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 데 참예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그러면 너희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 됨을 스스로 증거함이로다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선지자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서기관들을 보내매 너희가 그 중에서 더러는 죽이고 십자가에 못박고 그 중에 더러는 너희 회당에서 채찍질하고 이 동네에서 저 동네로 구박하리라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내가 진실로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마23:29-36)
예수님의 종말론적 예언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마지막 일곱 번째 질책이다. 앞의 여섯 꾸중들은 비교적 쉽게 이해되었다. 본문은 예리한 풍자와 함께 종말론적 예언까지 포함되어서 조금 어려운 면이 있기에 우선 그 의미부터 간략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선지자나 존경 받은 인물들의 무덤을 치장하고 기념비를 세웠다.(29절) 지난주에 살펴본 사람들로 부정한 무덤을 피하게 하려는 회칠한 무덤의 용도와는 달랐다. 국립묘지에 국가유공자를 묻는 것처럼 후손들이 그들의 업적을 기리고 본받자는 목적이었다. 지금도 예루살렘에는 스가랴, 여호사밧, 압살롬 등의 무덤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는 분명히 선한 일이었다. 문제는 자기들이 선조들의 시대에 살았다면 그들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큰소리친 것이다.(30절) 선조들은 하나님의 뜻을 몰라 순종하지 않았지만 자기들은 선지자들을 존중하고 그 뜻을 잘 계승할 자신이 있었다고 자랑한 것이다.
히브리 어법상 누구의 후손이라고 말하면 선조와 본질적으로 같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주님은 “선지자를 죽인 자의 자손됨을 스스로 증거한다”(31절)고 즉, 자기 얼굴에 침 뱉는 짓을 한다고 지적한 것이다.
“너희가 조상의 양을 채우라”(32절)는 말씀은 이에서 한참 더 나가 너무나도 신랄한 정죄였다. 하나님은 아모리 족속의 죄가 ‘관영’할 때라야 이스라엘 백성더러 약속의 땅 가나안을 차지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셨다.(창15:16) ‘관영’(貫盈)이라는 용어는 컵에 물이 완전히 차있는 모습을 뜻한다. 컵 안에는 물만 100% 있고 공기라고는 한 방울도 없는 것이다. 가나안 땅에 죄밖에 없기에 하나님은 그 땅을 진멸하라고 하신 것이다.
주님은 마찬가지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선지자들을 죽인 조상의 죄 위에 마지막으로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한 방울의 죄를 보태어 완전히 죄로만 가득 채우게 될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인내의 한계에 도달했기에 심판 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없다고 선포한 것이다.(33절)
유대 지도자들이 심판 받아야할 더 중요한 이유
예수님이 유대 지도자들에게 영원한 심판을 선포한 것이 그들의 영적 교만 때문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자기들이 선조들의 시대에 살았다면 선지자들을 죽이지 않았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바꿔 말하면 만약 지금 선지자가 온다면 그들을 알아보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자신이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지금 그들 눈앞에 누가 있는가? 바로 예수님이지 않는가? 주님을 메시아, 아니 선지자, 아니 랍비로도 대우하지 않았다. 영적으로 우월해 교만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리석기 짝이 없지 않는가? 그들은 오래 전부터 예수를 죽이려 모의하고 있었다. 그것도 자기들이 그렇게 물리치길 소원하는 로마 제국의 힘을 빌려 꼭 사형시킬 작정이었다.
그들의 잘못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주님은 앞으로 올 선지자나 지혜로운 자나 서기관들도 핍박하고 죽일 것이라고 예언했다. 여기서 서기관은 지금 꾸중하고 있는 율법사나 성경 필사자들이 아니다. 주님은 천국 비유에서 당신을 따르는 자들을 “천국의 제자 된 서기관들”(마13:52)이라는 표현을 이미 사용했다. 초대 교회의 십자가 복음을 전파하는 제자들과 또 신약성경을 저작할 사도들을 지칭하는데 유대교가 그들을 핍박할 것이라는 뜻이다.
유대 지도자들은 과거 선지자들의 위상과 이스라엘 역사를 바로 세웠다고 자부했다. 반면에 주님은 아벨에서부터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 흘린 의로운 피 모두가 그들에게 돌아갈 것이라고 선언했다.(35절) 아벨은 알다시피 아담의 둘째 아들로 하나님께 의로운 제사를 드린 일로 형 가인에게 살해당했다. 사가랴가 누구인지는 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하지만 역대하 24:20-22에 기록된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다가 성전 뜰 안에서 돌로 쳐서 죽임을 당한 스가랴로 보는 것이 가장 유력한 해석이다.
아벨은 창세기에 기록된 인류 최초의 순교자이며, 사가랴는 이스라엘 역사를 기록한 마지막 책의 마지막 순교자다. 주님의 뜻은 인류가 창조된 이래의 모든 세대에서 하나님이 보낸 선지자들이 당시의 지도자들에게 핍박과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죄가 “이 세대에 돌아가리라”(36절)고 하셨는데 예수님 당대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내가” 복음 전파자를 보낸다고 했다.(34절) 하나님 본체의 자격으로 종말론적 예언을 하신 것이다. 초대교회에서부터 역사의 마지막에 당신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십자가 구원의 진리를 증거하는 자들을 훼방하고 핍박하는 모두를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어지는 24, 25장의 감람산 강화에서 재림 전의 징조와 최후의 심판의 모습에 대해 가르치셨던 것이다.
포도원을 빼앗긴 유대인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조상의 잘못을 답습하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을 했다. 그러나 동일한 잘못을 반복한 정도가 아니라 인류 역사 속으로 단 한번 직접 들어오신 메시아 하나님을 죽이는 역사상 최악의 죄를 범했다. 그들 조상이 선지자들을 죽일 때만 해도 하나님에게 인내의 여지가 남아있었다.
주님은 그들에게 세를 준 포도원 주인의 비유를 말씀하셨다.(마21:33-41) 주인이 소출을 걷으려고 종들을 보냈지만 농부들은 때리거나 죽였다.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내자 농부들은 그를 죽이고 포도원을 차지하려 했다. 주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포도원 주인 즉, 하나님이 오면 그들을 어떻게 하겠는지 질문했다.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포도원을 제 때에 실과를 바칠 즉,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다른 농부에게 주어야 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들의 대답대로 하나님의 구원은 불순종한 유대인 대신에 이방인들에게 먼저 베풀어졌다.
이방인 로마 총독 빌라도마저 예수님께 죄를 도무지 찾을 수 없었지만 유대인들의 독촉에 못 이겨 십자가에 달리게 했다. 양심에 찔린 빌라도가 이 자의 피와 자기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변명하자 유대 제사장과 백성들은 그 피를 자기들과 그 후손에게 돌리라고 소리쳤다. 그 후의 유대 역사는 불행하게도 그들의 외침대로 진행되었다.
참으로 소름 끼치는 일이 아닌가? 예수님의 예언에 신통력이 있었다는 뜻이 아니다. 너무나 교활하고 영악하고 음흉한 인간의 죄가 하나 숨김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 십자가 사건이라는 뜻이다. 인간은 아주 경건하고 신령한 양 착각했고 자랑했다. 아니 분명히 선한 일을 했음에도 그 와중에 더럽고 추한 죄는 여지없이 나타났다.
다윗이 가나안의 사방 대적을 물리침으로써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차지하게 해주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이뤄졌다. 아모리 족속의 관영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다윗이 대행한 것이다. 그 천년 후 하나님이 택하고 세우신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 죄악이 관영하였다. 특별히 영적으로 무지한데도 스스로 교만했던 영적 지도자들 탓이었다.
가나안의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종인 다윗을 통해 심판하셨다. 여호와를 알고 따르는 백성과 지도자들은 하나님 당신께서 직접 심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심판은 하나님 당신께서 죽으시어 그들의 죄 값을 대신 감당하는 모습이었다. 죄의 근원은 심판하고 죄인은 오히려 살리셨다. 어찌 이런 구원과 심판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아들 예수도 믿지 않은 마리아.
예수님은 아무 죄가 없었다. 도리어 신유와 선행으로 유대인들을 섬겼고 천국 복음을 전파했는데도 그들은 자기들이 미워하는 로마의 손을 빌려 죽였다.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탐욕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들에게 부화뇌동한 대중들은 너무 어리석어 보인다. 그래서 오늘날의 신자들도 내가 그 현장에 있었더라면 그렇게는 하지 않았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지도자들의 횡포는 막지 못했어도 최소한 그 처형에 동참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과연 그럴까? 우리의 생각이 완전히 틀렸음을 성경은 한마디로 증명하고 있다. 바로 베드로의 세 번에 걸친 부인 사건이다. 베드로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다른 제자들은 전부 뿔뿔이 흩어졌고 한 제자만 옷을 벗은 채로 따라갔지만(막14:51) 그 뒤에 어디에 숨었는지 성경은 침묵하고 있다.
몇몇 여인들과 특별히 마리아는 그래도 끝까지 예수를 믿고 따랐다고 여길 근거도 없다. 성경은 그들의 믿음을, 또는 그런 힌트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 여성 특유의 감성으로 안타깝게 여겼을 뿐이다. 만약 그들이 주님의 부활을 믿었다면 시신에 바를 향품을 준비하지 않았을 것이며, 부활했다고 알리는 천사를 보고 그렇게 놀라고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 아닌가? 피 묻은 옷을 버리고 부활 후에 입을 새 옷을 준비할 엄두는 전혀 내지 않았다.
에녹과 엘리야가 죽음을 겪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사건은 성경을 통해 익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중에 천사가 데려갔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창으로 옆구리가 찔리자 피와 물이 쏟아졌고 죽음을 분명 확인한 후에 무덤에 묻힌 지 이미 사흘째다. 모친 마리아도 아들의 죽음으로 모든 일이 끝났다고 체념했다.
예수님 주변에 있었던 모든 이들은 예수님을 역사상 가장 의로운 선지자로 여겼다. 공회원이자 바리새인인 아리마대 요셉은 본문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자기 무덤에 안장하여 주님을 기념하고 본보기로 삼아 그 가르침대로 살겠다고 헌신한 것이 전부였다. 계속해서 남자 아이는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줄 것이며 남자 어른들은 일 년에 세 번씩 절기대로 성전 순례를 할 것이다. 기존의 율법과 유전에 따라 살겠다고 담담히 각오했을 것이다. 예수님이 메시아이고 그분의 십자가 복음이 이 땅에 새로운 시대를 가져올 것이라고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다.
자기 얼굴에 침 뱉음을 당한 유대인들
삼년간 예수님께 직접 배우며 동고동락한 제자들이 그럴진대 유대 대중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찬송하며 열렬히 주님을 환영한 것은 일종의 민중 혁명이었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유대 공회는 예수를 그리스도라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이미 결의하고 공표했다. 출교가 국외추방은 아니기에 생존에는 지장이 없지만 어쨌든 경제적 정치적 손실이 크게 닥칠 것은 감수해야 한다.
누차 강조한 대로 유대인들은 자기들 공동체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유대인이 가장 유대인다워지는 것은 출애굽과 홍해의 기적으로 구원 받았고 모세의 율법을 소지했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선민(選民)이라는 의식이 바로 그들의 정체성이었다. 그런 사회에서 출교를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밖에 있다는 뜻이며 그분의 저주를 받았다고 선포되는 셈이다. 그들에겐 자긍심이 완전히 상실되는 엄청난 형벌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그렇게 열렬히 환영한 까닭은 정치적으로는 로마의 박해에서 해방되고 종교적으로는 너무 형식과 위선처럼 보이는 유대교에 염증을 느낀 것이다. 예수님으로 인해 새로운 세상으로 바꾸고 유대 공동체가 개혁되는 것을 소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종교권력인 대제사장과 정치권력인 로마에 저항은커녕 일언반구도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잡혀왔다. 로마 군인들이 조롱하고 사십에 하나 감한 채찍을 때렸고 심지어 얼굴에 침까지 뱉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유대인들의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영웅을 추종하는 대중의 심리는 그와 동질성을 느끼면서 대리 만족하려는 것이다. 예수님이 수모를 당하는 것을 보자 자신들이 맞고 얼굴에 침이 튀는 듯한 기분을 느꼈을 것이다. 기대가 높으면 실망도 커진다는 차원을 넘어선 것이다. 자기들 자존심이 완전히 구겨진 것이다. 순간적 자연적으로 예수에 대한 배신감과 혐오감이 솟구쳤고 차츰 저주로 바뀌었던 것이다.
그럼 그냥 예수에게 욕이나 퍼붓고 돌아가면 그만이었을 텐데 왜 십자가에 매달라고 아우성쳤을까? 오늘날도 반정부 데모를 하면 사진으로 채증(採證)하여 맨 앞에서 적극 가담한 자를 색출해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구속한다. 이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나면 다시 대제사장의 세상으로 돌아간다. 그들이 그동안 예수님께 쏠리는 인기를 수수방관한 것이 결코 아닐 것이다. 누가 앞장서서 예수를 추종했는지 블랙리스트도 만들어 놓았을 것이다. 대제사장의 눈에 들어 어서 빨리 그 리스트에서 자기 이름을 제거해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께 열렬히 호응했던 자가 가장 적극적으로 크게 죽이라고 목청을 높일 수밖에 없다.
구원을 위한 유일한 이름 예수
인간의 영적 실상이 바로 이런 정도밖에 안 된다. 우리, 아니 바로 저부터 예수님의 시대에 살았다면 이들과 하나 다를 바 없이 비겁하고 치사했을 것이다. 앞장서서 호산나 했다가 거꾸로 앞장서서 십자가에 달라고 크게 외친 자나, 스승을 세 번이나 배반한 베드로는 그나마 나은 편이다. 그들은 어쨌든 무슨 일을 하던 열정적으로 앞장서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하겠다. 저는 대학교 때에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데모를 할 때에 빠지자니 친구들이 비겁하다고 욕할까 두려웠고, 앞장서자니 최루탄과 곤봉이 무서웠다. 그래서 맨 꽁무니에서 어정쩡하게 따라다녔다. 만약에 제가 빌라도 법정에 있었더라면 앞장서서 소리는 못 내고 뒤에 숨어서 손을 드는 시늉만 했을 것이다.
주님은 그런 나에게 속에 탐욕과 방탕과 시체와 뼈가 가득한데도 겉으로만 회칠한 무덤 같다고 선언했다. 친구들에게 착하고 의롭다는 평을 받는 것은 빈껍데기에 불과하고 진짜 내 모습이 얼마나 더럽고 추한지 주님이 깨우쳐주셨다. 그런 저를 구원할 길은 당신의 십자가 외에는 있을 수 없음을 알게 해주셨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비추면 모든 인간이, 특별히 지도자들의 잘못과 죄가 얼마나 큰지 명백하게 들어난다. 십자가가 없다면 그들과 저는 인간 사회에선 여전히 존경받고 칭찬 받을 것이다. 예수님과 그분의 가르침과 사역, 그중에서도 십자가 앞에선 어떤 인간도 하늘을 향해 고개를 바로 들 수 없다. 십자가는 모든 인간의 영혼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찔러 쪼개어 만물을 상관하시는 분 하나님 앞에 완전히 벌거벗겨 놓는다.
다른 말로 십자가는 인간의 사상, 철학, 도덕, 종교의 산물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사고로는 십자가를 구원의 길로 절대 떠올릴 수 없다.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겐 걸림돌이요 이방인들에겐 어리석게 보일 뿐이다. 인간이 고안해 내는 구원의 길은 수만 개라도 가능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만은 제외된다. 인간 사고를 넘어서는 구원이다. 하나님은 모든 세대의 인간들에게 예수 외에 구원의 이름을 준 적이 결코 없다.
돈을 밝히는(?) 하나님
유대 지도자들은 국립묘지를 건축하여 국가유공자를 안장하는 아주 선한 일을 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자기들이 묻힐 것을 스스로 작정했고 또 그 사실을 미리부터 떠벌렸다. 자기들이 묻힐 자리까지 예약해 놓았던 것이다. 너무나 불행하게도 오늘날의 교회에도 그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이곳 LA에 세계적으로 유명한 수정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다. 예배당 전체를 유리 성처럼 아름답게 지은 교회다. 가자마자 크게 실망한 일이 생겼다. 교회 경내에 교인들의 공동묘지가 있는데 헌금을 많이 한 성도는 큰 비석을, 적게 낸 자는 적은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교회에 헌신을 많이 한 성도를 후대 교인들로 본받게 하자는 선한 의미는 있다.
그러나 천국도 돈에 따라 대우가 달라진다는 뜻 아닌가? 죄송한 표현이지만 하나님도 돈을 밝히는 분으로 인식될 것 아닌가? 그곳은 세계적 관광명소로 신자뿐 아니라 불신자들도 많이 방문하는 곳인데 불신자들이 그렇게 생각할 것 아닌가? 십자가 복음이 전파되는 일을 방해하고 있다. 예수님 말씀대로 선지자들을 훼방하고 핍박하는 일이다.
매주 TV로 미 전국에 예배가 중계 된다. 미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목사 중에 한 분이 담임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교회 재정이 궁핍해져 은행 부채를 갚지 못해 건물이 가톨릭으로 넘어가는 수모를 겪었다. 적극적인 믿음을 갖고 열심히 능동적으로 돈을 벌라는 기복주의 신앙을, 천국에도 돈이 많은 자들이 우선적으로 좋은 대우를 받는다고 강조했던 교회가 바로 그 돈 때문에 망한 것이다. 이 또한 너무나 소름이 끼치는 일이 아닌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면서 그 피를 자기들과 그 후손에게 돌리라고 큰소리친 것이 그대로 실현된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았는가?
그 교회는 겉으로 고상하고 신령한 일들을 많이 했다. 그러나 그 안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 찼던 것이다. 실제로 담임 목사의 가족들끼리 서로 돈을 두고 싸웠다. 그런데도 그들은 아주 잘하고 있다고 착각했다. 자기들 안이 얼마나 더럽고 추한지 스스로는 도무지 알지 못했다.
인내와 사랑에 한계가 없는 하나님
절대 그들만을 탓할 수는 없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 당시에 살았더라면 한 명의 예외 없이 유대인들과 똑같았을 것이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 영혼의 실상이 그러하다. 인간 스스로는 결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 참 생명을 얻지 못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수밖에 없다. 이 썩고 썩은 인간의 영혼을 살리려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셔야 했다. 죄인은 성령의 은혜로운 간섭으로 그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에 연합해야만 한다.
주님이 지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향해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고 했다. 마지막 한 방울의 죄를 더 보태어 하나님의 인내의 한계에 도달한 것이 이미 이천 년 전의 일이었다. 그 후로는 주님이 언제든 심판하러 재림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당장에 그러지 않고 미루고 있는 것은 오직 당신만의 긍휼과 사랑 때문이다. 잃어버린 영혼을 한 명이라도 더 구원하시려는 그분의 애끓는 심정 때문이다. 하나님의 인내에는 한계가 없고 사랑에는 부족함이 없다. 한계나 부족이라는 단어 자체가 그분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 생생한 증거도 성경에 있다. 바로 사도 바울이다. 그야말로 주님의 이 일곱 질책, 아니 저주를 받아야 할 대상이다.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의 처형을 주도하고 실행했다. 아벨에서 사가랴까지 이 땅에 흘린 의인의 피가 그에게 돌아가야 마땅하다. 그런데도 부활하신 주님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를 만나 용서해주었다. 먼저 찾아오셔서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다. 당신을 믿는 신자들을 죽이러 가는데도 거꾸로 무한한 사랑을 베푸셨다.
그리고 그를 선지자요 지혜 있는 자요 서기관으로 삼아 세상으로 보냈다. 신약 성경의 절반을 그로 저작케 했다. 그로 하여금 오직 십자가 은혜를 믿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진리를 선포하게 하려는 뜻이었다. 하나님의 사정은 하나님의 영으로만 알 수 있고 또 그래서 성령이 없이는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없다는 진리를 저술하게 한 것이다. 모든 인간이 정녕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덧입혀지는 길밖에 없음을 사람들로 알게 하려는 뜻이었다.
그 진리들이 그의 인간적 사상과 철학의 산물이 결코 아니었다. 그는 영원하신 하나님 예수님을 개인적 인격적으로 만났다. 삼일 간 봉사가 되어 주님의 죽음과 연합했고, 또 예수 믿는 신자 아나니아의 기도로 눈을 보게 됨으로써 주님의 부활과 연합했다. 성령의 중생의 씻음을 받아 그의 영혼에 참 생명이 심어진 것이다. 그러자 세상 어느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복음으로 의로워지는 싸움을 싸우는데 지치지 않게 되었다. 스승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와 뿔뿔이 흩어져 도망갔던 제자들도 주님의 부활에 연합함으로써 스승처럼 십자가에 순교하는 자리에까지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었다.
주님의 이 일곱 번의 질책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만을 향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실제로 그 자리에 있지도 않았다. 모든 세대의 신자들, 특별히 목회자들을 향한 말씀이다. 바울처럼 당신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비밀의 경륜이 절대적이고도 영원한 진리임을 선포하고 가르치라는 것이다. 인간이 참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사람들로 알게 하라는 것이다. 이 진리를 선포하고 가르침으로 세상에서 출교를 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전혀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 그 진리를 말로만 선포하고 가르치지 말고 실제로 자신의 삶에서 실현하라는 것이다. 자기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림으로써 자기가 속한 세대에 그 진리 됨을 증거해야 한다. 예컨대 신자들에게는 너무나 아름다운 장막이 하늘에 이미 다 마련되어 있기에, 교회가 헌금을 이웃 사랑과 복음 증거에 쓰지 않고 교회의 공동묘지 짓는 것 같은 종교 놀음에 교인들을 그만 동원하라는 것이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 성령으로 거듭나서 십자가의 진리를 제대로 아는 목회자와 신자라면 주님을 따라가며 복음을 증거하는 의로운 싸움 외에는 인생의 소망이 없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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