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귐의 소리

생사를 초월하는 믿음 (빌1:19-26) / 김영봉목사

새벽지기1 2024. 8. 24. 06:26

해설:

19절의 원문에 사용된 ‘소테리아’는 ‘석방’을 의미할 수도 있고 ‘구원’을 의미할 수도 있다. 개역개정은 후자로 번역했지만, 새번역은 ‘석방’으로 해석했다. 사도가 자신이 석방될 것이라고 확신한 이유는 빌립보 교인들의 기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도우심” 때문이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의 관심사는 석방되느냐 사형 당하느냐가 아니라, “아무 일에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온전히 담대하여” 자신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받으시”(20절)는 것에 있다. “존귀하게 되다”는 “커지시다”로 번역할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이 죽어서 그리스도께서 높아지고 커지신다면 기꺼이 죽겠고, 그런 목적을 위해서 고난 투성이의 삶을 지속해야 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고 말한다. “전과 같이 지금도”라는 말에서 보듯, 그것이 다마스쿠스 이후에 그가 일관되게 살아온 지향성이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21절)라는 말은 자신의 매일의 삶의 목표가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살며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것에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는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라고 고백한다. 죽는 것은 그리스도와 완전히, 영원히 연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는, 자신만을 생각한다면 죽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 더 좋지만(23절), 살아 있어서 빌립보 교인들과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더 살게 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다(22절, 24절). 

 

그런 까닭에 사도는 자신이 석방되어 그들을 도울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한다(25-26절). 여기서 사도는 “압니다”라는 동사를 사용한다. 미래에 일어날 일이 너무도 분명하기 때문에 “안다”고 표현한 것이다. 

 

묵상:

사도는 죽고 사는 것을 초월한 사람입니다. 목숨보다 더 크고 높고 영원한 세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하나님의 영원한 세상에 눈을 뜨자, 세상을 보는 그의 시각이 뒤집어졌습니다. 과거에는 물질계가 전부인 줄 알았는데, 그것은 영원한 세상의 일부였습니다. 과거에는 목숨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영원한 생명이 있었습니다. 과거에는 육신의 삶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죽음을 넘어서는 차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음으로 인해 자신이 이미 그 영원한 세상으로 옮겨졌음을 알았고, 믿음 안에서 일어난 일들이 장차 하나님 나라에서 완성될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입니다”(21절)라고 고백합니다. 매일의 삶에서 그가 추구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그분과 연합하여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서 자신의 삶을 통해 그리스도가 높아지고 커지신다면 그것으로 족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죽고 사는 것을 초월했습니다. 죽는 것은 그가 매일 기도하며 추구했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완성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산다는 것은 매일 죽음을 경험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삶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커지시고 높아지셨기 때문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에게 이 편지를 쓸 당시에 사도는 자신이 석방되리라고 확신했습니다. 사도행전의 마지막 보도(28:30-31)에 근거하여 교회는, 사도가 로마에서 이년 동안 가택 연금 상태에 있다가 참수형으로 순교 당했을 것이라고 가정해 왔습니다. 하지만 어떤 학자들은 이년 후에 석방되어 스페인까지 가서 전도를 하다가 다시 체포되어 순교 당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렇든 저렇든 사도에게는 상관이 없었습니다.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사는 것이 목적이었고, 살아서든 죽어서든 그분을 높이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 때문에 그는 전도 중에 겪어야 하는 고난에도 굴하지 않았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나에게는, 사는 것이 돈입니다”라고 말할 것이고, 어떤 이들은 “나에게는, 사는 것이 자식입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나에게는,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라고 할 것이고, 어떤 이들은 “나는 아무 목적 없이 삽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처럼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입니다”라고 고백하며 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