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칼 바르트라는 신학자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을 거요. 그에 관해서 말하기 시작하면 정말 할 말이 많소. 그걸 이 자리에서 풀어놓을 필요는 없을 것 같소. 아는 사람에게는 지루할 것이고, 모르는 사람에게는 거리가 먼 이야기일 테니 말이오. 나는 당분간 바르트가 말년에 쓴 <Einführung in die evangelischee Theologie>에서 눈에 뜨이는 구절을 차례대로 그대에게 들려줄 생각이오. 이 책은 이형기 선생을 통해서 번역되었소. <복음주의 신학입문>(크리스찬 다이제스트)이라는 제목이오. 이 제목은 적절치 않소. 우리나라에서 복음주의라는 단어는 진보 신학과 대별해서 쓰이오. 보수주의와도 약간 다르오. 보수적이지만 사회 문제에서 열린 관점을 말하오. 그러나 독일에서 ‘에방겔리쉐 테올로기’는 로마가톨릭과 구별해서 개신교를 가리킬 때 쓰이오. 저 책은 <개신교신학 입문>이라고 번역되어야 하오. 어쨌든지 좋은 책을 번역해주신 이형기 선생을 고맙게 생각해야 하오. 바르트의 글은 청색으로 Tm고, 괄호의 숫자는 번역 쪽수요. 인용 글에 나오는 ‘복음주의신학’은 ‘개신교신학’이라고 생각하시오. 가능하면 책을 꼼꼼히 읽는 게 최선이지만 여기서는 대충 지나갈 테니 그리 아시오.
복음의 하나님은 한분이시지만 아버지, 아들, 성령의 통일성 속에 계신 한분이시다. 이처럼 그는 자기와 구별되는 실재에 대하여 원칙적으로 뿐만 아니라 사실상 자유하시다. 그러나 그는 인간 옆에 계시다가 단순히 인간 위에 군림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인간 안에 그리고 인간과 더불어 계시며, 무엇보다도 인간을 위한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은 인간의 주님이실 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 형님, 친구로서 인간의 하나님이시다. 이것이 결코 하나님의 신적인 본질을 축소시키거나 희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다.(32)
삼위일체에 대한 가장 간략한 설명이오. 사실 삼위일체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소. 시험을 보기 위해서 삼위일체에 대한 설명을 공부할 수는 있지만 그것과 일치하기는 어렵소. 왜냐하면 그것은 실증적인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오. 마치 고체이면서 액체인 어떤 물질을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것과 같소. 어떤 사람은 물을 생각할 거요. 기온이 낮으면 고체가 되고 높으면 액체가 되니 말이오. 그것으로 비교될 수 없소. 기온이나 시간에 따라서 존재 방식이 달라는 어떤 것을 말하는 게 아니오. 위에서 바르트는 자유와 내재를 말했소. 하나님은 자유롭지만 인간의 역사에 내재한다는 것이오. 내재는 곧 자유의 포기요. 그런 존재를 상상할 수 있겠소? 오늘은 너무 진도를 많이 나가지 않겠소. 추운 날씨에 감기 조심하시오. (2011년 1월15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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