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고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찌니라 그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어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저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마24:23-31)
성경의 종말 기사의 초점은?
금주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다시 충돌했다. 팔레스타인 측에서 이스라엘 핵시설에 로켓포를 발사했는데 다행히 실패로 돌아갔다. 만약 핵이 누출되거나 핵폭탄이 터졌다면 엄청난 재앙이 되었을 것이다. 핵을 사용하면 서로 공멸(共滅)한다는 것을 알기에 핵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것은 너무나 순진한 생각이다. 히틀러 같은 광인(狂人)은 언제든 출현할 수 있다. 또 절대 약자는 절대 강자에게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덤비는 것이 인간이다.
작금 우리가 사는 캘리포니아는 500년 만의 가뭄이 닥쳐 농축산물 가격이 앙등하고 있다. 오백 년에 한번 뿐인 가뭄이면 문제가 없지만 그런 가뭄이 수년째 계속되니 큰일이다. 지구온난화는 과학자들의 예상보다 훨씬 더 빨리 심각하게 진행되는 것 같다. 횃불같이 타는 큰 별이 하늘에서 강과 샘물에 떨어지자 물의 1/3이 쑥같이 변하고 많은 사람이 죽더라는 요한계시록 8:10의 예언이 실제로 성취되고 있는 중이다.
핵과 환경오염이 인류의 종말을 부를 것이라는 사실은 사람들이 인정하기 싫은 불편한 진실이다. 그러나 신자는 크게 염려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그 와중에도 신자만은 지켜주신다는 뜻이 아니다. 핵과 환경오염의 폐해에 신자라고 예외가 될 수 없고 모두가 똑같은 피해를 입는다. 신자는 더더욱 환경오염을 줄이고 핵을 추방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신자가 그런 염려를 하지 말라는 이유가 계시록의 그 예언이 세 번째 천사의 나팔 재앙이기에 앞으로 네 번의 재앙이 더 남았다는 뜻이 아니다. 또 예수님이 처처에 전쟁과 기근이 있어도 재난의 시작(마24:7,8)이라고 말씀하신 까닭만도 아니다.
자연적 물리적으로 겉으로 드러난 징조는 그것에 앞서 반드시 어떤 요인과 여건들이 있고 그것들이 이뤄낸 결과이다. 징조가 미래를 예측하여 대비하는 기능을 충분히 발휘되려면 그 원인을 알아야만 한다. 쉽게 말해 핵전쟁이라는 징조가 나타나면 이미 끝난 것이며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종말이든 종말을 예표하는 징조이든 그 원인을 알아야만 대처할 수 있다. 그 원인은 간단하다. 오직 하나다. 인간의 탐욕스런 죄성이다.
신자는 따라서 각 개인의 죄성들이 종합해서 일관된 방향으로 흘러가는 자기 세대의 영적 조류에 대해 민감해야 하며 정확히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예수님도 24장에서 종말에 대한 여러 징조들을 말씀하시면서 신자들더러 종말 직전의 영적 흐름에 주목하라고 가르쳤다. 전쟁과 기근들이 재난의 시작일 뿐이라는 말씀은 일차적으로는 그런 것들과 비교도 할 수 없는 고통이 마지막 적그리스도의 대환난 때에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거기다 그런 환난들은 항상 있어 왔기에 신자들은 정작 다른 측면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는 뜻이다. 지난 2 주간 살펴본 대로 예수님은 먼저 복음이 온 민족에게 전파되기 전에는 오지 않는다고 선언하셨다. 또 종말 직전에는 하나님에 대한 대규모의 배도가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하신 까닭이다.
적그리스도가 표적과 기사를 보이려면?
같은 맥락에서 오늘의 본문도 그 영적 의미를 잘 파악해야 한다. 먼저 그리스도가 여기 저기 나타났다고 해도 믿지 말라고 한다.(23절) 자칭 재림 예수라는 사람들이 이 곳 저 곳에서 출몰했다는 소문이 들리는 정도가 아니다. “여기 있다, 저기 있다.”라고 단정적인 표현을 사용했다. 모든 사람들이 그리스도라고 인정한다는 뜻이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24절)이라고 복수 표현을 한 것은 예언의 특성상 원근통시법을 사용했기에 모든 시대의 적그리스도를 망라한다. 당연히 마지막 때의 적그리스도도 포함된다. 그 최고 강력한 적그리스도의 출현이 가능한 이유도 인간의 탐욕스런 죄성을 교묘히 이용했기 때문이다. 만약에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고 하고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이라고 인정하는 어떤 한 존재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종말이 임박한 것이 아니다.
광야와 골방에 나타난다고 해서 마지막 적그리스도가 여러 명이 나타난다거나, 한 명이 신출귀몰하게 동시에 여러 곳에 나타난다는 뜻이 아니다. 각각의 장소가 상징하는 의미를 알아야 한다. 광야는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메시아가 도래하는 장소라고 인식한 곳이다. 따라서 적그리스도가 메시아의 흉내를 낼 것이라는 뜻이다. 즉 사람들로 모든 고통에서 구원해주겠다는 너무나 선한 명분을 크게 내세울 것이다. 꼭 광야에 나타난다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을 미혹케 하려면 광야보다 오히려 도시에 나타나야 한다. 골방도 좁고 밀폐된 장소인지라 표적과 기사를 실현하기에 부적합하다. 적그리스도는 반드시 공개적인 장소에서 대중을 집합적으로 조종할 것이다.
적그리스도가 아무리 큰 표적과 기사를 베풀어도 신자가 그리스도로 인정할 수 없는 이유와 근거는 무엇인가? 예수님이 재림하는 모습을 설명한 27-31절과 대조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번개, 해, 달, 별들, 하늘, 구름, 천사” 등의 단어들로 재림을 묘사하고 있다. 예수님의 재림은 초림과는 달리 이 땅에서 오시지 않는다. 하늘에서 강림하신다. 엄청난 위용과 영광중에 모든 사람이 동시에 알 수 있는 방식으로 오신다.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부인할 수 없다. 절대로 사람을 미혹하지 않는데도 모든 사람이 그냥 그 자리에서 두 손 들고 항복할 수밖에 없다.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찌니라”(28절)는 말씀은 유대 속담이다. 예수님이 왜 이 속담을 인용하셨는지에 대해 신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일치되지 않을 정도로 다양한 해석들이 있다. 속담이 갖는 원래의 의미를 충실히 적용하면 될 것이다. 전쟁이 끝나면 들판에 시체들이 즐비하여 독수리 떼가 날라드는 것 같은 재앙을 말한다. 마지막 적그리스도의 대환난 이후에 주님이 재림한다는 것이다. 또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30절)라고 했다. 재림 하시는 주님을 보면 불신자들도 당장에 인간을 심판하러 오셨다고 알 수 있다. 그러나 회개할 시간과 여유는 더 이상 없고 주님은 단번에 양과 염소 떼로 정확히 나눈다. 그래서 땅을 치고 후회한들 이미 늦었다는 의미도 된다.
재림의 구체적인 광경은?
주님이 어떤 모습으로 강림하실지 구체적인 해석을 시도하는 것은 금물이다. 상상을 초월하는 모습이다. 예컨대 천사들의 큰 호령과 함께 강림할 때에 나는 나팔 소리를 전 지구인이 동시에 들을 수 있다면 과연 얼마나 클지 따질 수 없다.
과학적으로 그 정도 소리라면 모든 사람의 고막이 일시에 터져버린다. 인간의 귀가 모든 소리를 다 들을 수는 없다. 개미가 기어가는 소리는 듣지 못한다. 제트기가 쾅하고 음속을 돌파하는 소리는 들려도 그 이상으로 날아가면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모든 소리가 다 들리면 인간의 신경은 극도로 예민하고 불안해져 한 시도 제대로 살 수 없다.
하나님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역할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도록 완벽하게 창조하셨다. 인간의 생활 여건을 충분히 감안했다. 마지막 대환난에 신자가 도무지 견딜 수 없는 정도가 되면 방임하지 않으시고 그 기간을 단축해주는 것과 같은 사랑의 배려다. 반면에 인간은 그분의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인간은 절대로 전지전능해질 수 없다. 모든 면에 한계가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한계가 있다는 자체가 인간에겐 오히려 큰 은혜다.
물론 주님은 얼마든지 지구상의 모든 인간이 아무 탈 없이 그 나팔 소리를 듣게 할 수 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주님의 거룩한 통치에 참여할 신자는 인간의 한계를 제거하여 신령한 육체로 변모시켜 주실 것이다.
빌리 그래함 목사의 아들 프랭클린 목사가 예수님이 지금 당장 강림하셔도 SNS로 전 세계에 실시간으로 곧바로 중계되기에 모든 사람이 한 눈에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과학이 더 발달할 것이기에 장차 예수님이 강림하실 때에는 구태여 초자연적 능력을 발휘하지 않으셔도 될 것이다. 신자는 이런 지적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지금 이후로는 주님이 언제든 강림하셔도 본문을 문자적으로 성취하는 셈이 된다. 이제부턴 주님이 금방이라도 오실 수 있다는 뜻이다.
구름도 그렇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수여 받을 때나, 솔로몬 성전을 봉헌할 때에 지성소에 구름이 가득했다. 구름은 하나님이 임재하거나 현현하는 것을 상징하는 성경의 그림 언어다. 구태여 주님이 동화처럼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이라고 상상할 필요는 없다.
지금 예수님이 마지막 적그리스도와 당신을 대조해서 구별하는 기준이 무엇인가? 적그리스도가 아무리 큰 능력으로 온갖 신기하고 화려한 표적과 기사를 실현해도 땅 위의 인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설령 사탄이 직접 인간의 모습으로 변장해 나타나도 여전히 하나님의 통제를 받는 피조물일 뿐이다. 하나님처럼 보이려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하나님이 아니다.
사탄의 간교한 술수
그런데 어지간한 신자라면 예수님이 하나님이고 적그리스도는 인간일 뿐이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예수님이 본문에서 정작 대조하고 싶은 내용은 따로 있다. 다시 23절을 보라. 그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그리스도가 나타났다고 말할 것이라고 한다. 주님은 “사람과 너희” 즉, 불신자와 신자인 제자들을 대조하고 있다.
예수님이 종말에 관한 감람산 강화를 어떤 계기로 시작했는가? 제자들이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까”(마24:3)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시발되었다. 주님의 대답 첫마디가 무엇이었는가? 첫마디란 가장 중요하여 꼭 기억해야 할 내용이다.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4절) 종말에서 외적 물리적 징조보다 사람을 주의하라고 했다. 여기서도 사람과 너희를 대조했다.
모든 사람이 다 적그리스도라고 인정하고 넘어가도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너희는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처럼 보이는 까닭은 예수를 모르는 사람들의 영적 어리석음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람을 속이는 것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참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을 미혹하는 법은 절대로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만 제대로 알고 있다면 사람에게 넘어가는 법은 결코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적그리스도의 표적과 기사에 넘어가는 이유는 둘 뿐이다. 첫째 각 사람의 형통과 안일과 쾌락을 증진시켜 주기 때문이다. 둘째는 가공할 기괴한 능력으로 공포심을 조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탄은 절대 어리석지 않다. 뱀처럼 간교하다. 정말로 하나님처럼 행세하려고 하나님의 방식을 동원한다. 사람들로 자기를 진정으로 존중하여 경배토록 만든다. 마지못해 복종하게 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 땅에서 풍요와 사치를 보장 받기에 감지덕지해서 진심으로 숭배한다. 그러니까 사람이 그리스도가 왔다고 단정적으로 자랑하는 것이다.
마가복음 1장은 예수님이 갈릴리 가버나움 지역에서 처음으로 공사역을 시작하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회당에서 권세 있게 가르치고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셨다. 회당에서 나와서 열병에 걸린 베드로의 장모를 단지 손만 잡아 일으키자 바로 수종들 정도로 완벽하게 치료해주었다. 그러자 온 동네에서 각색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이 몰려와 밤이 늦도록 치유 사역을 계속하셨다.
주님은 다음 날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에 물러가 기도를 하셨다. 그 자리에까지 제자들이 찾아와 사람들이 몰려와 주를 찾는다고 알렸다. 초자연적으로 치유하는 표적과 기사를 더 많이 베풀어달라는 요청이었다. 주님은 그 요청을 냉정하게 거절했다. 아직도 환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이 많이 남아 있는데도 말이다.
그 거절하신 이유가 무엇이었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막1:38) 치유가 당신의 사역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복음을 전하러 왔다고 한다. 치유는 복음이 복음답게 온전히 전해지게 하는 통로요 수단일 뿐이라는 것이다. 주님은 공사역을 시작할 때부터 신자더러 표적과 기사에만 관심을 두지 말라고 선포한 셈이다.
회유에 넘어가지 않는 신자들
본문 24절의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이 신자들도 쉽게 넘어갈 것이라는 뜻이 아니다. 단지 적그리스도에게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고 또 신자도 인간으로서 연약한 존재라는 뜻일 뿐이다. 주님의 무게 중심은 오히려 신자들은 표적과 기사에 미혹되지 않는다는 쪽에 실려 있다.
신자가 미혹되지 않는 이유가 주님이 대환난의 기간을 단축해주기 때문만이 아니다. 신자들이 굳건한 믿음으로 표적과 기사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으려 노력하기 때문도 아니다. 신자는 주님이 이 땅에 질병치료 같은 현실적 형통을 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에서 구원하러 오셨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표적과 기사도 복음이 온전히 전해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일 뿐임을 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믿게 하고 또 그 이름에 힘입어 새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20:31)
따라서 적그리스도의 표적과 기사들이 개인의 유익만 늘려주는 대신에 예수님의 이름은 높여지지 않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기여하는 모습이 나타나지 않으면 당장에 가짜라고 분별할 수 있다. 지금도 신자가 자신의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는 주님이 응답하지 않는다. 만약 믿음으로 자신의 출세와 영달을 위해서만 사용한다면 주님이 마지막 때에 불로 태울 쭉정이다. 또 그 쭉정이들이 대환난 때에 알곡인 참 신자들을 고발하는데 앞장설 것이다.
적그리스도가 전반에 신자들을 미혹하여 회유하는 작전이 먹히지 않으면 둘째 방법을 동원할 것이다. 가공할 능력으로 핍박하여 두려움에 휩싸이게 할 것이다. 그 때에 신자가 끝까지 견딜 수 있으려면 끈기, 용기, 담력, 의지적 믿음들도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적그리스도는 가짜 허수아비임을 아는 것이다. 아무리 큰 표적과 기사를 펼쳐도 사람들이 해달라는 대로 다 들어주어도 아무런 영적 유익이 없으면 속을 이유가 전혀 없다. 마지막 적그리스도를 설명한 내용(23-26절)의 초라함과 미약함에 비해 주님이 재림하는 모습(27-31절)의 광대함, 영원함, 절대성의 극명한 대조를 보라.
사람에게 미혹되지 말라는 뜻은 적그리스도는 사람에 불과하므로 사람의 몸은 죽여도 그 영혼은 죽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재림하는 모습이 의미하는 바는 그분이 절대자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우주 전체 물질계와 영계 모두의 주인이자 통치자로 오신다는 것이다. 몸과 영혼을 함께 멸할 수 있는 주님을 공포심이 아닌 경외감으로 두려워하라는 것이다.
적그리스도의 외모를 보지 말라.
예수님은 죄악과 사탄과 사망의 권세에 눌려 신음하고 있는 인간들을 구원하러 오셨다. 당신의 택한 백성을 죄에서 건져 자유를 주셨다. 하나님의 참 생명을 부어주셔서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시고 거룩하고 아름답고 진실하게 바꿔주신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여호와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유대인들마저 사람이 만든 의식과 절차와 계명에 묶여 있었다. 하나님께 많이 바치면 상을 받고 적게 바치면 벌을 받을 것이라는 종교적 수고와 짐을 지고 있었는데 주님은 십자가 복음으로 그 멍에를 벗겨주셨다. 택한 자들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게 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정해진 규칙에 따라 인간을 통치하는 기계적인 하나님이 아님을 알게 해주셨던 것이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참 모습을 보여주셨다. 특별히 세상에서 사람들을 판단하는 외적 기준들에 하나님은 전혀 영향 받지 않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래서 창기, 세리, 과부, 문둥병자, 귀신들린 자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셨다. 문둥병자는 그 얼굴에 손을 대고 낫게 해주셨다. 절대로 외모로 판단하지 않고 그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임을 알게 한 것이다. 주님의 그런 사랑에 항복한 신자들 또한 외모를 보고 판단하지 않고 중심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예수를 아는 하나님이 택한 자들 사이에선 영혼과 영혼의 교통이 가능해진 것이다.
사람이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되는 까닭은 적그리스도 자체의 외모를 보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 실상이 허수아비인줄 모르고 속아 넘어간 것이다. 인간 사회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위신, 체면, 자존심 세우기 바쁜 사람들은 자연히 외모만 보고 판단하니까 적그리스도에게 미혹될 수밖에 없다. 신자는 외모 대신에 그 중심을 보는 자다. 사람 사이에 위신, 체면, 자존심 세우는 일만큼 헛된 것이 없음을 절감하기에 더 이상 외모에 속지 않게 된다. 나아가 이젠 참 생명을 소지하고 있다. 전우주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의 영이 함께 하고 있다. 죽었으면 죽었지 새로 얻은 그 생명을 포기할 수는 없다.
신자가 종말을 생각할 때에 또 성경에 기록된 마지막 징조에 관한 예언들을 읽을 때에 주로 어떤 생각을 하는가? 대환난 때의 적그리스도의 위협과 박해가 얼마나 무시무시할까? 또 내가 과연 그런 핍박을 견디어 낼 수 있을 지에만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자꾸 자기 능력으로 자기를 훈련하고 연습하려고만 든다.
아니다. 예수님 쪽에 붙어만 있으면 된다. 주님을 정말로 좋아하는가? 주님을 향한 사랑이 갈수록 늘어 가는가? 그분을 더 깊이 알아가고 있는지 날마다 순간마다 점검해야 한다. 적그리스도가 신자의 몸은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가? 우리의 영에 예수의 영이 함께 하는데 가당치나 한 일이겠는가? 절대 그럴 수는 없다. 신자는 이 땅에 살아도 예수와 함께 살고 있고, 죽어도 예수와 함께 죽는다. 몸이 죽어도 하늘에 이 땅과 비교할 수 없는 장막이 예비되어 있다. 본문 식으로 말하면 신자가 종말을 대비해 점검할 내용은 내가 아직 “사람”으로 남아 있는지, “주님의 너희”가 되어있는지 여부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본문 27-31절이 단순히 예수님 재림 때의 웅장하고 광대한 규모를 설명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분이 바로 절대자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또 이 땅의 모든 족속이 통곡하는 날이 언젠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단숨에 빛과 어둠으로 가르는 절대적 심판이 절대적으로 있다는 것이다.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떨어지는 것이 천지개벽이 일어나고 블랙홀이 지구를 포함한 태양계 전체를 삼킨다는 뜻이 아니다. 참 빛 되시는 예수님이 재림할 때의 영광이 너무 찬란해서 다른 모든 것들이 무색해진다는 것이다. 태양 빛마저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주님의 빛이 강렬하고도 영광스럽게 비췬다는 것이다. 또 빛을 주관하시는 예수님이 외모에 미혹되어 흑암의 권세에 굴복한 자들과 세상에 하나님의 빛을 비추러 오신 예수님의 밝음에 참여한 자들로 정확히 구분하신다는 것이다.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모은다는 말씀은 당신의 택하신 자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반드시 다 구원해주신다는 뜻이다. 그래서 정말 참 인간답게 하나님이 창조하셨을 때에 소망하고 계획했던 모습으로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도무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참 사랑을 누리게 해주신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핵 누출과 핵전쟁으로 이 땅에 정말 주검이 넘치고 독수리 떼만 설치더라도 사방에서 택한 자들을 부활시킬 것이다. 그 때까지 살아남은 소수의 신자들은 즉시로 신령한 육체로 변모시켜 주실 것이다. 또 지구상의 모든 물이 쑥으로 변해서 공상과학영화처럼 물 한 병 때문에 서로 총으로 쏴 죽이는 일이 빈번해도 요한계시록 22:1,2의 예언이 성취될 것이다.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으로 바꿔주고 강 좌우에는 에덴동산에서 사라졌던 생명나무들이 즐비하게 자라게 될 것이다. 그 생명수들은 열두 가지 실과를 풍성하게 맺게 될 것이다. 다시는 사람들 사이의 저주는 없어질 것이며 밤도 없어지고 세세토록 신자들로 왕 노릇하게 해줄 것이다.
이런 사실을 신자들은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성경에 쓰여 있고 예수님이 말씀했기 때문인가? 물론 그렇다. 그러나 그 이전에 내가 예수를 믿고 알아서 따르게 된 것이 절대자 하나님의 절대적 권능과 은혜에 의해서였다는 사실을 절대적으로 확신하기 때문이다. 나 같은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그분의 참 생명으로 거듭나게 해준 체험을 거쳤기 때문이다. 내가 예수를 믿은 것 자체가 성령의 초자연적 간섭으로 인해서였고 또 그것만큼 큰 표적과 기사는 더 이상 없음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예수를 처음 믿을 때부터 이미 예수님 쪽으로 인생의 방향을 절대적으로 전환했고 계속 그분 쪽으로 걸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여전히 본성이 연약하고 체질이 진토 같아서 넘어지고 쓰러지지만 어쨌든 예수님 쪽을 향해 넘어진 것이다. 내 의지와 믿음으로가 아니라 베드로의 장모에게 그랬듯이 예수님 쪽에서 먼저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워준 경험이 너무나 자주 있었기 때문이다. 이젠 그 주님과 반대 방향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도무지 상상도 못할 일이 된 것이다. 또 그래서 주님의 재림의 약속을 확신하고 소망하게 된 것이다.
신자가 마지막 적그리스도의 전반의 회유에 미혹되지 않는 까닭은 그 모든 표적과 기사가 오직 인간의 탐욕만 채워주고 예수님의 거룩한 이름은 실종되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또 후반부의 핍박을 끝까지 견딜 수 있는 이유는 내 몸을 죽이더라도 하나님의 택하신 자가 된 그 신분과 특권은 단 한치도 건드리지 못함을 알기 때문이다.
종말에 대한 구체적인 해석과 상상은 금물이라고 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예외는 있다. 본문 27-31절의 그 장엄한 광경에 내가 주인공으로 참여하는 모습은 얼마든지 상상해도 된다. 신자가 종말을 대비하는 자세가 “무찌르자 공산당” 식으로 적그리스도의 고난을 이겨내자 구호를 부르며 “으샤! 으샤!” 힘을 기르는 것이 아니다. 언제 어디서나 당장 오늘 이곳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누리고 있으면 된다. 또 그 사랑을 흑암의 세력에 미혹되고 있는 주위에 나눠주면 된다. 날로, 날로 예수님을 깊이 알아가며 그분 쪽으로 가까이만 가면 된다. 예수님께 가까이 가면 자연히 적그리스도와는 그만큼 더 멀어질 것 아닌가? 다른 말로 나의 탐욕스런 죄성을 죽여 나갈수록 적그리스도의 핍박을 너끈히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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