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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에서의 고통스런 기억 / 정용섭목사

새벽지기1 2024. 9. 22. 06:53

아래는 수요성경공부 강의 초안이오. 결론 부분이 어렵소. 원수 증오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요. 시편기자는 직접 원수를 갚기 위해서 계획을 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탄원을 드렸다는 사실이 여기서 중요하오. 자기가 직접 원수를 갚지 않는 이런 신앙 태도로 원수 갚기의 악순환이 끊어지는 게 아닌가 싶소. 하여튼 이 문제는 우리에게 많은 걸 생각하게 하오.

 

 

대구샘터교회 수요성경공부, 2011년 6월22일, 저녁 8시, 시편 137편

 

바벨론에서의 고통스런 기억

 

구약성경을 이해하는데 가장 중요한 사건은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서 함락된 일이다. 이건 그들에게 끔찍한 사건이었다.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생각한 이스라엘이 망했다는 사실과 하나님의 거룩한 도시인 예루살렘과 성전이 이방인들에게 괴멸되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위 시편 137편은 바벨론 유수 50년이 끝난 뒤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당시를 회고하는 내용이다.

 

1절- 이 시인은 “바벨론 강변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다.”고 노래한다. 탄식의 노래다. 이들은 포로로 잡혀 간 이들이다. 마치 고대 중국으로 끌려간 고려나 조선 시대의 왕족과 비슷한 신세였다.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모든 이들의 정신적 지주다. 그들이 예루살렘을 떠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경험이었다.

 

2,3절- 이 포로들은 강변에 모여서 시온을 그리워하며 종종 노래를 불렀다. 마치 일제하에서 일본, 중국, 러시아로 피신했던 이들이 아리랑을 부르며 고국을 그리워한 것과 비슷하다. 수금을 버드나무에 수금을 두었다는 것은 노래 부르기를 그만두었다는 뜻이다. 그 이유는 바벨론 백성들의 요구 때문이다. 한쪽은 포로이고, 다른 한쪽은 주인들이다. 주인들은 포로들에게 노래를 요구했다. 아마 이스라엘 포로 연주자들을 잔치에 불러들인 것 같다. 이것이 시인에게는 참을 수 없는 수모였다.

 

4-6절- 이 시인은 이방 땅에서 이방인을 위해서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고 한다. 바벨론 사람들의 요구를 따르는 것은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런 심정을 시인은 문학적으로 묘사한다. 예루살렘을 잊을 바에야 수금을 타는 재주를 잊는 게 낫다는 것이다.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는 게 낫다고도 했다. 음악적인 소질을 포기하는 한이 있어도 바벨론을 위해서 연주하거나 노래 부르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20세기 나치 포로수용소에서도 이런 경험을 했다. 그곳에 수감된 이들 중에서 악기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은 나치를 위해서 연주를 해야만 했다.

 

7절- 시인은 여호와께 원수를 갚아달라고 간구한다.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라고 요구한다. 고대 사회에서 패전 국가가 어떤 고통을 당했으리라는 것은 긴 설명이 필요 없다. 모든 것이 초토화된다. 모든 것이 강탈당한다. 세월이 흘렀지만 그 순간을 생각하면 원수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에돔 자손을 쳐달라고 요구한다. 에돔은 바로 바벨론 족을 가리킨다.

 

8,9절- 시인은 계속해서 자신의 증오심을 숨기지 않는다. 바벨론을 향한 저주가 쏟아진다. 심지어 어린 것들마저 죽여야 한다고 외쳤다. 이런 대목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당한대로 다 갚아야 한다는 말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거나 원수를 사랑하라는 신약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야 할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혼란스럽다. 원수를 갚아달라는 간구가 잘못된 것은 아니며,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 역시 옳다. 이 긴장을 오늘 우리는 어떻게 뚫고 나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