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찐저)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 찌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들은 집안에 있는 물건을 가질러 내려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질러 뒤로 돌이키지 말찌어다 그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할 것이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라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마24:15-22)
역사의 절정에는?
성경의 종말에 관한 기록을 해석하는 원칙 몇 가지를 설교 중에 말씀드렸다. 다시 간단히 정리하면 예언은 가까운 미래에서 종말에 일어날 일까지 함께 다 포함한다. 여러 시대가 겹치는 예언의 이런 특성상 징조별로 시기를 추정하여 현실상황에 끼워 맞추려는 시도는 금물이다. 그보다는 종말 직전에 반드시 일어날 몇 가지 특별한 징조에 주목해야 한다. 무엇보다 심판에 대한 하나님 원리와 목적을 살피는데 초점을 맞추되 최종 판단의 근거를 예수님 말씀에 두어야 한다. 감람산 강화를 세 번째로 살피는 본문이야말로 이런 해석 원칙에 충실해야 하는 대표적 예다.
본문 내용은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것에 서게 되면 큰 환난이 일어나니까 긴급히 피신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은 다니엘이 이미 말한 바라고 했다.(15절) 북방 왕이 유대를 침공하여 성소를 더럽히고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을” 세울 것이라는 다니엘의 예언(단11:31)을 주님이 인용한 것이다. BC450 년경의 이 예언은 BC 167년 시라아의 안티오쿠스가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돼지로 제사를 드리게 함으로써 성취되었다. 예언 후 약 370년 즉, 가까운 미래에 실현되었다. 다니엘은 그래서 “개국 이래로”, 이스라엘 나라가 세워진 후 최고의 환난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그 때에 “땅의 티끌 가운데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을”(단12:1,2) 것이라는 말씀으로 이어졌다. “땅의 티끌 가운데 잔다.”는 것은 죽어서 마지막 부활을 대기하는 중간상태를 나타내는 유대적 표현이다. 다니엘이 말한 개국 이래 환난은 안티오쿠스에 의해 일부 성취되었지만 예수님이 재림하여 성도들의 부활이 이뤄지기 직전에 있을 대환난도 포함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예언도 약 40년 후인 AD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이 성전을 파괴하고 예루살렘을 멸망시킴으로 일부 달성되었다. 그런데 21절에 “창세 이래” 최대의 환난이 닥칠 것이라고 한다. 창세란 종말과 대비되는 용어다. 예수님 또한 마지막 때의 대환난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다니엘이 “개국 이래”라고 한 것은 그 예언을 구약성경을 통해 접할 유대인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이다. 주님은 지금 당신의 예언을 들어야 할 대상을 전 열방으로 확대한 것이다. 예언의 내용은 둘 다 마지막 때 대환난이다.
예수님과 다니엘의 예언이 같을 수밖에 없다. 삼위 하나님이 태초부터 마련한 계획대로 인류 역사가 진행될 것임을 한 성령 안에서 대언했기 때문이다. 신구약 성경의 모든 선지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이 땅의 역사가 영원히 반복 순환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어떤 절정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고 선포했다. 또 그 절정의 직전에 큰 환난이 예고 없이 불시에 닥칠 것이라고 증언했는데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이 직접 재확인해준 것이 본문이다.
성경의 예언들이 이중 삼중의 의미를 포함하고 또 그대로 실현되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지니는가? 앞에 성취된 사건은 미래의 동일한 예언의 성취를 보장하는 예표라는 것이다. 안티옥쿠스에 의해 성전 문이 잠시 닫혔던 것은 예수님의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성전이 완전히 파괴될 것이라는 예언의 확실성을 입증한다. 마찬가지로 디도 장군에 의해 예수님 예언대로 성전이 파괴되고 예루살렘이 멸망당했던 사건은 창세 이래의 최고의 환난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보장이 된다. 신자들은 본문의 예수님의 경고 말씀을 정확히 해석하여 정말로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이다.
젖 먹는 아이마저 버려라.
대환난이 닥치면 먼저 산(山)으로 피신하라고 한다(16절). 산은 유대인들에게 전쟁과 재난의 피난처 도피성이라는 의미다. 실제로 AD 68년에 디도 장군 이전에 베스피시안 장군이 유대반란을 진압하려 진격했다는 소식이 이스라엘에 전해졌다. 당시 성중에 있던 크리스천들이 바로 이 말씀을 기억하고 뵈레아 펠라지역의 산으로 피신해서 화를 면했다고 한다. 반면에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고 성중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은 유대 반란이 진압된 후에 백만 명이 넘게 죽임을 당할 정도로 엄청난 환난을 겪었다.
지붕 위에 있다가 집으로 물건을 가질러 가지 말라고 한다.(17절) 유대는 뜨거운 사막 기후인지라 바람이 통하는 지붕 위에 차양을 치고 쉬길 좋아했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이 시발된 곳이나, 베드로가 부정한 음식을 먹어도 좋다는 환상을 본 곳도 지붕 위였다. 산으로 도망가려면 지붕에서 내려와야 하는데 유대 가옥마다 붙어 있는 옥외계단 즉 비상구를 이용하라고 한다. 집안에서 비상 식품이나 물을 챙겨갈 여유가 없다는 뜻이다.
밭에서 일할 때에 겉옷을 가질러 가지 말라고 한다.(18절) 일을 하면 땀이 나니까 겉옷은 집에 두거나 밭 가장자리에 두었다. 산으로 피난하려면 옷을 단단히 입어야 하는데도 옷을 챙기러 갈 짬이 없다는 것이다. 아이 밴 임산부는 느려서 고난을 피할 수 없다고 한다. 또 젖을 먹이는 엄마는 갓난애를 돌볼 시간조차 없다고 한다.(19절)
환난이 겨울이나 안식일에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했다.(20절) 산으로 피난하면 야영을 해야 하는데 겨울에는 너무 춥다. 겉옷도 못 챙긴 상태에서 더더욱 그럴 것이다. 또 안식일에는 5리, 약1.5km 이상 여행을 하지 못한다. 지금도 이스라엘에선 엘리베이터 가동도 중단할 만큼 안식일을 철저히 지키는데 예수님 당시도 그랬다. 만약 환난이 안식일에 일어났는데 1.5km 이내에 산이 없다면 큰일이다. 실제로 디도 장군의 예루살렘 함락 때에 안식일이 겹쳐서 전혀 피하지 않고 꼼짝 않고 있었기에 피해자가 엄청나게 늘어났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 모든 징조들의 뜻은 한마디로 도무지 피할 여유가 없을 만큼 대환난이 불시에 긴급히 닥친다는 것이다.
적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예수님이 비록 과장법을 사용했지만 젖먹이마저 버리고 도망가라고 했다. 창세 이래의 최고 극심한 환난이라고 했다. 살펴본 대로 성경의 예언들은 역사 속에서 정확히 실현되었다. 마지막 대환난이 불시에 닥친다니 오늘날의 신자로선 불안감이 가중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 가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항이 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은 두려움 때문에 당신을 믿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담의 선악과 때부터 예수님의 십자가를 거쳐 오늘날까지 믿음을 강요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대신에 스스로 기꺼이 당신을 찾는 자는 끝까지 보호 인도해주신다. 왜 그런지 아는가? 하나님이 바로 그런 자들을 찾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 쪽에서 찾으신 자를 방치할 리는 없다.
예수님도 바로 그런 뜻을 본문의 결론에서 다시 확실히 다짐했다. 택한 자, 즉 하나님 쪽에서 찾으신 자를 위해 환난의 기간을 단축할 것이라고 한다(22절).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날 육체가 없다고 한다. 아무리 창세 이래 처음 있는 큰 환난이라도 한 없이 계속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역사의 절정을 향해 가는 여러 과정 중의 하나로 잠시 거쳐 가는 예비 단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거기다 도무지 자식을 챙길 여유가 없는 것도 아니다. 마지막으로 최고 강력한 적그리스도가 출현하여 통상적 핍박과는 다른 차원의 고난이 있을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바로 종말 직전에 반드시 있는 특별한 징조 중의 하나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면 피하라고 했다. 피할 수는 있다는 뜻이다. 또 누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당신의 말씀과 성경에 충분한 힌트를 제시해주었다.
먼저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 즉, 성전에 설 것이라고 했다. 성전은 이미 없어졌다. 이전의 제우스나 로마 황제의 동상이 아니다. 이젠 그런 것들에 경배를 강요하면 당연히 적그리스도임을 알게 되고 또 거기에 절할 자도 없다. 적그리스도는 살아있는 인간이다. 교회 안에 불법과 부정을 저지르는 정도가 아니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께 극도의 미움을 살만큼 하나님의 완전한 대적자다. 거룩한 곳은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치와 신분을 뜻한다. 특별히 심판의 주체로 오실 예수님을 대행하는 모습을 띌 것이다. 심판을 받아 마땅한 가증한 존재가 거꾸로 인간을 심판하려 들 것이다. 지금까지 재림 예수라고 자칭한 거짓 선생이나 사기꾼들과는 그 격이 완전히 다른 자다.
바울은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멸망의 아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했다.(살후2:3)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배도(背道)가 선행되기에 적그리스도보다는 오히려 배도의 현상이 일어나는지 주의를 기울어야 한다.
적그리스도가 스스로 자기를 높이어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고 할 것이다.(살후2:4) 예수님도 “서로 잡아 주고”(마24:10) 즉, 교회 안에서 밀고하는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 또 택한 자마저 자칫 미혹될 것이라고 하셨다.(마24:24) 따라서 적그리스도는 기독교에 속한 자가 배교하는 것으로 해석함이 타당하다. 그런 자가 표적과 기사를 많이 드러내어 신자마저 하나님으로 불러도 손색없다고 인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자기를 추종하지 않으면 죽일 것이며 특별히 교회 안의 쭉정이더러 알곡을 일러바치도록 시킬 것이다.
그럼 적그리스도의 실체를 알 수 있는가 없는가? 또 대환난을 피할 여유가 있는가 없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대답은 둘 다 “yes”이다. 먼저 대규모의 배도 현상이 일어날 것이다. 또 엄청난 능력을 보이는 자가 하나님을 대적하라며 추종자를 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에 그 편에 안 붙으면 된다. 피할 여유가 있는지 질문했지만 사실은 어폐가 있는 질문이다. 정확히 말해 참 신자라면 피할 필요가 없다. 그 때까지 예수님 쪽에 붙어 있던 상태 그대로 있으면 된다. 유대인들은 어리석게도 자기들이 만든 안식일 규정에 붙어 있었다. 골고다 십자가 후에 복음 안에 들어온 신자는 안식일의 주인 되시는 인자, 예수님만 붙들면 된다.
사탄이 가장 자주 쓰는 술책
예수님이 재림하면 누차 강조하지만 구원과 심판을 순간적으로 나눈다. 다시 추종자를 모으지 않는다. 초림 때도 당신을 믿으라고 했지 종교적 조직체를 결성하지 않았다. 다시 진리를 가르칠 필요도 없다. 성경으로 진리의 계시를 완성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 되시는 당신께서 직접 강림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번개가 동에서 서에 번쩍하듯이 강림하실 것이다.(마24:24) 또 택한 자를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실 것이다.(31절) 하늘의 별들이 어두워지면서 천사들의 큰 호령 나팔소리와 함께 이 땅의 모든 인간들이 한 눈에 확인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오실 것이다. 말로 표현은커녕 추측도 할 수 없는 엄청나게 영광스런 방식으로 재림하실 것이다.
적그리스도가 아무리 큰 능력이 있어도 절대 택할 수도 없고 흉내도 못내는 모습이다. 적그리스도는 하늘에서 강림하지 않는다. 이미 땅에서 활동하고 있는 자다. 무엇보다 교회 안에서 서서히 나타난다. 사탄이 가장 자주 사용하고 강력한 수법을 통해 나타난다. 그 수법이 무엇인가? 바로 광명한 천사로 위장하는 것이다. 또 광명한 천사로 위장했으니 서서히 본색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다니엘서 12장의 예언에 따르면 적그리스도는 마지막 대환난기 7년 중에 전반기가 아닌 후반기 3.5년에 본색을 드러낸다고 한다. 처음에는 설득하고 회유하고 조종하다가 나중에는 강요하고 협박하다가 핍박할 것이다. 진리가 아니라 거짓을 강요하려니 처음 설득이 제대로 먹히지 않을 것이며 박해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
물론 적그리스도의 핍박은 너무 극심해서 도무지 견디기 힘들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는 생명까지 위협받는 극심한 고통 가운데서도 하나님이 보호해주신 믿음의 선진들이 많다. 그 중에 대표적인 인물 욥을 본 받으면 된다. 성경에서 욥만큼 큰 고난을 겪은 자도 없다. 자기 육신의 병은 물론 자식들 전부가 아무 잘못 없이 졸지에 죽임을 당했다.
욥으로선 무엇보다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의심과 불안을 지울 길이 없었다. 차라리 자기를 죽여 달라고 몸부림을 쳤다. 그 고통은 비록 하나님의 승낙 하에서였지만 사탄에게 직접 받은 고통이다. 모든 면에서 하나님을 떠날 만하거만 욥은 끝까지 하나님을 만나길 소원했다. 결국에는 하나님이 나타나 당신의 영광을 보여주자 완전히 무너졌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창조의 신비와 섭리와 주권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항복했다.
아직도 고통이 끝난 것이 아니다. 고통의 원인도 알지 못했다. 그가 확인한 오직 한 가지는 하나님이 자기를 결코 버리지 않았다는 사실뿐이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해서 직접 만나주셨다는 것만 확인하고는 평강을 회복했다. 욥이 그 극심한 고통을 자기 의지와 담력으로 이겨낸 것이 아니다. 친구들과 아내마저 하나님께 버림받아 더 이상 소망이 없으니 하나님을 비방하며 포기하라고 재촉했으나 그는 끝까지 하나님을 놓지 않았다.
택한 자라는 확신이 있는가?
바사의 다리오 왕은 자기 외의 다른 이에게 간구하면 사자 굴에 던지겠다는 조서를 내렸다. 다니엘은 그 사실을 알고도 평소 하던 대로 예루살렘 성전 쪽으로 기도드렸다. 세상 다른 모든 것, 자기 생명까지 포함해 다 버리는 한이 있어도 하나님만은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사자 굴에 던져졌으나 하나님이 사지의 입마저 봉해주셨다.
이처럼 신자가 흑암의 세력에 갇혀 사방으로 출구 하나 없이 다 막혀도, 심지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탄에게 미혹되어 조종 받고 있어도 하나님은 반드시 건져주신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다. 당신께서 찾으신 자, 당신께서 택하신 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대환난의 기간을 단축하는 까닭도 “택한 자를 구원”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여기서 ‘구원’이라는 단어는 위험과 파괴에서 안전하게 지켜 주는 것 즉, 육체적 생명을 구해주는 것이다. 또 죄에서 구원하여 영생을 준다는 의미도 있다. 신자가 순교를 하던 안 하던 택함 받은 자의 신분과 위치에서 단 1mm도 벗어나지 않으며 그렇게 할 수 있는 존재도 이 우주에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적그리스도에 대해 신자들이 갖는 큰 착각이 하나 있다. 언제 누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미리 알면 훈련하고 의지와 믿음을 늘려서 고난을 피할 수 있으리라 여긴다. 적그리스도의 출현과 예수님의 재림 사이 기간에 있을 대환난은 세상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다. 지구상에서 사라진다면 모를까, 그야말로 바로 죽음 외의 방도는 없다.
예수님도 환난의 기간을 단축시켜 준다고만 했지, 환난을 없애 주겠다든지 피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하지 않았다. 종말 직전의 대환난에는 그것을 이길만한 담력, 용기, 의지를 키울 여유와 시간도 없다. 오직 하나님이 택한 자를 죽음과 상관없이 구원해주실 뿐이다. 자신이 하나님께 택함 받았다는 온전한 확신이 있는 신자만이 대환난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이겨낼 수 있다. 평소부터 그분의 택함의 은혜에 걸맞게 반응하며 살고 있는 자다.
사람이 큰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뿐이다. 우선 이전에 비슷한 고통을 겪어 본 자는 동일한 고통이 다시 닥쳐도 이길 수 있다. 그러나 죽음과 순교는 체험해볼 성격이 아니다. 이미 모든 것이 끝이다. 결국 대환난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길은 둘째 방도뿐이다. 극심한 고통을 뛰어넘을 수 있을 만큼 진짜로 좋은 것을 소지하고 있고 그것을 절대 잃고 싶지 않는 자다. 엄마는 자식을 살리려고 얼마든지 대신 죽을 수 있다. 자식은 바로 자기 분신이자 자기보다 더 소중하고 귀하기 때문이다.
신자는 어떤 사람인가? 예수 안에 들어왔고 또 자기 안에 예수가 있음을 확신하는 자다. 평소에 그분의 사랑을 늘 체험하면서 교제 동행하고 있다. 십자가 복음 안에서 얻은 새 생명이 너무 소중하고 귀함을 알고 있다. 예수가 알파요 오메가다. 자신의 살고 죽음이 오직 예수님께 달려있음을 알기에 그분을 절대로 포기하지 못한다. 또 바로 그래서 적그리스도에게 결코 경배할 수 없다.
그런 신자에게는 느부갓네살 왕의 신상에 절하지 않아 풀무 불에 던져졌으나 머리카락 한 올 타지 않도록 천사를 보내어 지켜주신 그런 보호가 임한다. 설령 대환난 때에 죽임을 당한다 해도 최소한 스데반이 순교할 때에 고통 대신에 천국의 아름다움과 풍성함으로 둘러싼 것과 같은 보호하심이 임한다.
적그리스도의 목적은 오직 하나다.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부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 앞에 던져질 과제는 지금까지 인류 역사에 나타난 유사 적그리스도들이 그랬듯이 예수를 포기할 것인지 아닌지 뿐이다. 그때 정말로 죽으면 죽었지 예수 믿기 이전의 상태로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는 확신이 있다면 다니엘의 세 친구들처럼 담대하게 No라고 대답할 것이다. 설령 하나님이 생명을 건져주지 않으실지라도 Yes는 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이 나를 죽기까지 사랑하셨고 지금도 바로 그런 사랑으로 나를 붙들고 계심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적그리스도에 경배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배반뿐이 아니다. 신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 즉, 자기 자신에 대한 배반이다. 다니엘의 세 친구가 그렇게 담대할 수 있었던 것도 그들이 하나님을 끝까지 붙잡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하나님이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그들을 붙잡고 있다는 사실을 성령의 강력한 임재로 인해 절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른 말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담대한 믿음을 심어주었고 또 대답할 말도 성령이 그들 입술에 심어주었던 것이다.
대환난을 이겨낼 더 중요한 근거
그런데 마지막 대환난을 이길 수 있는 정작 더 중요한 근거는 하나 더 남았다. 예수님은 환난의 기간을 단축시켜 준다고 했다. 같은 의미라도 “택한 자를 구해주신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았다. 심판과 구원으로 나누는 것이 당신의 재림의 최종목적이 아니라는 뜻이다.
만약 구원만이 목적이라면 택한 것으로 사실상 그 목적은 달성된다. 죽은 후에 천국으로 인도하면 그만이다.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도록 허용할 필요가 없다. 심지어 당신께서 오셔서 십자가에 죽을 이유도 없다. 성령으로 이 땅에서 죽기 전 살아있는 동안에 구원의 확신을 심어줄 수고를 하지 않아도 된다.
주님은 택한 자를 구원하러 온 것이라기보다는 사방에서 모으러 다시 오신다. 모은다는 것은 새로운 다른 일을 준비하고 도모하기 위해서다. 적그리스도는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예리한 말씀 한마디로 얼마든지 한순간에 멸망시킬 수 있다. 재림하시면 실제로 그렇게 할 것이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궁극적 목적은 이 땅을 회복하는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꾸는 것이다.
다시 오신 주님은 더 이상 고통과 눈물과 시련과 상처가 없도록 다 제거하실 것이다. 무엇보다 죄악과 그 배후의 사탄의 세력을 완전히 멸할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질투, 시기, 분노, 저주가 사라지게 할 것이다. 오직 참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게 만들고 사람들 사이에 단 하나도 감출 것 없는 온전한 신뢰감으로 섬기게 만들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이 땅에 완전히 실현될 것이다. 완전한 진선미를 신자들이 보고 만질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온 천하에 드러나고 택한 자들이 보고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역사의 절정은 심판과 구원을 나누는 재림이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의 실현이다.
적그리스도가 잠시 이 땅을 독차지하여서 통치한 모습은 어떠했는가? 지난주에 살펴 본대로 민족과 민족이 나라가 나라를 대적했고, 진리는 실종되었고, 거짓 선생들이 설치며 서로 밀고하도록 부추겼고, 사랑이 없어져 서로 미워하고, 불법이 난무했다. 역설적으로 엄밀히 말하면 적그리스도는 사탄의 멸망의 아들이라기보다 인간 죄악의 산물이다. 인간의 타락이 절정에 이르자 적그리스도가 출현한 것이다. 적그리스도에게 경배함으로써 예수를 부인하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부인하니까 적그리스도에게 경배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 필연적 순서다.
인간들이 예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 이상 부르지 않게 되면 예수님으로서도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당신의 긍휼로 인내하며 심판을 유보할 이유가 없다. 사탄은 아담과 이브의 타락에서 보듯이 사람 사이를 이간질 하여 서로 미워하게 만들었다. 주님은 사람들로 서로 돕고 사랑하는 사이로 바꿔주기 위해 재림하시는 것이다. 택한 자들마저 하나님과 이웃을 부족한 모습으로 사랑하고 때로는 서로 미워하고 저주하는 모습이 안타까워서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있게 해주려고 다시 오는 것이다.
종말의 환난을 이겨낼 수 있는 비결은 예수님이 실현하실 새 하늘과 새 땅을 진정으로 소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에 실현되는 것으로 인생의 목표로 삼는 것이다. 재림의 영광을 소망한다고 해서 천사들이 나팔로 호령하고 신자들도 휴거하는 것 같은 초자연적 신비에 대한 호기심 내지 관심을 늘리라는 것이 아니다.
신자는 이 땅에서 온전한 사랑을 하지 못한 것을 가슴을 찢으며 애통해야 한다. 내 속에 남아 있는 더럽고 추한 죄의 본성, 하나님 대신에 내 중심으로 살려는 성향을 하루 속히 벗어나고 싶어야 한다. 오직 예수 중심으로 살려고 간절히 소원해야 한다. 그래서 주님 어서 오셔서 나를 깨끗하고 온전케 하여 진정한 사랑을 실현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있어야 한다. 주님은 택한 자들의 그런 기도를 응답해주러 이 땅에 다시 오시는 것이다.
평소에도 비록 부족한 모습이지만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면서 예수님의 거룩한 빛을 조금이라도 자신을 통해 비춰나가길 소원하며 자신의 전부를 성령에 의탁하여 한다. 예수님의 온전한 은혜와 권능이 나를 통해 실현되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아야 한다. 그래서 날이 갈수록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더 깊이 알아가며 그분의 은혜를 날로 더 많이 받아서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되는 자는 적그리스도의 박해를 이겨낼 수 있게 된다.
신자가 내게 마지막 대환난을 이겨낼 믿음이 있는지 어떻게 점검할 수 있는가? 나의 담력, 용기, 끈기 등이 얼마나 센지 측정해서 의지적으로 늘리는 것이 아니다. 나의 종교적 실력을 키우는 것도 아니다. 내가 예수님을 얼마나 깊이 알며 또 얼마나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지 여부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세상과 예수님 중에서 어느 쪽을 택하여 반응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 주님 쪽에 항상 붙어 있는 자는 날이 갈수록 그분의 세밀하고도 풍성한 은혜를 계속해서 체험하기에 마지막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도 절대 예수님을 포기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좋은 말씀 > -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미 방주를 짓고 있는 제2의 노아 (마24:32-39) (0) | 2017.04.05 |
---|---|
주님 재림 때에 해가 어두워진다는 것은? (마24:23-31) (0) | 2017.04.01 |
끝까지 견디어 구원 얻을 자신이 있는가? (마24:9-14) (0) | 2017.03.27 |
베리칩을 받으면 구원받지 못하는가? (마24:3-8) (0) | 2017.03.21 |
예루살렘 제4성전 건축에 숨겨진 비밀 (마24:1-2) (0) | 2017.03.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