시킨다. 당시 사회에서 종은 주인에게서 아무런 유산도 기대할 수 없었다. 따라서 “여러분은 주님께 유산을 상으로 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24절)라는 말은 종들에게는 놀라운 약속이다. 인간적인 견지에서 보면 그들은 인간 주인을 섬기고 있지만, 실은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섬기고 있다. 그 주님은 아무도 차별하지 않으신다(25절). 인간 주인은 종을 부당하게 대우하곤 하지만, 하늘의 주님은 모든 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심판하신다. 그러므로 어떤 핑계로도 “불의”를 행하지 말고 늘 정직하고 신실하게 맡겨진 일을 섬겨야 한다.
종들에게 주인에 대한 성실한 복종을 요구한 사도는, 주인에게 종들에 대한 공정한 대우를 요구한다(1절). “정의”는 종에게 노동에 대한 정당한 몫을 주라는 뜻이고, “공정”은 종들을 차별하지 말고 동등하게 대우하라는 뜻이다. 이것은 당시 스토아 철학자들도 요구하던 덕목이다. 하지만 사도는 “여러분도 하늘에 주인을 모시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라고 덧붙임으로써 신앙적인 색깔을 더한다. 간단한 문장이지만, 이것은 주인들에게 엄중한 경고를 숨긴 말이다.
묵상:
어떤 사람들은, 사도가 정말 진리의 사람이었다면 노예 제도의 철폐를 부르짖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따져 묻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당시 사도가 어떤 처지에 있었는지를 모르고 하는 말입니다. 그는 신생 종교의 유랑 전도자였고, 그로 인해 감옥에 갇혀 있었습니다. 그런 처지에서 노예 제도의 철폐를 부르짖었다면, 그는 정작 자신에게 맡겨진 복음 전파의 사명을 다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의 일차적인 소명은 사회 개혁이 아니라 인간 개혁이었습니다. 사회 개혁은 인간 개혁의 결과로 이루어져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 개혁의 유일한 능력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도가 다른 가족 구성원들(아내, 남편, 자녀, 부모, 주인)에게는 한 절씩을 할애한 반면 종에 대해서는 네 절을 할애하고 있는 이유는 그들을 순응적인 존재로 길들이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도의 지극한 애정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는 당시 노예 제도 하에서 종들이 얼마나 자주 폭행과 차별과 착취를 당하고 있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사도에게는 그들을 해방시킬 아무런 외적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내적 능력 뿐이었습니다.
사도는 그들에게, 맡겨진 일을 주님께 하듯 신실하게 섬기라고 권면합니다. “주님께 하듯 한다”는 말은 “예배 드리듯 한다”는 뜻입니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죽지 못해 하는 것과 예배 드리듯 하는 것은 천양지차입니다. 그것이 내적 해방의 비결입니다. 또한 사도는 그들에게 영원한 소망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들은 신분 상 지상에서 받을 아무런 유산이 없지만 하늘의 주님에게는 영원한 유산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살아계신 주님에 대한 믿음 그리고 영원한 유산에 대한 소망이 있다면, 그들이 현실의 고통을 견디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노예 제도가 사라진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과거 노예들이 처했던 것 같은 상황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 것도 고칠 수 없어서 주어진 현실을 감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우리는 현실 너머에서 일하고 계신 주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주님께서 그분의 차원에서 행하시는 일을 소망해야 합니다. 그것이 현실을 이기는 힘이 됩니다.
'좋은 말씀 > -사귐의 소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난의 동역자 (골 4:7-18) / 김영봉목사 (0) | 2024.09.28 |
---|---|
마지막 권면 (골 4:2-6) / 김영봉목사 (0) | 2024.09.27 |
그리스도 안에 부모도, 자녀도 없다.(골 3:20-21) / 김영봉목사 (0) | 2024.09.26 |
부부 관계, 십자가를 연습하는 자리 (골 3:18-19) / 김영봉목사 (0) | 2024.09.24 |
한몸으로 살아가기 (골 3:12-17) / 김영봉목사 (1) | 2024.09.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