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바르트의 신학 이야기(11) / 정용섭목사

새벽지기1 2024. 8. 15. 06:43

복음주의 신학의 자리를 좀더 자세히 규정하려면 우리는 한 특수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과의 관계 때문에 유일회적으로, 그리고 유일무이하게 탁월한 위치에 있다. 이들의 위치가 탁월한 이유는 이들의 심성이나 태도가 유능하거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올바른 관계를 가졌기 때문이 아니다. 이들은 이런 유능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호의와 존경과 영예를 얻은 것도 아니다. 이들의 위치가 탁월한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특수한 역사적 상황 때문이고, 이를 위해서 부름 받고 무장된 특수한 봉사 때문이다. 이들은 다름 아니라 말씀의 증인들이다. 더 자세히 말하면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 의하여 직접 부름 받아 수용했고 다른 사람들에게 확증했기 때문에 근원적인 증인들이다. 우리는 지금 성령에 나타난 말씀의 증인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즉 구약의 예언자들과 신약의 사도들에 대해서다. 이들은 하나님이 인간과 계약을 맺으시고 이로써 그의 말씀을 인간에게 말씀하실 때 동시대인들이었다. 이들은 이 계약사, 혹은 이 하나님의 말씀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증인들이다.(45)

 

     하나님의 말씀은 공중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게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에서 나온 문서라는 사실을 그대도 잘 알고 있을 거요. 그 역사에서 살아간 사람들이 있소. 그들을 가리켜 증인이라 하오. 성서를 읽을 때, 또는 그리스도교 신학을 이야기할 때 이 증인들을 염두에 두어야 하오. 간혹 독자 중심의 성서읽기를 강조하는 이들이 있소. 나름으로 일리가 있는 주장이기 하오. 성서를 남의 이야기나 단순한 교리로 읽지 말고 자신의 실존에서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은 옳소.

 

포스트모던 시대에서 이런 주장이 크게 환영을 받고 있소. 보수주의를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포퓰리즘에 기울어진 한국의 대다수 신자들에게 이런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오. 그 전형이 바로 ‘큐티 식 성서읽기’요. 이런 방식의 성서읽기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거의 일방적으로 실존적 차원으로만 몰고 가오. 더 나가면 성서와 신앙을 도구화하오. 신앙이 종교적 처세의 기술이 되고 마오. 이런 현상을 우리는 늘 경험하면서 살고 있소. (2011년 2월1일, 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