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개신교가 대부분 그러했듯이 신학의 대상을 축소시키면서 신앙을 존재적 중심개념으로(zum ontischen Zentralbegriff) 만들든가 진정한 구원 사건으로 승격시킨다면 이것 또한 좋은 경향은 아닐 것이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신앙론으로서의 신학이요, 기독교 신앙에 대한 학문과 교리로서의 신학이다. 따라서 성경과 교회역사에서 탐구되어야 할 것은 오직 신앙의 증인들과 가능한 한 신앙의 영웅들이다. 그리고 이들 19세기 개신교회는 하나님의 행적과 말씀에 관련되어야 할 내용들을 신앙의 사고와 신앙의 표현들로 수용하며 그렇게 환언시켜 풀이하고, 이것에 들어맞지 않는 것은 말없이 잘라내든가 가치 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잘라내든가 하여 마치 교회의 사도신경이 말하는 “나는 ....을 믿는다.”(Credo)에서 믿는 내용은 무시하고 단지 ‘크레도’만이 고백의 구성요소인 것처럼 생각한다. 마치 이것은 성부, 성자, 성령에 대한 신앙 대신에 이 고상한 말들을 통해서 표현된 교회의 신앙, 결국은 자기 자신의 신앙을 믿고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과 같다.(110쪽)
지금 바르트는 지금 신학과 신앙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소. 신학과 신앙은 관점에서 따라서 다르기도 하고 비슷하기도 하오. 양쪽 모두 그 대상이 하나님이라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지만 신앙이 사람의 영적인 태도를 가리키고 신학은 하나님에 대해서 진술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나오. 이런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소. 사람이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그분을 진술한다는 것도 늘 한계가 있는 법이오. 그래서 사람의 신앙에 무게를 두기도 하오. 그게 위에서 바르트가 19세기 개신교 신학의 특징으로 거론한 것이오.
쉴라이에르마허는 종교의 본질을 ‘절대의존의 감정’이라고 했고, 리츨은 윤리로 보았소. 그게 다 인간의 신앙을 중심에 놓는 것이오. 오늘 한국교회가 믿음을 강조하는 것도 이런 흐름과 비슷하오. 무엇을 믿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믿는 사람의 행위와 감정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오. 신자들은 자기의 믿음에 감동하고 있소. 일종의 나르시시즘이오. 오늘 한국교회는 19세기 자유주의 신학과 같은 길을 가고 있소. 본인들은 자신들이 어떤 길을 가고 있는지 모르오. 바르트를 자유주의 신학자라고 비판하는 교단과 그런 신학교가 있을 지경이니,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소. 코메디요, 완전히 코메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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