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우리의 신앙이 그냥 인간에게서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라면 별 것 아닌 사건이요, 여기에서 논의될 가치조자 없을 것이다. 만약에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확실한 지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추측이요, 의견이요, 개연성의 계산이요, 따라서 이 신학의 대상을 이에 대한 추측, 요청, 개연성과 동등시 하고 이런 의미로 긍정한다면 신앙 사건이라는 별 볼 일 없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이런 신앙은 신학자를 참된 신학자가 되게 하지 못한다. 이 세상에서 그 누구도 우리가 이미 언급한 의미에서의 인간을 놀라게 하고, 관여시키며, 책임 있게 관여시키는 신학의 대상을 생각해낼 수 없고 추측할 수 없으며 요청할 수 없다. 그래서 이 대상에 대한 신앙은 가설적이고 문제성 있는 지식이 아니라 하나의 내용이 충일한 지식이요 엄격하고 확실한 지식이다. 이것에 비교하면 인간적인 한계상황 이편에서 가능한 가장 확실한 지식일지라도 유용할지는 몰라도 근본적으로 문제투성이의 가설에 불과할 것으로 평가될 수 있다.(109쪽)
위 글을 해석할 수 있다면 그대는 이미 신학적으로 어른이오. 만만한 작업이 아닐 거요. 바르트는 신앙의 문제를 인간에게서 발생하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소. 사람의 심리에서 나오는 어떤 것, 사람의 감정에서 나오는 어떤, 사람의 정치적 참여에서 나오는 어떤 것이 아니오. 신앙의 주도권은 하나님께 있소. 하나님이 먼저 사람을 찾아오오. 사람의 책임은 하나도 없다거나, 사람의 노력이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은 아니오. 그 문제는 이 대목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오.
지금 바르트가 말하고 있는 것은 궁극적인 차원이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학으로 변질된 신학의 중심을 바르게 잡는 중이오. 인간을 이해하면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는 주장, 그리고 세상의 계몽과 개량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라는 주장이 잘못이라는 말이오. 신학의 대상인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근본적으로 뛰어넘소. 따라서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우리를 향할 때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수 있고, 하나님을 믿을 수 있소. 지금 우리는 우리의 잣대로 행복 여부를 판단하고 있소. 그 행복의 조건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오. 이런 생각은 아무리 순수하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교 신앙의 근본과는 거리가 머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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