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리베라 메, 도미네 / 정용섭목사

새벽지기1 2024. 8. 19. 06:30

     지난 월요일 어느 모임에서 강연을 하다가 베르디의 ‘레퀴엠’에 관한 이야기를 했소. 그 곡 중에 ‘Libera me, Domine’라는 제목의 노래가 나오오. 그 뜻은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요. 그 이외에도 영원한 안식, 진노의 날, 비통의 날, 세상은 먼지가 되리라 등의 제목이 나오오. 언제 기회가 되면 이 레퀴엠 내용으로 일련의 글을 써보고 싶소. 레퀴엠 해설로 여름 수련회를 열면 어떨지. 분위기가 너무 칙칙할지 모르겠구려. 생각해보겠소.

 

     사람은 왜 마지막 순간에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치지 않을 수 없는 거요? 일단 우리 운명을 현상적으로 보시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엄청난 사건인 것 같지만 사실은 대단한 게 아니오. 살아 있다는 것과 죽어 있다는 사실의 차이는 종이 한 장이오. 우리는 늘 죽음에 직면해 있소. 숨을 못 쉬면 죽소. 심장이 멎으면 죽소. 뇌 세포가 파괴되면 살아 있으나 죽은 것과 같소. 죽은 사람을 보았소? 아무리 아름답게 생긴 여자라고 하더라도 죽고 열흘 정도만 지나면 보기 흉하게 변하기 시작하오. 여전히 미모가 부분적으로 남아 있을 수는 있으나 죽은 얼굴이 아름다워 봐야 얼마나 아름답겠소. 그리고 곧 썩는다오. 살아있을 때의 몸과 썩었을 때의 몸을 비교해보시오. 이걸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도 생각해보시오. 나를 구원해 달라는 기도를 드리지 않을 수 없소.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죽는 것이 순리이니 담담하게 받아들이면 그만이라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거요. 소위 도사들은 죽음도 일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거요. 일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해서 죽음을 극복한 것은 아니오. 만약 이런 식으로 해결된다면 문제는 간단하오. 환각제를 복용하면 구름타고 가듯 쉽게 죽을 수도 있을 거요. 이런 것을 인간다운 죽음이라고 말할 수는 없는 거 아니겠소. 그것은 착각이고, 자기부정이오. 죽음의 추상화요. 따라서 삶의 추상화요. 자의든지 타의든지 죽음의 깊이를 더 뼈저리게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실도피의 에피소드요. 모든 것과의 단절이라는 그 실체적 사실 안으로 들어간다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절망을 경험할 수밖에 없소. 나를 구원해달라는 기도는 당연한 거요.

 

     ‘리베라 메, 도미네’는 죽음에 직면할 때만이 아니라 살아 있을 때도 필요한 기도요. 물에 빠진 사람의 고함소리와 같소. 우리가 지금 이런 기도를 드리지 않는 이유는, 더 정확하게는 이런 기도를 드리지 못하는 이유는 물에 빠진 경험이 없기 때문이오. 영적으로 물에 빠지는 경험 말이오. 더 이상 숨을 쉬기 힘든 우리의 영적 실존을 직시할 때만 우리는 그분을 향해서 이런 기도를 드리게 되는 거요. 이때만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있소. 안식을 얻을 수 있소. 진심으로 기도해보시오. 리베라 메, 도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