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매일 묵상

고난주간을 보내며(1) / 정용섭목사

새벽지기1 2024. 9. 6. 05:57

어제는 고난주일이었소. 사순절 마지막(여섯 번째) 주일이면서 종려주일이기도 했소. 세계의 모든 그리스도교회는 금주 한 주간을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하는 주간으로 보내오. 목요일은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나눈 유월절 만찬과 제자들의 발을 씻긴 세족식이 있소. 그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도 있었소. 금요일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처형당하시고 운명하신 날이오. 그리고 당일 매장되었소. 예수님의 한 생애가 마친 날이오. 토요일은 무덤 속의 하루였소. 돌아오는 주일은 부활절이요.

 

     우리는 왜 예수님의 고난을 기억해야만 하오? 이건 어리석은 질문이오. 답을 모르는 사람은 없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이오. 그의 고난은 구원론적인 차원이라는 뜻이오. 이게 그리스도교 신앙의 역설이오. 고난의 구원, 고난으로부터의 구원, 고난을 통한 구원이라는 게 말이 된다고 보시오? 고난은 누구나 피하고 싶어 하오. 고난을 즐기는 사람은 없소. 그리스도교 신앙도 고난 자체를 미화하지는 않소. 매조키스트가 아닌 한 고난을 반길 수는 없는 거요. 예수님도 고난을 일부터 선택하신 것은 아니오.

 

     그런데 말이오. 다음을 잘 생각하시오. 고난은 피할 수 없소.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소. 그대는 지금껏 고난이라고 말할만한 일을 한 번도 당하지 않으셨소? 행운아였소. 그런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소. 자기 자신은 고난을 당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주변 다른 이들의 고난을 보셨을 거요. 일본의 쓰나미와 원전 사고로 인해서 고난당한 사람들이 있다는 건 인류 전체의 문제라 할 수 있소. 난치병에 걸린 사람들이나 자동차 사고를 만난 사람들도 우리 모두의 일이오. 고난과 질병은 아무리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소. 궁극적으로 우리 모두는 죽음을 맞아야만 하오. 고난의 끝자락이 죽음이오.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엄중한 실존이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억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의 고난에 직접 참여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오. 창조주이며, 주님이신 하나님이 고난을 당하셨다는 사실 앞에서 고난은 이제 전혀 새로운 빛을 내게 되었소. 그것은 더 이상 우리에게 저주의 운명으로만 남아있지 않게 되었소. 하나님이 고난을 당하셨다면 우리도 이제 용기를 갖고 고난과 대결할 수 있소. 힘을 내시오.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 이후로 그 어떤 인간적인 실패도 더 이상 실패로만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는 판넨베르크의 진술을 그대에게 전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