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설교

신자가 범하는 진짜 외식은? (마23:25-6)

새벽지기1 2017. 2. 10. 07:39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소경 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마23:25-26)


형편에 따라 말을 바꾸는 예수님?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다섯 번째 질책이다. 그들은 잔과 대접의 겉만 깨끗이 했다. 종교의식에 사용하는 집기이든 일상생활의 식기이든 음식을 담기에 안이 깨끗해야 한다. 대신에 그들의 안에는 탐욕과 방탕이 가득했다.

탐욕은 강탈한다, 도둑질한다는 뜻으로 물질에 대한 과도한 욕심이다. 그들은 맹세할 때 반드시 위약보증금을 성전에 걸게 했다. 하나님께 맹세했으므로 꼭 지키라는 선한 가르침이었다. 그러나 세상사가 자기 계획대로 되지 않기에 어기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는데 그때는 그 돈으로 자기들 배를 채웠다. 예수님이 셋째로(16-22절) 꾸중한 이유다.

방탕은 무절제나 자제력을 상실하는 것으로 윤리적 측면의 죄다. 그들은 채소와 양념의 십일조까지 엄격하게 적용했다. 이 또한 율법을 엄격히 지키라는 좋은 가르침이었다. 그러나 십일조를 제정한 하나님의 더 중요한 목적인 의와 인과 신 즉, 이웃구제는 외면하고 자기들만 호사스럽게 살았다(23-24절). 돈과 세상 재미의 유혹에 넘어가 절제력을 잃은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알고 믿는 바에 따라 말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다. 예수님이 귀신 들려 장님과 벙어리 된 자를 고쳐주자 바리새인들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렸다고 비방했다. 주님은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12:34,35)고 야단쳤다.

유대 지도자들의 안이 더럽다고 했기에 그들이 악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인간 됨됨이 자체가, 그 본성이 악하다고 선포한 것이다. 당신께서 하신 말씀에 따르면 속에 쌓인 선이 겉으로 나온 것이 아닌가? 유대 대중들로부터도 경건하다고 칭찬과 존경을 받았다. 그럼 예수님이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당신의 편리에 따라 말을 바꾼 것인가?

위악(僞惡)은 없다.

선생이 잠시 외출하면서 칠판에 문제를 적어주면서 조용히 자습하고 있으라고 지시했다. 돌아와 보니 문제는 지워지고 선생님을 조롱하는 말만 잔뜩 쓰여 있었다. 누가 그랬는지 실토하라고 닦달해도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십초 안에 자백하지 않으면 토끼뜀으로 운동장 열 바퀴 도는 단체기합을 줄 것이라고 했다.

그래도 잠잠 하자 보다 못한 반장이 대신 벌을 받겠다고 거짓 자백을 했다. 거짓말은 악한 것이다. 반장은 악한 척 즉, 위악(僞惡)을 행한 것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그를 위악했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의리 있게 자기를 희생하며 선을 행했다고 모두가 알기 때문이다.

주님의 뜻은 이처럼 선한 자의 속에 가득한 선은 도무지 감출 수 없다는 것이다. 은밀하게 숨어서 익명으로 선을 행할 수 있지만 아름다운 열매는 반드시 맺힌다. 또 선 자체가 그 당사자에게 주는 충만한 기쁨은 아무도 막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악한 자의 악도 반드시 겉으로 드러난다. 거짓은 거짓처럼 안 보이려고 또 다른  거짓을 보태어야만 하지만 결국은 탄로가 난다. 끝까지 숨길 수 있는 완전 범죄란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있다 쳐도 악 자체가 그 당사자에게 주는 혐오감 수치심 두려움 죄책감은 절대 지울 수 없다.

예수님은 겉을 “깨끗이 한다.”(25절)라고 능동형 동사를 사용해서 설명했다. 만약에 유대 지도자들의 안이 깨끗해서 겉으로 자연스레 드러난다면 겉도 “깨끗하다”고 형용사로 표현했어야 한다. 능동적으로 겉만이라도 깨끗하게 하려 했다면 자기들도 안이 더럽고 추하다는 것을 알고서 의도적으로 감추려 했다는 뜻이다.

십일조의 두 목적 중에 이웃 구제하는 데는 사용하지 않고 자기들이 호사스럽게 사는 데만 전용한 것은 이런 경우에 해당된다. 헌금의 반은 아파트 렌트도 못 낼 만큼 사정이 딱한   OOO 집사에게 전해주고 나머지 반은 목사님 사례비에 보태라고 익명으로 지정 헌금했는데 익명으로 했으니 아무도 모르리라 여기고 목사가 중간에 착복한 셈이다. 그 때에 목사가 죄라는 것을 모를 리도 없고 죄책감도 분명히 느꼈을 것이다.

십일조의 율법규정은 사용용도를 제한한 하나님의 지정헌금이다. 율법의 전문가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자기들이 횡령한 일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큰 죄인지 모를 리도, 죄책감이 안 생겼을 리도 없다. 그러면서 성전수리에 사용했다는 식의 다른 명목을 댄 것이다.
        
초록은 동색이다.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과 관습대로 아무 반발 없이 따른 대중들도 초록은 동색이라고 사실은 악인이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아무래도 잘 알지 못하는 백성으로선 성경을 연구해서 가르치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자가 콩을 팥이라고 말해도 믿을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핑계는 통하지 않는다.  

성전의 환전상과 제물 파는 장사치와 제사장들이 결탁하여 폭리를 취한다는 사실을 그들이 몰랐을 리 없다. 유대인은 예나 지금이나 이재(理財)에 가장 뛰어난 민족이다. 노벨상 수상자를 세계에서 최고로 많이 180명이나 배출할 만큼 영리한 자들이다. 그런데도 그 잘못에 가담한 것은 흠 있는 제물이니까 이익을 붙여도 정상가보다 쌌기 때문 아니겠는가?  

더 중요한 이유는 그렇게 해야만 유대 사회에서 출세가 보장됨을 안 것이다. 부정부패임을 알고도 악이 주는 쾌락과 형통이 너무 좋아서 무절제해져 방탕에 방임한 것이다. 한마디로 지도자나 백성이나 즉, 모든 인간이 의도적 적극적 능동적으로 악만 좇은 것이다. 생활 여건이 열악해서 그러지 않았다. 최초의 타락이 낙원에서 있었듯이 풍요롭고 사치하기 위해서 죄를 지었다. 인간의 본성이 악하다는 것 외에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골고다 십자가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가? 예수님이 많은 표적을 행하자 대중들의 인기가 쏠렸다. 대제사장이 공회를 소집해서 가만 두면 모두가 그를 추종할 것이며 로마가 이 땅을 빼앗을 것이라고 염려했다. 대제사장 가야바가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요11:50)라고 슬그머니 부추겼다.

당시까진 로마 제국은 식민지의 종교의 자유를 허락했다. 나라가 망할 리가 없었다. 실제로 빌라도 총독도 예수님이 무죄함을 알고 풀어주려고 나름대로 노력했지 않는가? 유대 지도자들이 겉으로는 나라가 망하지 않게 하려는 애국적 구호를 내세웠으나 실은 속에서 주체할 수 없이 끓어오르는 더럽고 추한 탐욕과 방탕을 가리려는 핑계였다.

이는 선생이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실토하라고 닦달하며 단체기합을 받기 직전에 그 반의 반장이자 싸움 짱이 가장 얌전하고 착한 아이를 눈짓으로 지목한 꼴이다. 반원들 모두가 “재가 그랬어요!”라고 한 목소리로 고발해서 벌을 받게 한 것이다. 학생들이 그 짱의 위협에 눌린 것이 아니다. 모두가 칠판에 선생 욕을 썼기 때문이다.

악인들이 억지로 더 큰 악을 조성해 낸 것이다. 희생자의 입장에선 위악이 되었다. 혹시 위악을 영어로 뭣인지 알고 싶어 한영사전을 찾았더니 놀랍게도 없었다. 척한다, 위장, 가장한다는 말만 있다. 한단어로 된 표현이 없다는 것은 그만큼 보편적인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인간의 본성이 선하여 남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다반사라면 당연히 그 단어가 있어야 한다. 바꿔 말해 인간 사회에는 위선만 성행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일곱 번 야단치면서 여섯 번이나 외식하는 자라고 지칭한 까닭이다.  
  
유원지의 두더지잡기 게임

정말 솔직히 진심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봤을 때 그 안이 깨끗하다고는 어느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목사인 저부터도 그렇다. 모든 인간이 하루에도 몇 번씩 거짓, 부정, 불법을 행한다. 행하지 않으면 말을 하고, 말을 하지 않으면 생각이라도 한다. 인간의 영적 실상은 유원지의 두더지잡기 게임 같다. 하나의 죄를 겨우 다스려 놓으면 전혀 예상치 못한 엉뚱한 죄가 더 큰 세기로 갑자기 튀어나온다.

불신자들은 그 죄들을 끝까지 자기 힘으로 이겨보려 한다. 안타깝게도 결코 이겨내지 못한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만은 자신의 죄에 대한 무력함을 알 수 있다. 그런 자신이 당연히 싫어진다. 그런데 그 사실을 인정하기는 더더욱 싫다. 아무래도 이길 수 없다보니 혹시 겉으로 드러나 남이 볼까봐 어떻게든 감출 수밖에 없다.

불신자들의 안타까운 모습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들 마음에 끝까지 하나님을 두기 싫어한다. 모든 선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만 온다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는데 이것 또한 인정하기 싫은 것이다.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100% 완전하고도 영원한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이다. 그분만이 인간과 인간의 사이를 온전한 질서와 조화와 균형을 형성할 수 있다. 그분을 거부하면, 아니 잠시 잊고 등을 돌리면, 심지어 그분 쪽을 향해 서있긴 한데 그분과의 거리가 가까워지지 않고 멀어지고 있다면 모든 질서와 조화와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한다. 선을 누리지도 알지도 못한다. 평생을 그분을 부인하는 불신자에게 기다리는 것은 완전한 파괴 즉, 영원하고 절대적인 죽음뿐이다.  

예수를 믿어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불신자들보다 더 선하고 거룩해졌다는 뜻이 아니다. 비록 아무래도 이전보다 죄를 적게 지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맞지만 그 본성 자체가 죄에서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다. 신자란 저는 악인이며 그 쌓인 것은 악이며 그래서 제게 나오는 것이 악이라는 진리를 절감하여 그렇게 고백할 수 있게 된 것뿐이다. 또 그 악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선은 하나님께로만 오기에 하나님만 바라볼 수밖에 없게 된 자다. 자기 인생의 방향을 그분 쪽으로 틀기 시작한 것이다. 요컨대 모든 인간들이 그 본성상 위선을 떨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겸비하게 인정하게 된 것이다.    

불신자는 당연히 그 반대다. 어떤 사람들인가? 자기가 악하고 남도 악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심지어 모든 이들이 위선을 떨고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도 남들은 모두가 위선자이지만 자기만은 그렇지 않다고 끝까지 우기는 자들이다. 자신의 존재와 인생과 삶 모든 것이 사실은 그 위선의 바탕 위에 서있으면서 말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는?

예수님이 이 땅에 기독교라는 종교를 창시하려 오신 것이 아니다. 큰 교회를 곳곳에 세우려 하지 않았다. 모든 이에게 현실적 형통과 영달을 주려고 온 것은 더더욱 아니다. 주님은 조용히 너무나 낮고도 비천한 모습으로 오셨다. 오셔서는 사회에서 소외되고 가난하고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과 조용히 교제하다 아무 말 없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인간 사회에서 최고로 존경 받는 대제사장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사악함의 희생양이 되었지만 예수님 쪽에선 사실은 역사상 최고의 위악(僞惡)을 스스로 조성해내신 것이다. 주님은 아무 죄가 없으시고, 아니 악과는 공존할 수조차 없다. 더럽고 추한 모든 것은 당신 앞에선 당장 소멸해 없어진다. 그 거룩하신 하나님이 가장 비천한 사형수의 자리에까지 자신을 완전히 낮추셨다.

이 세상을 주름잡고 있는 짱의 위협이 두려워서 혹은 못 이겨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 짱에 눌려 어쩔 수 없이 따라다니는 학급의 반원들이 불쌍해서만도 아니었다. 지도자와 백성들 즉, 모든 인간들이 흑암의 세력에 자신을 내어 맡기고 더럽고 추한 죄악에 완전히 묶여 있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모든 인간이 외식하고 있는 모습이 불쌍했던 것이다. 외식이 단순히 잘못된 행동이나 말과 행동의 불일치가 아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다르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특별히 자신은 악인인데 속에 악이 쌓여 있고 나오는 것은 악이라고 고백하지 않는 것이다.

주님의 십자가는 모든 인간에게 말과 행동이 다른 표면적 외식만이 아니라 더 크고 중요한 자신의 본성을 바르게 보지 못하는 영적 외식의 틀을 제발 깨트리라는 뜻이었다.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는 어떤 인간도 온전한 선을 누릴 수도 알 수도 없음을 깨닫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님 없이는 평생을 위선자로만 살 수밖에 없음을 진정으로 겸비하게 인정하게 하려는 뜻이었다.

예수님이 아무 말씀 없이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가 무엇인가? 인간이 어떤 더럽고 추한 모습으로 있든지 결코 문제 삼지 않겠다는 것이다. 심지어 억지로 악을 강요해서 하나님이신 당신을 십자가에 매단 죄까지도 따지지 않겠다는 것이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라고 성부 하나님께 간구하지 않았는가?

현재 어떤 모습으로 있든지 아무 외식 없이 그대로 당신께 나오라는 것이다. 인간의 현재 상태를 전혀 문제 삼지 않겠다는 것은 아담이 타락한 이후, 아니 창조 때부터 인간을 당신의 사랑과 권능의 손으로 붙들고 있지 않은 적이 단 한시도 없었다는 뜻이지 않는가?

베드로가 당신을 하루 저녁에 세 번째로 부인하자 주님이 “돌이켜” 보았다(눅11:61) 아무 말 없이 잠잠히 보았다는 것이다. 그 눈빛 안에는 그의 잘못에 대한 어떤 책망도, “봐라 내가 그렇게 말했지!”라고 당신의 권능을 재확인시키려는 뜻도 전혀 없었다. 당신께서 택하신 당신의 제자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사랑뿐이었다. 그 사랑이 하나님의 영을 통해 베드로의 영에 쏟아 부어졌다. 그러자 밖으로 뛰쳐나가 심히 통곡했다.

그는 스승을 목숨을 바쳐 보호하겠다고 큰소리친 대로 대제사장 하속의 귀를 칼로 잘랐다. 분명히 그의 말과 행동은 일치했다. 겟세마네 동산에선 능력의 주님이 바로 곁에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빌라도의 법정에선 주님에게 그 큰 능력이 사라진 것처럼 보이니까 세 번이나 부인한 것이다.

주님은 처음부터 베드로의 그런 안까지 속속들이 알고 계시고도 그윽이 바라보시며 당신의 따뜻한 사랑으로 그의 온몸에 가득 채워주었다. 그는 비로소 자기 본성의 실상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자신의 사람 됨됨이가 악하고 속에는 악이 쌓여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영적인 위선자임을 알게 된 것이다. 의롭게 행동한 것도 자기 속에 있는 탐욕과 방탕을 가리려는 외식이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떠난 모든 인간은 외식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진리도 깨달은 것이다.

신자의 외식

예수님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잘못된 가르침과 관습 넷을 겉으로 외식하는 모습의 대표적 예로 든 다음에 본문의 말씀을 하셨다. 그런 외식의 근본 원인을 설명한 것인데 한마디로 그들 속에 하나님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진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분을 정말로 사랑하고 존경하고 경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 그분을 온전히 하나님답게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아무리 종교적으로 경건한 모습을 보였어도 하나님의 이름을 빌려 자기 돈과 권력과 명예만 높이려 한 것이다. 사람들은 속일 수 있을지언정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다. 하나님이 보시기는 그 전부가 외식이었다.

오늘날의 목회자와 신자는 그들의 잘못을 답습할 수 없다. 뒤로 호박씨 까지 말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그들 마음에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배하지 않은 것이 근본원인이라면 그 원인을 제거해야 한다. 가장 먼저 하나님과 일대일 자신의 전 인격을 걸고 만나서 자신은 도무지 고개를 들 수 없는 무익한 존재라는 것을 진심으로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또 그 고백으로 그쳐선 안 된다. 자기를 그렇게 무익한 존재로 만든 자신의 안과 세상의 모든 더럽고 추한 것들과 죽기까지 싸워서 제거해야 한다. 단 이제부턴 자기 힘으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구해서 성령의 힘으로 이겨야 한다. 기도와 말씀에 전무하면서 말이다.

자기가 알고 믿는 바대로 행하지 않으면 외식이다. 안과 겉의 모습이 다르면 위선이다. 정말로 예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참 제자가 되어있지 않고, 아니 그런 소망도 없다면 신자의 외식이다. 단지 지역교회의 조직원으로만 남아 있다면 교인의 외식은 아니지만 신자로선 외식이다.

삶을 풍요롭고 호사스럽게 하려고 스스로 정한 목표를 하나님 힘만 빌려 이루려는 것이 바로 신자의 외식이다. 기도, 헌금, 봉사, 무엇이든 하나님께 많이 바치면 그에 비례해 하나님이 복을 더 주시고 고통에서 해방시켜주리라 기대하는 것도 외식이다. 하늘에 이미 확보되어 있는 참 생명을 누리고 있지 못하거나 최소한 알려고도 않는 것이 신자의 외식이다.

예수님이 아무 말씀 없이 십자가에 죽으신 또 다른 뜻이 무엇인가? 너희들이 나에게 바치는 것들과 아무 상관없이 나는 너희를 사랑한다는 것 아닌가? 본성이 악하든, 그래서 그것을 감추려 위선을 떨고 있었어도 자신의 본성이 그렇다는 사실만 인정하라는 것이 십자가가 아닌가? 신자의 외식은 하나님을 하나님답게 대우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바로 본다는 것은 결국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자신의 영적 실상을 발견하는 것이다.

따라서 신자가 예수님의 십자가 진리를 알지 못하면, 알려고도 하지 않으면 외식이다. 성경을 읽고 읽어서 그 진리를 탐구하지 않으면 외식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운동력이 있어서 어떤 것도 새롭고도 아름답게 변화시킬 수 있다. 그 말씀으로 자신의 내면이 완전히 뒤집어진 경험이 없다면, 또 그렇게 변화 받은 후의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풍성한지 누리고 있지 못하고 단순히 교회만 왔다 갔다 하면 신자의 외식이다.

구태여 외식이라고 말할 것도 없다. 단지 시간낭비일 뿐이다. 바울은 부활이 없으면 신자가 가장 불쌍한 자라고 했다. 세상에서도 실패하고 교회에 나와서도 온전한 십자가 은혜를 누리지 못하면 양쪽에서 다 실패한 것 아닌가 말이다.

하나님이 죽은 것처럼 사는 신자들

진정으로 예수님을 닮으려 하지 않는 것, 세상이 아무리 나를 실망시켜도 주님만 따라가려 하지 않는 것이 바로 신자의 가장 큰 외식이다. 우리가 알고 믿고 고백하는 내용이 무엇인가? 예수님이 나의 모든 죄 값, 수치, 고통까지 십자가에서 다 감당하시고 내 대신 죽었음을 믿는, 아니 아는 것 아닌가? 주님의 부활하심에 나도 연합하여 그분의 영원한 생명에 연합되었음을 아는 것 아닌가? 그래서 이 땅의 장막이 무너지더라도 그것과는 도무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아름다운 장막이 하늘에 이미 예비 되어 있음을 아는 것 아닌가?

한마디로 예수님의 십자가 안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어낼 것은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신자가 그런 앎대로 살지 못하면 신자의 외식이다. 또 그 십자가의 은혜와 권능을 온전하게 가르치지 않으면, 또 삶에서 그것을 누리며 사는 본을 보이지 않으면 목사의 외식이다.

잘 알고 있는 예화를 다시 들겠다. 마르틴 루터의 처가 까만 상복을 입고 집안일을 하고 있었다. 루터가 누구 장례식에 갔다 왔느냐고 물었다. 처는 하나님의 장례식에 갔다 왔다고 대답했다. 루터가 아니 하나님은 영원히 살아계시는 분인데 죽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야단쳤다. 그러자 처는 지금 당신이 하고 있는 모습이 꼭 하나님이 이 땅에 없는 것처럼 완전히 풀이 죽어있지 않느냐고 대답했다.

루터가 혼자서 종교개혁을 시도하면서 가톨릭의 온간 음해와 핍박에 시달리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그는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는 즉, 인간이 어떤 상황과 모습에 처해 있든 주님이 사랑한다는 바로 그 복음을 위해 종교개혁을 하고자 하면서 정작 자신은 그와 정반대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가 개독교라는 비난을 받고 예수쟁이들은 말만 앞선 위선자라고 욕을 먹고 있다. 그런 비방에 기가 죽을 필요가 없다. 기가 죽는 것이 오히려 신자의 위식이다. 정작 외식과 위선은 그들이 행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악한 줄 알면서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겉으로 감추려고만 든다. 우리는 최소한 내가 악한 사람이고 그 쌓인 악에서 악이 나온다고 고백했지 않는가? 안이 더럽고 추한데 겉으로 아닌 척 하는 것이 위선인데 우리는 안이 더럽다고 인정했지 않는가?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모셨으며 그분을 믿는다고 고백한 의미는 정말 귀하고 엄청난 것이다. 실제로 나의 이름이 하늘의 생명책에 올라가 있다. 내 삶과 인생이 땅에서 어떤 모습으로 결말지어져도 하늘의 놀라운 영광이 나를 위해 이미 예비 되어 있다. 이 땅에서도 예수님이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갖고 땅 끝까지 끝 날까지 나와 동행해주고 계신다. 그렇다면 무엇이 두려운가? 세상의 더럽고 추한 것들과 당당하게 왜 싸우지 못하는가?

주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신다면 왜 네가 아직 죄를 짓고 있느냐가 첫째로 하실 질문이 아니다. 틀림없이 “왜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살고 있느냐?” 혹은 “왜 내가 십자가에 죽지도,  사흘 만에 부활하지도 않은 것처럼 행동하고 있느냐?”고 먼저 물을 것이다. 신자들이 정말로 신자답게 살지 않는 것이, 또 교회 강대상에서 십자가 진리가 외쳐지지 않는 것이, 목사들부터 그분의 은혜와 권능으로 살고 있지 않는 것이, 이 시대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다. 그러니까 목사들에게 성적 금전적 스캔들이, 또 교회마다 목사와 장로들 사이에 혹은 교인들끼리 분쟁이 끊이지 않는 결과로 나타날 수밖에 더 있는가?    

예수님의 영광의 빛이 신자의 속에 넘치도록 채워져 있다. 그 빛은 세상의 어떤 것으로는 가릴 수 없다. 유일한 예외는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지 않는 신자 자신이다. 그것이 바로 신자의 진짜 외식이다. 그 외식을 막고자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성부 하나님께 대신 간구하신다. 신자로 외식하는 것을 막아서 세상의 죄악과 사탄과 사망의 세력과 당당히 맞서 싸워서 이기라고 말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와 권능을 아직 누리지도 알지도 못하다면 얍복강의 야곱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파고들며 씨름하여 제발 깨닫게 해달라고 매달려야 한다. 예수님을 정말 일대일로 만나고 싶다고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내 존재와 삶과 인생을 완전히 새롭게 바꿔 정말로 아름답고 선하며 진실하게 살고 싶으니 주님이 나의 주인이 되어달라고 자기 전부를 그분께 내어드려야 한다. 외식과 위선을 떨지 않고 정말 참 인간답게 살 수 있게 해주실 분은 예수님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