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가기 전에 이 일이 다 이루리라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24:32-39)
치사하고 게으른 인간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이스라엘이 멸망할 것인데 그 때에 종말이 닥치고 당신께서 다시 오실 것이라고 예언했다. 제자들은 그래서 어느 때에 그 일이 일어날 것이며 또 그 때는 어떤 징조가 있을지 두 가지를 질문했다. 제자들은 그 시기가 먼저 궁금했고 징조는 그 후에 물었는데 반해 주님은 순서를 바꾸어 4-31절에서 종말의 징조를 가르쳤고 오늘 본문에서 종말의 시기에 대해 언급한다.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같지만 곰곰이 따져볼 의미가 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굉장히 게으른 존재다. 먹고 사는 것에 부족하지 않고 고난이 없다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시원한 바닷가에서 낮잠 자려는 것만을 인생의 소망과 목적으로 삼는 존재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인간의 게으름 때문에 종말의 시기를 먼저 말하지 않은 것이다. 선생님이 갑자기 급한 볼일이 생겨 외출하면서 학생더러 자율학습을 시키고선 정확한 시간은 가르쳐 주지 않고 금방 돌아올 것이라고만 말하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재림의 시기를 알면 코앞에 임박해서야 대비하지 미리부터 징조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다.
주님은 그날과 그때는 천사도 모르며 당신께서도 모른다고 했으니(36절) 실제로 가르쳐 줄 수도 없었다. 만약 처음부터 그때는 모른다고 말한 후에 징조를 설명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무래도 그 가르침의 권위와 신빙성은 떨어지게 마련이다. 제자들은 종말이 아예 없거나 있어도 아주 먼 미래라고 지레 짐작할 것이다. 언제든 종말이 올 수 있다고는 여기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은 정확한 시점은 말하지 않고 대신에 징조들이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다 이룰 것이라고 했다.(34절) 종말의 시급성을 강조한 것이다. 그럼에도 베드로 당시에 이미 “주의 약속이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벧후3:9)라고 지적했을 정도로 사람들은 나태해졌다.
징조들이 이 세대 안에 다 이뤄진다는 말씀은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서 일부 실현되었다. 또 누차 강조한대로 성경의 예언은 여러 시대를 포함한다. 주의 약속이 더디지 않은 까닭을 베드로는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기”(벧후3:8) 때문이라고 했다. 시간을 초월하신 하나님의 시간 개념은 인간과 다른데 주님도 그런 차원에서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외출하는 선생이 볼일이 중대해서 시간이 오래 걸리고 7교시 하교할 때쯤에야 마치리라 미리 알아도 금방 돌아올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야 학생들이 3교시, 4교시 매 클래스마다 긴장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들도 매 세대마다 종말을 대비할 것이다. 선생이 그렇게 말한 것이 학생을 속이려는 치사한 수법인가? 결코 아니다. 학생들이 먼저 치사하고 비겁하고 순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선생이 부재(不在)하면, 아니 눈에 안 보이기만 하면 금방 난리치고 놀기 바쁘다. 선생은 학생들의 유익과 성장을 위해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징조를 보면 시기를 안다.
예수님이 종말의 시기를 징조보다 뒤에 말씀하신 가장 중요한 이유는 징조를 알면 시기를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 당대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세대의 신자들은 자기 시대의 영적 조류에 대해 민감하게 깨어 있으라는 뜻이다. 이 세대에 다시 올 수 있다는 것은(34절) 어느 세대에나 올 수 있다는 뜻이다. 중요한 것은 시기가 아니라 징조다. 징조를 판단할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을 키우라는 것이다.
징조는 외적으로 드러난 현상으로써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인간의 탐욕스런 죄성이 이뤄낸 결과다. 따라서 어떤 면에선 종말의 시기는 인간이 재촉하거나 지연시킬 수 있다. 외출한 선생이 다른 선생을 통해 학생들이 조용히 공부를 잘 하고 있다는 연락을 받으면 여유를 갖고 천천히 볼 일을 마칠 것이다. 만약에 떠들고 놀기만 한다는 전갈을 받으면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도 황급히 돌아올 것이다. 선생으로선 학생을 가르치는 것이 첫째 임무이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오해는 마셔야 한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인간들의 되어져 가는 상태를 보고 종말의 시기를 정하는 것은 아니다. 삼위 하나님이 인류 역사를 어떻게 이끌지의 작정은 태초부터 미리 마련해 놓았다. 인간이 제 멋대로 방종하여 죄악이 관영하며 절정에 이르는 시기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으로 이끄는 섭리와 상충하지 않고 일치할 뿐이다.
예수님조차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한다는 것은 이 땅에 완전한 인간으로 오셔서 100% 인성(人性)에 의거하여 하신 말씀임을 감안해야 한다. 하나님으로서 권능과 신성이 부족하거나 포기한 것이 결코 아니다. 예수님은 성육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그 전에 천국 복음을 가르치고, 부활승천한 후에는 진리의 영인 성령을 보내어 계속해서 이 땅에서 구원 사역을 하게 하신 것으로 성자 하나님으로써의 역할을 완벽하게 달성하셨다.
종말의 특정한 시점을 말할 수는 없지만 그에 대한 힌트는 두 가지 주셨다. 첫째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면 종말의 시기를 알 수 있다고 했다.(32절) 비유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32-33절의 설명이 바로 비유다. 그 가지가 연해지고 잎이 달리면 곧 열매가 열릴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32절) 그래서 이 모든 징조들을, 4-31절에서 설명했던, 보거든 인자가 문 앞에 이른 것으로 알라고 한다.(33절) 인자가 문을 열고 들어올 일만 남았다는 것이다. 더 이상 다른 징조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는 더 결정적인 힌트로 노아의 때가 임함 같이 당신께서 다시 오신다고 한다. 노아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했다. 방주를 120년 동안이나 짓고 있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아무 신경도 쓰지 않았다. 불신자들이 징조에 대해 전혀 무감각할 때에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전쟁, 지진, 기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적그리스도의 마지막 대환난도 반드시 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전부 적그리스도 편에 붙었기에 그들에겐 환난이 아니다. 오히려 적그리스도가 더 풍요롭게 해줄 것이기에 사람들이 시대를 아주 낙관적으로 바라볼 것이다. 반면에 신자들에 대한 핍박은 심해지는데 그런 박해를 신자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아주 당연하고 정당한 일로 간주할 것이다.
노아가 말로 경고했고 또 실제로 배를 짓고 있는 모습은 불신자들에게 하나님 심판의 징조로 제시된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믿지 않았다. 종말에도 불신자들은 인간이 이룩해 놓은 풍요가 영원히 갈 것으로 착각할 것이며, 그 모든 공로를 적그리스도에게 돌리고 그에게 열광할 것이다.
반면에 예수를 믿는 참 신자들로선 징조들을 보고 재림이 임박했음을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종말 직전에는 양 극단의 정반대인 두 부류의 사람으로 확연히 나눠질 것이다. 누가 봐도 두 종류의 사람뿐임을 알 수 있을 때에 주님은 다시 오실 것이다. 어폐가 있긴 하지만 다시 오신 주님이 구태여 양과 염소 떼로 나눌 필요도 없을 정도로 이미 완전하게 나눠져 있을 것이다.
믿음을 점검해 볼 첫째 질문
그렇다면 이제 우리 믿음을 점검해볼 질문이 하나 있다. 만약 우리가 노아 때에 살았다면 그의 경고를 듣거나 그가 방주를 짓고 있는 모습을 보고 각성하여 회개했을까? 그 방주에 올라탔을까? 만약 이 질문에 예스라고 대답했다면 죄송하지만 복음의 의미를 온전히 모른다는 뜻이다. 심하게 말해 구원을 받았는지조차 의심해봐야 한다.
우리가 처음 예수를 믿었을 때를 회상해보라. 과연 우리가 복음을 전해 듣고 그 진리를 깨달을 수 있었던가? 예수가 어떤 분인지 알 수 있었던가? 아니 예수를 믿고 싶은 마음이라도 있었던가? 모두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죄악 중에서 하나님과 원수 되어있었지 않는가? “예수가 법 먹여 주냐? 차라리 내 주먹을 믿겠다.”고 큰소리 치고 있었지 않는가?
그러다 사방팔방이 다 막히고 더 이상 떨어질 곳이 없을 정도로 추락했을 때에야 겨우 십자가 쪽으로 눈길을 조금 돌리게 된 것 아닌가? 꼭 현실적으로 실패하여 돈과 건강을 잃은 후가 아니다. 아무 문제없는데도 정신적 영적으로 완전히 고갈되어서 내가 내 자신을 바라봐도 철두철미 절망밖에 남지 않아 자기를 부인하고 싶고 너무 싫어졌을 때다.
그 때에 예수가 십자가에서 모든 인간의 짐과 죄과를 다 감당하고 죽으셨다는 복음의 진술이 비로소 뭔가 말이 되는 것 같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러는 중에 하나님 쪽에서 먼저 나를 아시고 현재 내 있는 모습 그대로 품어서 지난 모든 허물을 용서해주셨고 또 사랑하고 계신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 동안의 참담하게 부셔졌던 영적 현실적 실패들이 사실은 하나님이 당신의 고귀한 참 생명을 부어주시려는 그분의 보호와 인도요 섭리요 은혜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두 손과 두 발을 다 들고 주여 저는 정말 아무 의지 없으니 이 죄인을 이대로 받아달라는 절규가 저절로 나오게 되었지 않는가?
노아의 시대에 사람들이 왜 그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는가? 노아가 방주에 들어갈 때까지 먹고 마시고 놀았다고 한다.(38절) 그 일차적 의미는 단순히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있을 때에 불시에 심판이 임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장가가고 시집갔다고 한다. 이런 일들이 나쁜 죄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결국 먹고 마실 것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는 뜻이다. 현실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었기에 하나님을 멀리하게 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이 가장 큰 문제이고 또 그로 인해서 모든 도덕적 죄도 파생된다는 진리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순전히 경외하지 않는다면 노아 때에나, 예수님 당대에나, 적그리스도 때나, 막상 종말이 닥치나 구원 밖에 있게 된다. 아무리 현실적으로 풍요하여서 고갱처럼 타이티 섬에서 매일을 즐겁게 유토피아 같은 삶을 살고 있어도 가장 비참한 실패다. 살아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죽은 것이다.
노아의 때와 연관된 두 번째 질문
노아의 시대에 그 방주에 타지 못했을 거라면 스스로에게 물어볼 두 번째 질문이 있다. 현 세대의 징조들을 노아의 때와 연결해서 해석할 수 있겠는가? 쉽게 말해 현 시대가 노아가 하나님께 경고를 받기 전에 해당되겠는가? 노아가 경고를 받고 배를 지을 준비를 하고 있는 단계인가? 배를 짓기 시작했다면 초반, 중반, 후반 어디에 해당되겠는가?
아직 대규모의 배도가 일어나지 않았고, 지난주에 살펴본 요한계시록의 쓴 물에 대한 예언이 세 번째 천사의 경고에 불과하고, 예수님도 여러 징조들은 재난의 시작일 뿐이라고 했으니 아직 노아의 때가 이르지 않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방주가 한창 지어져 거의 완성될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계시록의 쓴 물 예언이 세 번째 천사의 경고였지만, 놀랍게도 바로 이어서 넷째 천사는 하늘에서 별이 떨어진다고 했고, 다섯째는 적그리스도의 대환난이 시작되고, 여섯째는 적그리스도의 통치가 완전히 이뤄지고, 일곱째는 천사가 강림해 말씀을 선포하는 내용이다. 말하자면 지금 쓴 물 예언이 실현되고 있다면 마지막 적그리스도가 출현하기 직전이라는 뜻이다.
거기다 예수님의 예언대로 작금 대규모적인 배도가 진행되고 있다. 배도(背道)란 정도(正道)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같은 방향으로 가면서 좌로나 우로 조금 치우치는 것이 아니다. 정반대로 거꾸로 가는 것이다. 교회사적으로 따져서 기독교의 정도가 확립된 것은 종교개혁 이후다. 예수님의 구원진리는 골고다의 십자가로 완전히 계시되었으나 인간들이 그 진리를 이해하는데 그만큼 시간이 걸렸다는 뜻이다.
콘스탄틴 황제가 AD 313년에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포한 것은 핍박을 중지하고 복음 전파에 자유를 허용한 것에 불과하다. 여전히 십자가 진리를 잘 알지 못했는데 중세 가톨릭의 암흑시대에까지 이어졌다. 초대교회의 존경받는 교부들의 글들을 지금 상황에서 보면 이단적 내용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계몽주의로 인간의 이성이 깨이고 지혜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자 성경의 진리도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엄밀히 말해 종교개혁 이전에는 미숙한 이단이라면, 개혁 이후라야 배도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개혁 이후에도 크고 작은 배도들이 있어왔지만 21세기에 이르러 대규적인 배도가 자행되고 있다. 그 대표적 예는 동성애 문제다.
동성애자는 예수님의 사랑으로 품어주고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해주어야 한다. 반면에 동성애 행위는 하나님께 분명한 죄가 됨을 성경을 통해 깨닫게 해야 하고 그 죄를 이길 힘은 예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뿐임을 가르쳐야 한다. 인류 역사 이래로 동성애 행위는 항상 있어왔다. 지금이라고 특별히 더 많아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죄가 아니라고 한 것은, 그것도 교회 안에서조차, 최근 10-20년 사이의 일이다. 나아가 동성애자를, 성경적으로 따지면 고의로 지속적으로 죄를 범하는 현행범을 목회자로 세우기까지 한다.
배도란 도덕적 종교적 타락을 뜻하지 않는다. 절대적 진리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진리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그 위에 배도하는 것이 오히려 정도라고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인정하게 되는 상황인데 바로 종말 직전의 배도다. 동성애 문제에서 지금 바로 그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예수님이 언제 다시 오시는가?
그런데 동성애는 사실 지엽적인 문제다. 배도가 겉으로 드러난 결과적 현상 즉, 여러 징조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런 종말의 징조는 물론 배도 자체가 일어나는 원인부터 따져야 한다. 아주 간단하다. 성경의 진리를 부인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온전한 중심에 두는 사고가 실종되었다.
필연적으로 예수님 십자가 구원의 유일성, 절대성, 영원성이 부인되고 있다. 예수 십자가를 몰라도 착하게만 살면 구원 받을 수 있다고 기독교 목사들마저 공언하고 있다. 인간은 스스로는 결코 선해질 수 없기에 예수님이 모든 죄 값을 십자가에서 감당하고 죽었다는 성경의 절대 진리의 빛이 완전히 바래지고 있다.
하나님이 부인되면 인간 중심의 사고로 바뀔 수밖에 없다. 인간적 판단으로는 동성애가 당사자들이 좋아서 하는 것이며 남들에게 전혀 피해를 주지 않으니 죄가 될 리가 없다. 또 다른 모든 인간 사회의 잘못과 하자도 단지 인간의 결격 사유 때문으로 치부한다. 인간은 물론 어떤 일이건 장단점이 있기에 모든 사안을 상대적으로 간주하고 절대적 죄란 없어졌다. 그러니 예수님의 십자가 절대적 대속 죽음은 어리석기 짝이 없고 그들로선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기독교 고유의 고리타분한 종교적 수사(修辭)로 전락했다.
기독교의 이단은 항상 있어왔다. 지금은 이단이 아니라 배도가 일어난 것이다. 정통복음주의 전통의 교회 안에서 대규모적인 배도가 시작되었다. 아니 작금 엄청난 속도로 진행 중이다. 예수 십자가의 절대성을 외치는 자들은 이미 극소수가 되었다. 예수님이 언제 다시 오시겠는가? 사람들이 당신을 모르고 철저히 부인될 때에 다시 오실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 아니겠는가?
지금이 바로 그러한 때 즉, 노아의 때다. 말하자면 실제로 노아가 나타나 노아의 방주를 짓고 있다는 뜻이다. 그것도 방주가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아무도 모르는 록키 산맥 깊은 숲속에서 극단적 종말주의자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종말에 대비한 방주를 짓고 있다는 뜻이 아니다.
35절의 말씀을 다시 보라. 천지는 없어져도 주님의 말씀은 없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럼 예수님의 종말에 대한 말씀이 기록된 성경과 그것이 말하는 진리가 바로 방주이지 않는가? 성경이 이 세대는 물론 모든 세대에게 하나님의 절대적 마지막 심판을 경고하고 있지 않는가? 이 방주는 건축 중인 것도 아니다. 신구약성경 66권은 완성되었고 AD 4 세기경에 정경으로 확정되었다. 방주는 완성되어 모든 인간의 눈앞에 명백히 보여지고 있다.
그럼 노아는 누구인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성령님이다. 성경의 진리를 깨닫게 해준다. 지금도 소수의 하나님의 택한 자들은 성령의 조명으로 그분의 경고를 들을 수 있다. 노아의 방주인 성경은 불신자들이 읽지도 않고 읽어도 이해하지도 못한다. 반면에 성경의 진리 됨을 아는 신자들은 그 경고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매일을 세상의 끝 날처럼 살아야 한다.
천지는 없어지고 예수님의 말씀만 남는다고 해서 인간을 포함한 지구상의 모든 것을 멸절시키어 완전한 폐허로 바꾸고 성경만 달랑 남게 한다는 뜻이 아니다. 모든 천지의 생성과 변화가 성경 말씀 그대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될 것이라는 뜻이다. 특별히 종말 직전에 예수님 말씀대로 온갖 징조들이 보일 것인데 영적으로 깨인 자들은 무화과나무의 비유에 빚대어 그 시대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종말이 반드시 임할 것이며 예수님께서 큰 영광중에 심판주로 재림한다는 것이다.
당대의 의인 노아
노아가 방주를 어떻게 해서 짓게 되었겠는가? 다른 사람들처럼 흥청망청 먹고 마시고 있는 중에 하나님이 갑자기 그를 택하여 술 깨는 각성제를 먹이고 계시를 주신 것이 아니다. 알다시피 노아는 홍수 심판이 끝나고 구원을 얻었기에 안심하고선 술 마시고 취했다. 그래서 셋째 아들 함으로 죄를 짓게 하는 실수를 범했다.
노아 당시에는 성경도 종교도 교회도 없었고 하나님의 계시도 드물었다. 창세기 6장은 경건한 셋 계열의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의 아들들이 사람들의 딸들과 결혼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상숭배하는 이교도들과 교통했다는 것이다. 노아 때에 이미 대규모적인 배도가 있었다. 노아 혼자만 하나님을 아는 자였다. 그와 나머지 모든 사람들 둘로 극명하게 나뉘었다.
그는 그 세대의 영적인 흐름을 읽을 수 있었다. 신령한 영안(靈眼)이 있어서 미래를 예지할 수 있었다는 뜻이 아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은 부인되고 인간들이 자기중심으로 설치자 온갖 탐욕과 죄악으로 타락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 비참한 영적 상황을 볼 줄 알았고 잘못된 것은 잘못이라고, 죄는 분명히 죄라고 사람들에게 선포했던 것이다.
정죄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런 사람들이 너무 안타깝고 불쌍해진 것이다. 그 상황이 인간들 스스로 각성하고 회개하여 고칠 수 있는 단계가 도무지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하나님께 그냥 이대로 가만 두고 보실 것인지 물었다. 제발 이 땅을 구원해 달라고 애끓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극적인 개입을 소망하고 간구했다. 성경은 그를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창6:9)라고 표현했다.
노아와 그 가족만 구원해주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의 기도에 귀를 막은 것이 아니다. 그가 120 년간이나 방주를 짓고 있으면서 방주로 들어가는 문은 항상 활짝 열어 놓았다. 사람들이 끝까지 아무도 타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은 노아와 그 후손을 통해 경건한 남은 자들을 보존하려 했던 것이다. 또 후대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인하면 노아와 동일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음을 깨닫게 하려는 전철로 삼았다.
노아는 단순히 하나님만 믿은 것이 아니다. 또 그 믿음으로 자신의 풍요와 형통을 간구하지도 않았다. 죄를 철저하게 저주하는 하나님의 심정으로 세상에 심판을 경고했다. 또 한 명이라도 더 구원 받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그러니 120년을 미친 사람이라는 조롱과 온갖 핍박을 받아가며 하나님의 뜻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고 묵묵히 방주를 건축했다.
이 세대에 종말이 임한다는 뜻은?
노아의 심판 이후에도 인간들의 죄악은 여전하다. 또 종말의 징조도 계속해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더 이상 신기하고 기괴하며 더 크고 확실한 징조를 기다릴 필요는 없다. 베드로의 말씀처럼 하나님의 심판이 더딘 것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벧후3:9) 소원해서 오래 참고 계실 뿐이다. 인간들이 어리석어 하나님의 그 뜻을 모를 뿐이다.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뜻은 재앙이 아니라 구원임을 천하 만민이 보고 알 수 있게 하셨다. 교만한 의인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 겸손한 죄인을 구원하려 오셨다는 뜻을 완전히 드러내셨다. 그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해 인간 이성이 깨이는 종교개혁 때까지 하나님은 일차로 기다려주셨다.
그런데 그 깨인 이성으로 불신자들은 그분의 뜻과는 정반대로 여전히 오직 인간 중심의 유토피아만 건설하려 들고 있다. 그들은 역사에서 교훈을 배워야 한다고 입술로는 주장하면서도 인간만의 제국이 모두 실패했던 역사의 실례에는 눈을 감고서 계속해서 동일한 잘못을 반복하고 있다. 끝까지 완악하게 하나님과 그 독생자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인하고 있다. 그들이 문제가 아니다. 그들은 마지막까지 적그리스도 편에 붙을 것이다.
문제는 크리스천들이다. 이성이 깨였으면 십자가의 진리를 더 깊이 깨닫고 영적 통찰력은 비례해서 늘어나야만 한다. 그러나 종교개혁 때 잠시를 빼고는 오히려 그 반대로 치닫고 있다. 영적 분별력은 무디어지고 퇴보하고 있다. 아예 미혹을 당해 알게 모르게 배도를 자행하고 있다.
솔직히 신자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종말의 심판이 없었으면 싶지 않는가? 있더라도 종말 직전에 노아 같은 자가 나타나 경고를 해주고, 또 이왕이면 120년 간 방주를 짓고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지 않는가? 또 노아와 방주가 없이 내 세대에 종말이 닥친다 해도 30년-50년 뒤에 일어나 내가 죽고 난 후나, 죽기 직전에 있으면 아무 미련도 걱정도 없을 것 같지 않는가? 지금 당장 적그리스도의 핍박과 환난이 닥쳐도 하나님이 나만은 보호해주시던지, 피할 수 있게 해주셨으면 싶지 않는가?
한마디로 이 땅의 타락상에 대한 노아 같은 애끓는 마음이 없다. 주변에 미혹된 영혼들의 구원을 위한 안타까운 심정이 없다. 이상한 자연 현상이나 큰 재앙이 일어나면 종말이 곧 닥치지나 않을까 그저 불안해서 어쩔 줄 모른다.
성령이 노아이고 성경은 노아의 방주라고 했다. 그러나 사실은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제2, 제3의 노아이고 신자의 거룩하고 의로운 삶이 방주다. 신자는 이미 예수님의 방주를 타고 있다.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온 자에게는 절대로 심판이 없다. 종말에 대해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그 방주 안으로 들어오도록 사람들을 초대해야 한다.
대신에 노아가 120년을 하루도 쉬지 않고 방주를 지었듯이 세상 앞에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 이 세대가 가기 전에 모든 징조가 이뤄지고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은 바로 모든 신자는 자기가 살고 있는 자기 세대에서 노아로 서야 하며 심판을 경고하는 소명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자의 존재, 삶, 인생에서 세상 사람들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케 해야 한다. 내 가정과 직장과 교회에 오직 예수님만을 주인으로 모시고 살면서 불신자들로 자신의 삶에 동참토록 해야 한다. 불신자들이 볼 때에 자기들과 전혀 다른 거룩한 방식으로 살고 있기에 그들도 닮고 싶게 하거나, 최소한 분명히 뭔가 독특하고 다르게 살고 있다는 깨우침과 찔림은 주어야 한다. 신자는 종말의 시기나 징조에 관심 가질 것 없이 오직 자기 세대의 노아가 되라는 것이 바로 본문이 말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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