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주의 신학이란 하나님의 이 은혜의 ‘yes’에 대한 응답의 노고요, 인간을 향하신 그의 우정을 통하여 계시하신 ‘하나님의 자기계시’에 대한 응답의 노고이다. 복음주의 신학은 ‘인간’의 하나님으로서 하나님과 관계하며, 따라서 하나님의 인간으로서 인간과 관계한다. 복음주의 신학에서 인간은 결코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니체)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극복에로 확정된 존재이다. 만약 ‘신학’이라는 말이 그의 대상이 지니는 이 결정적인 차원, 즉 자유롭게 반응하는 사랑을 불러일으키는 하나님의 자유로운 사랑, 감사(eucharistia)를 불러일으키는 하나님의 은혜(charis)를 결여한다면 이것은 정확히 말해서 ‘신학’이란 말의 의미내용을 충분히 갖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33)
위 바르트의 글을 읽으면서 그대는 “신학은 정말 신앙생활에서 필요 없는 거군!” 하고 생각할지 몰라서 걱정이오. 일단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도 힘들고, 어느 정도 이해했다고 해도 교회 생활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게 느껴지기 때문이오. 실제로 그런 생각이 든다고 하더라도 아직 단정하지는 마시오. 신학에 접근하기 어려운 이유 중의 하나는 거친 번역 때문이오. 위의 글에도 그런 부분들이 있소. 앞의 글에서 짚은 대로 복음주의 신학이라고 하면 오해가 생기오. 개신교 신학이라고 하든지 그냥 신학이라고 하면 되오. ‘은혜를 결여한다면’도 어색한 번역이오. ‘은혜가 없다면’으로 하면 충분하고 자연스럽소. ‘의미내용’도 어색하오. 그게 독일어로 무엇인지는 내가 확인해보지 않았지만 직역이래서 읽기에 불편하오. Sinngehalt라는 단어일지 모르겠소. 우리말로 정확한 번역이 어려우면 그냥 ‘의미’라고만 해도 좋소. 그 외에도 어색한 대목은 많지만 이런 정도로 넘어가는 게 좋겠소.
바르트는 위 글에서 신학이 단순한 이론이나 사변에 머무는 게 아니라 실제로 신앙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지적하오. 옳은 지적이오. 신학은 신앙 경험에 대한 논리적 해명이오. 신앙경험이 없으면 신학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말이오. 신앙 경험으로 일어나는 우리의 영적인 능력을 영성이라고 한다면 신학은 바로 영성과 하나라는 말이 되오. 한국교회가 신학을 무시하면서 신앙을 자랑하는 것은 모순이오. 그런 신앙은 바르트의 말을 빌리면 ‘하나님의 자기계시’에 응답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자기 열정에 사로잡히는 것뿐이오. (2011년 1월17일,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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