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설교

베리칩을 받으면 구원받지 못하는가? (마24:3-8)

새벽지기1 2017. 3. 21. 07:13


“예수께서 감란산 위에 앉으셨을 때에 제자들이 종용히 와서 가로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또 주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들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난리와 난리의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 모든 것이 재난의 시작이니라.”(마24:3-8)


종말이 실감나는 현대인들

예수님은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일곱 번 질책한 후에 두 가지 예언으로 결론을 내렸다. 첫째로 성전이 파괴되고 예루살렘이 멸망할 것이라고 했다. 둘째는 사람들이 당신의 그리스도 되심을 깨달아 온전한 찬송을 할 수 있을 때에 다시 오시겠다고 했다. 제자들은 당시에도 장엄하게 건축 중이던 성전이 파괴된다니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주님은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다시 확실히 단언하셨다. 제자들의 관심은 이제 주님이 말씀하신 그 일들이 “언제 일어날 것인지?”와 “그 전에 어떤 징조가 있을 것인지?” 두 가지로 옮겨졌다.    

이 문답은 성전에서 나와 성전이 내려다보이는 감람산 중턱에서 이뤄졌다. 마태복음에는 예수님의 강화가 다섯 나오는데 24장과 25장 두 장에 걸친 이 마지막 강화는 감람산 강화로 불린다. 예수님은 며칠 후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사탄의 권세 아래 죄의 노예가 되어 있는 인류에게 구원의 길을 활짝 열 것이다. 죽기 직전의 설교인지라 천국의 종말론적 도래가 주제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 강화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전반(24:1-41)은 종말에 대한 예언이며, 후반(24:42-25장 끝)은 종말을 준비하는 성도들의 자세에 대해 비유로 가르쳤다.  

현 세대는 문명과 과학의 발달로 삶의 질이 역사상 최고로 향상되었다. 고대 왕들도 누려보지 못한 호사와 사치가 일반화 되었다. 그 반대급부로 자연 환경은 파괴되고, 사람 사이에 경쟁은 너무 치열해졌고, 생활 여건은 아주 복잡해졌으며, 극단적 이기주의가 성행하며, 도덕적 성적 타락이 극심해졌다. 한마디로 사람의 주변은 풍성하고 화려해졌는데 그럴수록 정작 사람의 내면은 공허와 고립만 늘어났다. 지구 온난화도 급속도로 진행되고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서 보듯이 핵에 대한 공포는 더 늘어났다. 지구를 멸망시킬 대재앙이 불시에 들이닥칠 것 같은 두려움이 팽배해졌다.

모든 세대에 종말의 징조와 불안은 상존했지만 지금이 말세적 현상이 가장 두드러진 것만은 사실이다. 거기다 전 세계인이 동시에 동일한 고민을 가진 적도 처음이다. 통신과 인터넷과 SNS의 발달로 조금만 비정상적 사태가 벌어지면 영상으로 실시간으로 중계된다. 집에 들어가 텔레비전 뉴스를 볼 필요도 없이 스마트폰으로 바로 눈앞에 전달되니 두려움은 더더욱 증폭된다.  

사람에게 미혹되지 말라.

이런 상황에선 예수님의 감람산 강화를 정확하게 배울 필요가 있다. 마지막 때에 다시 오실 심판의 주체이신 주님이 종말에 관한 ‘언제’(when)와 ‘어떻게’(how)를 직접 가르쳤기 때문이다. 그 첫마디는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4절)는 것이다.  

우선 자칭 재림 예수라고 하면서 종파를 형성하려 들면 절대 믿지 말라는 뜻이다. 예수님의 초림으로 구원의 길은 열렸다. 승천하신 후에는 또 다른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택한 자들을 구원하는 역사가 진행 중이다. 교회 안의 쭉정이들과 세상 사람들에 대한 심판이 보류된 은혜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분의 재림은 마지막 심판을 위한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바꿀 것이다. 초림 때의  비천하고 낮아진 수난의 종의 모습과는 다르다. 재림은 모든 이가 확연히 심판주임을 알 수 있도록 영광된 모습으로 오신다. 십자가에 죽으실 때에 “다 이루었다”(요19:30)고 하셨듯이 대속의 사역은 완성되었다. 그 진리의 계시도 신약성경에 온전히 기록되어졌다. 또 다시 종파를 형성해 추종자를 모을 이유도 필요도 전혀 없다. 양과 염소를 일시에 영생과 영벌로 나누지 않으면 절대 재림 예수가 아니다.

종말주의자들도 십자가 복음을 가르치고 사람들로 지난 모든 죄를 회개케 만든다.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선한 명분을 내세우며 실천한다. 그러나 언제 있을지 모르는 재림 때문에 생업을 포기하게 하고 자기들끼리만 천국을 가려고 하니까 문제다. 더 큰 잘못은 성령의 역사로 진심으로 하나님께 항복하고 거듭나야만 구원을 받는데도, 단지 종말에 대한 두려움만으로 회개하게 만든다. 인간의 의지적 노력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무용지물로 만들기에 적그리스도일 뿐이다.  

어지간한 신자들은 이제 더 이상 재림 예수를 믿지 않는다. 그보다 종말에 대한 가르침, 특별히 시대적 징조를 해석할 때에는 반드시 예수님의 이 강화에 비추어 옳고 그름을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기묘하고 엄청난 규모의 재난이 생겨도 쉽게 동요하지 말라는 것이다. 주님도 전쟁과 기근과 지진이 빈발해도 두려워 말라고 하셨다. 단지 재난의 시작일 뿐이기 때문이다.(8절)

그런 징조들이 아무 것도 아니기에 아예 관심도 두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신구약 성경에 일관되게 계시된 하나님이 역사를 이끄는 기본 방향과 원리에 따라 해석하라는 것이다. 특별히 신자들을 대우하는 그분의 마음에 비추어 분별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간을 다루는 뜻과 계획은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과 십자가에 가장 정확하게 드러났다. 모든 종말의 징조를 반드시 십자가 복음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해야 한다.

물론 성경의 해석은 교파마다 달라 혼동될 수 있다. 전문적 신학 교육을 받을 처지도 아닌  일반 신자로선 성경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사람에게 미혹 받지 않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분명 아니다. 그럼에도 아주 쉽게 판별할 수 있는 원칙이 하나 있다. 성경의 특별한 구절에 유달리 집착하거나, 성경에 계시된 여러 징조 중에 하나만 계속 강조하면 일단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하면 된다.

선한 목적의 베리칩

그 대표적인 예는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가 사람들의 오른 손과 이마에 인을 치는 666에 관한 것이다.(계 13:18) 알다시피 그 동안 온갖 이상한 추측이 난무했다. 이 표를 가진 자는 매매를 하지 못한다고 하니까 크레딧카드나 계산대에서 스캔할 때 상품마다 붙은 바코드가 666일 것이라고 한 적도 있다. 최근에는 개인의 정보를 내장한 작은 전자 칩을 몸에 부착하게 하는 베리칩이 그 짐승의 표라고 가르친다. 그것을 받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까지 주장한다.  

베리칩은 아주 오래 전에 의료 목적으로 고안한 선한 기구다. 제가 이민 오자마자 들었으니 벌써 23년이 넘은 이야기다. 미국은 국토가 너무 넓어 모든 사회체계가 주별로 독립을 유지하고 있다. 전국적 의료 보험도 이제 겨우 시작 단계에 불과하다.

만약 타주로 멀리 여행가서 기절하거나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으로 후송되었지만 의식불명이라고 치자. 지난 병력과 현재 앓고 있는 질병과 복용하고 있는 약 등을 알면 곧바로 치료가 가능하다. 그러나 환자 본인과 대화를 할 수 없어 응급실에서 새로 검사하여 판정해야 한다. 그 동안에 치료가 지체 되면 자칫 사망할 수 있다. 대신에 개인 의료기록이 내장된 칩을 부착해 놓으면 환자가 의식불명이라도 스캔 한 번으로 적합한 치료가 가능해 생명을 살릴 수 있다.

문제는 911 사태 때문에 이왕이면 그 칩에 개인의 신상정보도 함께 넣어서 범죄와 테러 예방에 활용하자는 움직임이 생긴 것이다. 죠지 오웰의 공상 소설 동물농장의 Big Brother처럼 정부가 개인의 사생활을 침해하고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는 부작용이 예견되었다. 그래서 반대가 심해져 아직 법제화가 되지 않고 있다. 전 국민 대상의 의무규정으로 할지도 정해지지 않았다.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를 개발한 것은 광산채굴에 활용하려는 선한 목적이었다. 전쟁 무기로 악용한 것은 인간의 죄 때문이지 다이너마이트 자체가 악한 것도, 사탄의 것도 아니다. 베리칩도 인간 삶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선한 것으로 그 자체가 사탄의 도구는 아니다. 만약 의무규정으로 시행된 후에 신앙양심에 자꾸 걸린다면 받지 않고 벌금을 물면 그만이다. 오바마 케어 의료보험도 전 국민이 의무적으로 가입하도록 했지만 어기면 벌금만 물면 되듯이 말이다. 초대교회 때는 신앙을 지키려고 목숨도 맞바꿨는데 돈 몇 푼과 바꾸지 못한다면 말이 안 된다.    

물론 나중에 적그리스도가 그것을 악용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그럴수록 모든 문제의 근본원인인 인간의 죄를 제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십자가 복음의 은혜와 진리를 제대로 전파하고 가르쳐야 한다. 신자도 베리칩을 받으면 구원 받지 못한다는 것은 구원의 은혜 안에 들어오게 만든 주님의 십자가 공로를 무산시키는 짓이다. 베리칩을 십자가와 동격에 올리는 셈이다. 베리칩으로 구원을 문제 삼는 것은 오히려 Anti-Christ 편에 서는 잘못이다.

아무도 모르는 재림의 시기

난리, 전쟁, 지진, 기근 등의 징조는 인류 역사 이래 항상 있어왔다. 아담의 타락 이후 모든 인간이 죄 중에 태어나 죄와 더불어 살고 있기에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부작용이자 병폐다. 이 징조는 역사가 시작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이어질 것이다. 물론 모든 이가 확실하게 인식할 정도로 아주 많아질 때는 언젠가 올 것이다.

주님이 같은 의미이긴 해도 “종말의 시작”이라고 하지 않고 “재난의 시작”이라고 표현한 점에 주목해야 한다. 원어로 ‘재난’은 슬픔과 고통이라는 뜻이다. ‘종말’이란 그 특성상 시작도 끝도 없다. 불시에 순간적으로 와야 종말이다. 그 때까지 인간 사회의 슬픔과 고통은 계속 이어진다는 것이다.

대신에 성경은 종말 직전에 있을 특별한 징조 몇 가지를 밝혀 놓았다. 그것이 무엇이며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배워야 한다. 이 감람산 강화를 통해 차츰 살펴보기로 하고 오늘은 제자들의 두 관심사 중에 첫째 when에 관해 확실하게 정리해 두자.  

주님은 그 때는 아무도 모르며 심지어 성자인 당신도 모르고 오직 성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다고 대답했다.(마24:36) 몇 년, 몇 월, 몇 시에 재림할 것이라는 시한부종말론은 무조건 틀렸으니 전혀 귀를 기울일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만약에 그 시기를 미리 알고서 실컷 세속의 쾌락을 즐기다가 임박해서 회개하면 과연 진정성이 있겠는가? 주님이 어떤 인간도 알 수 없는 불시에 재림한다는 것은 상식으로 판단해도 간단히 알 수 있다.

재림의 시기를 알 수 없으니 징조의 시기에 근거해서 재림의 시기를 유추하려는 시도가 많다. 이 또한 성경에 기초하여 잘 분별해야 한다. 징조와 종말의 관계에 대해 잘못된 이해와 반응의 대표적인 다섯 가지를 들어보겠다.  

종말에 대한 잘못된 반응 다섯 가지

먼저 종말은 예수님 당대와 얼마 후에 이미 다 일어났다고 본다. 디도 장군이 성전을 파괴하고 예루살렘을 멸망시킴으로 더 이상 그런 징조가 없다고 한다. 순전히 과거주의 해석이다. 둘째는 성경에 계시된 모든 징조들이 종말 직전 즉, 먼 미래에만 있을 일이라는 것이다. 미리 신경 쓸 것 없이 안심하라는 것이다.

셋째는 징조를 시대 순서대로 배열하여 종말의 일정표를 작성하려는 시도다. 특별히 요한계시록의 각 구절을 현재의 사건과 증상에 끼워 맞추려 한다. 하나님의 일정표를 인간이 대신 만들 수는 결코 없다.

구약성경에 메시아의 초림에 대한 예언들이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아무도 정확히 해석 못했다. 아니 주님이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해도 제자들마저 그랬다. 성령이 오시어 사도들에게 조명해주자 비로소 그 해석이 가능했다. 마찬가지로 종말의 징조나 주님의 재림에 대한 해석도 예수님이 직접 강림하여 심판을 완성한 후에야 겨우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종말에 대한 구체적인 일정표를 제시하면 일단 의심해보아야 한다. 대신에 종말에 대한 몇 가지 특별한 징조에 관심을 두어야 하고 하나님의 구원 원리를 정확히 배워야 한다.

넷째는 엄청난 재앙이 닥치면 금방 종말이 올 것처럼 난리를 치다가 조금만 지나면 잠잠해지는 것이다. 항상 깨어서 자기 시대의 천체를 관통하는 영적 흐름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말씀과 기도에 전념해야 하며 무엇보다 항상 거룩하고 의롭게 살면서 언제 어디서든 복음을 전해야 한다.

마지막 다섯째 잘못은 종말을 현실에 실제로 닥칠 사건으로 보지 않는 것이다. 도덕적 종교적 훈계이니까 숨겨진 영적 의미만 찾으면 된다는 것이다. 주님은 8절에서 전쟁 기근 등이 재난의 시작이며 14절에서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면 분명히 끝이 온다고 했다. 인류의 역사는 원으로 순환되는 것이 아니라 직선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성경이 창세기로 시작하여 요한계시록으로 끝나듯이 말이다.  

이 땅에 죄악이 관영하는 어느 때에 주님은 불시에 반드시 다시 오신다. 이곳에 새 하늘과 새 땅을 실현하신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도 믿는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만 믿고 그 사람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상 그 사람을 전혀 믿지 않는 것이다.

원근(遠近)을 통시(通時)하시는 예수님

징조와 종말의 관계에 대해선 과거적, 미래적, 영적 의미 셋 다 인정하고 적용해야 한다. 신학용어로 ‘예언적원근통시법’(prophetic foreshortening)이라는 것이 있다. 시간을 만드시어 시간을 주도하되 시간을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를 한 눈에 다 보신다. 아니 그 모든 것을 미리 계획하여서 주관하신다.

예수님의 예언도 당대는 물론 가까운 미래와 먼 미래까지 다 포괄한다. 높은 산에 오르면 겹쳐진 여러 산자락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멀리 있는 것은 희미하게, 가까이 있는 것은 뚜렷하게 보이듯이 성경의 예언이 그러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예수님 사후부터 디도 장군의 예루살렘 멸망까지 자칭 재림 예수들이 많이 나왔고 로마 제국 곳곳에 전쟁과 기근이 빈발했다고 한다.

제자들이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일어나겠느냐는 질문에는 성전 파괴와 주님의 재림 둘 다 포함됐다. 주님은 이 모든 일이 이 세대에 일어난다고 했다. 또 너희 중에 인자가 천국 영광으로 다시 오는 것을 볼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제자들은 종말이 당장 자기들 당대에 일어날 것이라고 오해한 적도 있다.  

상식적으로 따져도 제자들이 살아 있는 중에 종말이 임하면 그전에 구태여 주님이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한 후에 곧바로 다시 오는 것이 괜스레 복잡하고 불합리한 구원 아니겠는가? 하나님도 그 당대 사람들만 사랑한 편협한 분이 되지 않는가? 예수님은 이런 원리를 일일이 풀어서 설명할 수 없었던 것이다.

만약에 과거, 현재, 미래를 구체적 일정표 식으로 예언했다고 치자. 인정하긴 싫지만 그 본성이 가뜩이나 게으르고 비겁한 인간들이 종말이 임박할 때까지 실컷 놀기만 할 것 아닌가? 시내 산에서 여호와를 만나고 있는 모세를 겨우 40일도 못 기다리고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향락의 파티를 즐긴 것이 인간이지 않는가? 그것도 홍해의 큰 기적을 맛본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말이다.

종말의 시기를 하나님의 아들도 모른다는 말씀은 주님이 성육신한 인간의 상태에서 하신 말씀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그리고 통시적으로 예언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라는 것이다. 종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태초 때부터 이미 작정해 놓은 일이다. 그리고 그 뜻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에 다 드러나 있다.  

십자가 복음 안에 있는 종말

태초부터 종말이 계획되었다는 것은 종말도 십자가 복음 안에 있다는 뜻이다. 인간이 타락할 것을 아시고도 이 땅을 창조한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예비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종말도 십자가 복음 안에서 소망을 가지고 잘 가꾸어서 준비해야 한다.

신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안에 이미 들어와 있기에 어떤 난리, 전쟁, 지진, 기근이 생겨도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생명과 성령의 법이 죄에서 구원해주셨다. 하늘의 생명책에 이미 신자의 이름이 올라가 있다. 신자에겐 더 이상 정죄함이 없다. 베리칩으로 이미 예수 믿은 신자에게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주어선 안 된다. 하나님도 종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당신을 믿는 것은 전혀 바라지 않는데 목사들이 그럴 수는 없지 않는가?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신자를 영광된 육신으로 순식간에 변모시켜 주신다. 슬픔과 질병과 고난과 상처와 완전히 무관해진다. 특별히 신자의 내부와 외부의 죄악이 완전히 없어진다. 신자에겐 종말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의 완성이다. 설레는 감격으로 재림을 기다려야 한다. 역설적이긴 해도 대재앙 같은 종말의 징조들이 나타나면 신자는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해야 한다. 종말에 대한 소망을 품고서 미리 준비하고 이 땅에서부터 실현해야 한다. 재림은 단순히 추측, 기대, 예상, 희망 사항이 아니다. 이미 확정된 사실이다.  

비유컨대 소망하는 대학의 입학 허가증은 받았지만 아직 입학식은 치르지 않은 것이다. 여학생들과 미팅도 하고, 좋아하는 동아리에 가입하고, 장래에 하고 싶은 일을 위해 공부할 수 있다니 정말로 기쁘고 설레지 않는가? 그럼 미리 대학 생활을 계획하고 준비할 것이다.

예수를 믿는 순간 성령이 영원히 내주한다. 구원은 취소되지 않고 천국 영광은 이미 확보되었다. 언제든 구원이 완성되면 주님을 얼굴로 맞대면 할 것이다. 신자는 부리는 종 천사의 섬김까지 받는 신분이 되었다.(히1:14) 세상만사를 판단할 수 있는 지혜를 성령님을 통해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의 신묘하고 거룩한 역사의 주인공이자 동역자이다. 믿음을 가졌다는 가장 큰 축복과 특권은 언제 죽더라도 주님의 품 안에서 깨어난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이다.

만약 천국, 부활, 재림에 대해 온전한 소망을 갖지 않고 반신반의한다면 당연히 그 준비와 실현도 반신반의 수준이 된다. 쉽게 말해 죽음이 두려워져서 이 땅에 미련만 커진다. 대학 입학허가증을 받고도 입학식이 언제라는 통보를 받지 않았다고 다른 대학에 다시 입학원서를 내는 바보 같은 꼴이다.

자칭 예수라 하거나 종말에 대해 허황된 해석을 하는 것은 성경에 비추어 쉽게 분별할 수 있다. 이젠 어지간해선 속지 않는다. 예수님이 사람에 미혹되지 말라는 것은 몸만 죽일 수 있는 사람에게 영향을 받지 말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세상에서 자랑하는 재물, 권력, 명예 등에 자기 인생이 좌지우지 되지 말라는 뜻이다.

전쟁 난리 지진 기근이 항상 있어왔듯이 이미 종말은 시작되었다. 신자가 서있는 바로 그 장소가 땅 끝이다. 신자가 살아가는 오늘이 바로 세상의 끝 날이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는 바로 그렇게 살고 있는 신자부터 찾을 것이다. 종말의 심판을 행할 주체이신 당신께서 가르친 그대로 따르는 자를 찾을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이치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