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사도는 골로새 교인들에 대한 권면을 이어간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받아들였다(6절). 당시에 로마 제국에서 “주님”(‘퀴리오스‘)이라는 칭호로 불릴 사람은 황제 뿐이었다. 로마 황제를 주님으로 믿는 사람들은 그의 질서를 따라 살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는 사람들은 그분의 질서를 따라 산다. 그래서 사도는 “그분 안에서 살아가십시오”라고 부연한다. 앞에서도 강조한 것처럼, 믿음은 마음의 문제인 동시에 행동의 문제다. 마음의 고백은 삶의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사는 것에 대해 사도는 나무의 이미지를 사용한다. “뿌리를 박고 세우심을 입어서”(7절)라는 표현을 통해 사도는, 신앙 생활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지속적인 사귐의 관계 안에서 성장해 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뿌리를 박는” 것은 “가르침을 받는” 것이고, “세우심을 입는” 것은 “믿음을 굳게 하는” 것이다. 믿음이 자라면 “감사의 마음”이 넘치게 된다.
8절에서 사도는 4절에서 한 경고를 반복한다. “철학이나 헛된 속임수”는 당시 골로새에 유행하고 있던 여러가지 철학과 종교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인데, “철학이나 헛된 속임수”는 “사람들의 전통과 세상의 유치한 원리”를 따라 만들어진 것이다. 믿는 이들은 그런 것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는 “온갖 충만한 신성이 몸이 되어”(9절) 머물고 계시기 때문이다. “몸이 되어 머물다”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임재를 일상 속에서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뜻이다. 골로새 교인들은 이미 그것을 경험해 왔다(10절).
사도는 골로새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할례”(11절)를 받음으로 인해 이 일이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그들이 받은 할례는 살점의 일부를 잘라내는 할례가 아니라 “육신의 몸” 전체를 잘라내는 할례다. 그 할례는 세례 중에 이루어졌다. 세례를 위해 물 속에 들어갈 때 그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되는 것이며, 물에서 나올 때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나는 것이다(12절). 세례를 받기 전에 그들은 영원히 죽은 사람들이었으나, 세례를 받은 후에는 죄 용서를 받고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13절).
믿는 이들이 받은 죄 용서를 설명하기 위해 사도는 빚문서를 비유로 사용한다(14절). 유대인들의 사고 방식에 따르면, 죄 짓는 것은 하나님께 빚을 지는 것이다.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마 18:21-35)에서 예수님은 하나님께 진 우리의 빚이 너무 많아서 우리로서는 갚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그 빚 문서를 십자가에 못박으셔서 없애 버리셨다.
사도는 또한 로마 군대의 개선 행렬을 비유로 사용하여 십자가에서 일어난 사건을 설명한다(15절). 로마 군대가 정복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올 때면 맨 뒤에 무장 해제된 포로들을 결박하여 끌고 왔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는 우리의 죄를 해결하려는 것만이 아니라, 참되고 영원한 승리를 거두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구경거리가 되었지만, 실은 그 사건을 통해 통치자들과 권세자들이 구경거리가 되었다.
묵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일어난 구원 사건들(죄 용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 회복, 거듭 남, 성령의 내주와 감화, 거룩한 삶에 있어서의 성장)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우고도 남습니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에서 사도가 “모든”이라는 단어와“충만”이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는 이유는 예수 한 분만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다른 철학이나 종교로써 보완해야 할 정도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부족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교묘한 속임수”(4절) 혹은 “헛된 속임수”(8절)에 넘어가 악한 영의 “노획물”이 되는 것입니다.
골로새 교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일상 생활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점쟁이나 무속인을 찾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상 생활의 문제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죄 사함과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얻지만, 현실 생활의 문제들은 무속인들을 통해 해결 받고 싶어합니다.
사도는 골로새 교인들에게 “그리스도 안에 온갖 충만한 신성이 몸이 되어 머물고 계십니다”(9절)라고 말합니다. “몸이 되어 머물고 계시다”는 말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일상 생활에 구체적으로 관여하고 계시다는 뜻입니다. 일상의 일들에 대해서도 그리스도 예수를 의지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분 안에 뿌리를 박고, 세우심을 받는”(7절) 일에 게으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꾸준히 받아서 믿음이 굳세어지면 그분의 인도하시는 손길을 늘 경험하게 됩니다. 일상 생활 가운데 그분이 인도하시는 구체적인 손길을 경험합니다. 그것을 경험할 때면 감사의 마음이 넘칩니다. 자신이 그분의 다스림 안에 살고 있으며, 그분의 섭리하시는 손길 아래에 있음을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주술사와 무속인을 찾는 이유는 불안감과 두려움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든든히 뿌리를 둔 사람은 그런 불안감과 두려움에 휘둘려 악한 영의 제단 앞에 찾아가 머리 숙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믿는 이들이 범할 수 있는 최악의 수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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