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사도는 “철학이나 헛된 속임수”에 대한 경고를 이어간다. 그는, 골로새 교인들이 “세상의 유치한 원리”(20절)에 있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말한다. “세상의 유치한 원리”는 유대인들이 지키던 종교 전통과 이방 종교들의 전통을 가리킨다. ‘스토이케이온’은 “유치한”으로 번역할 수도 있고 “초보적인”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다.
믿는 이들은 “세상에 속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속하여” 산다. “세상의 유치한 원리”를 따라 산다는 말은 이 세상에 속하여 살고 있다는 의미다. “붙잡지도 말아라. 맛보지도 말아라. 건드리지도 말아라”(21절)는 말은 레위기에 나오는 여러가지의 정결 규정을 가리킨다. 율법은 부정한 것을 만지거나 가까이 하면 부정탄다고 가르쳤다.
“이런 것들은 다 한때에 쓰다가 없어지는 것”(22절)이라는 말은 유대인들에게는 충격적인 발언이다. 사도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율법은 “사람의 규정과 교훈을 따른 것”이라고 부연한다. 이것은 “장로들의 전통”에 대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정결례를 지키는 문제에 대해 예수님은 “너희는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막 7:8)고 하시면서, “모든 음식은 깨끗하다”(19절)고 선언하셨다.
앞에서 사도는, 유대인들이 지키는 종교 전통들을 “장차 올 것(실체)에 대한 그림자”(17절)라고 했다.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셨으니, 사람의 규정과 교훈을 따라 만들어진 그림자는 필요가 없어졌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율법의 전통을 지키는 것은 상관 없으나, 이방인들에게도 율법을 지키라고 강요하는 것은 잘못이다.
유대교와 이방 종교의 전통들은 사람의 내면을 변화시키지는 못하고 외형적인 경건만 쌓게 만든다(23절). “꾸며낸 경건”은 ‘에텔로트레스키아‘의 번역인데 “위선적 영성”으로 번역할 수 있다. “겸손”은 18절에서 사용된 동일한 단어로서 “몸을 학대하는”이라는 단어와 의미와 겹친다. 유대교와 이방 종교의 전통들을 따라 살면, 육신을 학대하는 결과에 이른다. 금욕주의에 빠진다는 뜻이다. 그것은 “겉으로는 경건하게 보이나, 경건함의 능력은 부인하는”(딤후 3:5) 위선적 영성으로 인도한다.
묵상: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남편이 아내를 버려도 됩니까?”(막 10:2)라고 여쭙니다. 예수님은 “모세가 너희에게 어떻게 하라고 명령하였느냐?”(3절)고 반문하십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신명기 24장 1절을 근거로 하여 “이혼증서를 써 주고 아내를 버리는 것을 모세는 허락하였습니다”(4절)라고 답합니다.
예수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모세는 너희의 완악한 마음 때문에, 이 계명을 써서 너희에게 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남자는 부모를 떠나서, [자기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된다.’ 따라서, 그들은 이제 둘이 아니라, 한 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갈라놓아서는 안 된다”(5-9절)고 답하셨습니다.
구약성경에 기록된 율법의 일부는 하나님께서 계시하여 주신 것이고, 일부는 모세가 하나님의 뜻을 담아 정하여 준 것입니다. 이혼증서를 써 주고 아내를 내보낼 수 있다고 율법에 규정한 것은 그들의 “완악한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즉, 그들이 죄성에 물들어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여 그들이 행할 수 있는 수준에서 율법을 정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율법 규정들 안에는 하나님의 뜻이 반영되어 있지만, “최대치의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죄 된 인간이 행할 수 있는 “최소치의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율법은 글자 그대로 지키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고 그 뜻을 행하라고 주어진 것입니다.
사도는 율법 규정이 “실체의 그림자”라고 했고, 히브리서 저자는 “실재의 모형”이라고 했습니다. 불행하게도, 유대주의자들은 율법을 실체요 실재로 여겼습니다. “율법주의”란 율법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여기고 그것을 실천하여 구원에 이르려는 노력입니다. 바울 사도는 누구보다 철저히 그렇게 믿고 노력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내면의 변화를 만들어 내지 못하고 외적인 경건의 껍질만 두텁게 할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공연히 몸을 괴롭히고 학대하는 어리석음에 빠지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율법의 차원에서 만족하지 말고 창조의 차원으로 나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의 능력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지어진 사람은 태초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기대하셨던 것을 목표로 삼습니다. 우리의 죄성이 살아 있는 한,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예수의 능력 안에서 거듭 나게 되면 우리는 율법의 차원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높은 기준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내면과 외면이 모두 거룩함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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