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설교

교회 중심의 삶은 하나님께 큰 죄다. (마23:23-24)

새벽지기1 2017. 2. 8. 07:28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소경 된 인도자여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마23:23,24)


십일조는 폐지되었는가?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네 번째 질책이다. 지난 세 번째 꾸중에서 맹세에 초점을 두고 해석하면 예수님의 정확한 의도를 알 수 없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본문도 십일조를 소경 된 인도의 또 다른 예로 들었다. 따라서 십일조에 대해서 잘못 가르친 내용은 당연히 살펴봐야 하지만, 주님이 그들을 소경이라고 부른 이유와 그런 가르침을 하는 그들의 숨은 동기를 따져봐야 한다.

우선 예수님은 분명히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했다. 간혹 복음이 율법을 대체했기에 율법에 규정된 십일조도 자동으로 폐기 되었다고 주장한다. 복음이 율법을 대체했다는 것은 인간의 자격과 능력과 공로가 구원의 조건이 결코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오직 흠이 없는 완전한 제물로 바쳐진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받아들이는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 자체에는 전혀 변화가 없다. 예수님이 율법에 내포된 하나님의 뜻인 의와 인과 신이 더 중요하게 지켜야 한다고 말씀하신 까닭이다.

아브라함이 가나안 최초의 전쟁에서 포로가 된 조카 롯을 구출해 오는 길에 살렘 왕 멜기세덱을 만났다.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해주자 아브라함은 그에게 십일조를 바쳤다.(창14:20) 시내 산에서 모세가 율법을 수여받기 약 600년 전의 사건이다. 율법과 함께 십일조가 폐지되었다는 것은 아예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

율법 이전에 족장들이, 어쩌면 그 훨씬 전부터도 십일조는 믿음의 사람들이 시행했었다.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 앞에 서서 경배해야 할 가장 근본적인 자세가 십일조의 방식으로 표출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십일조에는 크게 세 가지 뜻이 있다.  

첫째,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 왔기에 감사하는 것이다. 더 정확히는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며 자기는 잠시 맡아 관리하는 청지기에 불과하기에 원 주인에게 되돌려 준다는 것이다. 둘째, 자신의 삶이 돈에 의해 지배 받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받고 있다고 시인하는 것이다. 셋째, 그래서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전부를 드려 헌신하겠다는 고백이다.

십일조를 정확하게 가르치지 않거나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정직하게 시행하지 않는 것이 잘못이다. 십일조 자체가 용도 폐기 된 것은 아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야단치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십일조 품목 셋과 하나님 뜻 셋.

그들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까지 강조했다. 박하는 유월절에 먹는 쓴 나물의 양념으로 회당의 방향제로도 쓰였다. 회향은 미나리과 식물로 약품과 향료의 재료였다. 근채는 퀴미손이라는 식물로 그 열매로 양념과 약품으로 사용했다.

셋 다 양념과 향료다. 밀, 보리, 가축, 올리브, 포도 같은 필수 식품이 아니었다. 그것들이 없어도 일상생활에는 아무 지장이 없는 것들이었다. 이런 사소한 품목의 십일조도 꼼꼼히 챙겼다면 나머지 품목은 두말할 나위 없다. 여기까진 어쨌든 율법의 규정을 지킨 것이므로  문제가 없고 선한 일이다. 예수님도 그래서 이것도 행하라고 한 것이다.

문제는 의와 인과 신을 등한히 한 것이다. 주님은 십일조의 물품으로 셋을 든 것에 맞추어  십일조에 대한 하나님의 뜻도 셋을 열거했다. 더 중요하게는 미가 선지자가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하는 것이 세 가지라고 선포한(미6:8) 내용을 그대로 인용했다.  

먼저 의는 공의와 정의를 뜻하는데 법을 공평하게 집행하고 가난하고 비천한 신분의 사람을 학대 차별하지 않는 것이다. 인은 자비로 가난하고 곤경에 처한 이웃을 구제하며 섬기는 것이다. 신은 하나님을 잘 믿는 것보다는 사람들 사이의 신뢰와 신용을 말한다. 지난주에 사람끼리 맹세하면 위약보증금과 상관없이 잘 지키라고 가르친 것이 그 한 가지 예다. 인간관계에서 거짓과 사기가 없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며 맹세하지 않고도 순전히 믿을 수 있는 관계를 유지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가장 크고 중요한 두 강령이라고 가르쳤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마땅히 또 자연히 이웃을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신”으로 표현한 하나님의 세 번째 뜻을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실제 의미는 바로 이웃과 믿음과 사랑 안에서 동행하는 것이라고 예수님이 해석해준 것이다.

율법에도 십일조는 성전의 화목제 용도와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고아와 과부”(성경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자를 지칭하는 표현임)의 구제를 위해서 사용하라고 명시했다.(신14:23-29) 십일조의 두 가지 목적은 기업을 받지 못한 레위인의 생계 보전과 가난한 이웃의 구제다. 유대 지도자들은 자기들 먹고 살 것은 열심히 챙겼으나 불우 이웃은 외면했던 것이다.  

예수님이 십일조 물품으로 이 셋을 예로 든 것이 흥미롭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중요 이유 중의 하나는 인도의 후추와 카레 같은 향신료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너무 귀하고 맛이 있지만 중간 상인들이 폭리를 취하니까 스페인 여왕이 생산지와 직접 교역을 시도하려고 그의 모험을 후원한 것이다. 콜럼버스가 미국 마이애미 남부 카리브 해의 섬들에 도착해선 인도인줄 착각했기에 서인도 제도라는 이름이 붙게 된 것이다.

이는 주님 오신 후 1492년이 일이다. 그 때까지도 후추 같은 향신료는 왕족과 귀족의 전유물이었다. 일반 시민은 비싸서 사먹을 엄두도 못 내었고 기껏 소금으로 양념하는 것이 전부였다. 예수님 당대에 이 세 품목은 더더욱 사치품에 해당되었을 것이라는 뜻이다.

거기다 레위 인들이 농사를 지을 땅은 받지 못했어도 거주지와 그 주변의 채소를 경작할 밭은 분배 받았다. 곡물은 오래 보관해도 되지만 냉장고가 없던 시절이라 채소와 과일은 직접 재배해서 싱싱한 것을 먹으라는 배려였다. 따라서 레위인더러 기업을 분배 받지 못했기에 백성의 십일조를 받아 충당하라는 것은 곡물 같은 주식에 해당된다. 양념과 채소는 자기들이 재배할 수 있으니 십일조를 받을 필요가 없다. 그들은 엄밀히 말해 율법을 문자적으로도 어긴 셈이다.

약대는 삼키는 큰 죄

예수님이 결론으로 내린 말씀을 보라. “하루살이는 걸러내고 약대는 삼키는도다.”(24절) 하루살이는 가장 작은 곤충이라 포도주 통에 잘 빠져 죽는다. 종교적 용도로 포도주를 사용할 때에 헝겊이나 채로 걸러내는 관습이 있었다. 율법에 따르면 부정한 동물이므로 여기까진 좋다. 약대는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가장 큰 동물이다. 포도주 통에 빠질 리도 없고 설령 빠져도 못 볼 리가 없다. 상징적인 과장법으로 비유한 것이다. 약대는 되새김질은 하지만 굽이 갈라져 있지 않아 먹어선 안 되는 동물인 데도(레11:4) 삼켰다고 한다.  

따라서 유대 지도자들은 율법의 아주 세세한 규정들은 엄격하게 문자적으로 준행하라고 가르치고 감독하면서도 진짜로 중요한 하나님의 뜻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빤히 눈에 보여 알 수 있는데도 말이다.

그들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간 까닭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았기 때문임을 깨닫고 회개했다. 율법을 온전히 지키려 노력하는 중이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을 향해 계속 경고한 이유는 크게 둘이다. 첫째는 여호와 하나님과 우상을 함께 섬긴 혼합주의 신앙 때문이었다. 그에 대해 주님은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며 교인 하나를 얻어선 배나 더 지옥 자식으로 만든다고 이미 야단쳤다.(마23:15)

둘째는 유대 사회에 공평과 정의를 실현시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본문에서 주님은 의와 인과 신을 무시한다고 질책했다. 바벨론으로 잡혀가게 되었던, 그래서 진정으로 회개했던 바로 그 죄악으로 다시 빠져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자랑했고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태어났기에 교만하게도 하나님이 벌을 줄 리가 없다고 안심하고 큰소리치고 있었다.

이번에는 하나님이 바벨론의 채찍과 비교도 안 되는 로마의 전갈을 준비하고 계셨다. 로마 군대가 말을 타고 거룩한 성전에 직접 들어와 파괴했다. 모세의 십계명이 새겨진 거룩한 두 돌 판이 들어있는 언약궤가 탈취되었다. 율법에서 가장 부정하다고 여기는 돼지의 피로 지성소가 더럽히는 수모를 겪었다.  

하나님께 그런 큰 벌을 받게 된 그들의 잘못은 바로 구약성경을 자기들 편리한 대로 취사선택하여 가르치고 적용했기 때문이다. 자기들의 개인적 영달과 욕심을 채울 목적으로 그랬다. 문제는 그 가르침 자체는 전혀 틀린 것이 아니었다. 단지 본질에서 벗어났으며 핵심진리는 무시하고 가르치지 않았던 것이다. 둘 중의 하나만 가르치는 것은 엄격히 말해 거짓말이요 사기다.

비유를 하자면 초등학교 아이들을 한글과 구구셈은 가르치지 않고 계속해서 운동장에서 체육만 시킨 꼴이다. 체육을 시킨 것은 분명 잘못이 아니고 잘한 일이다. 그러나 몇 년이 지나도록 낫 놓고 기억 자도 모르면 엄청난 잘못을 범한 것이다. 학교 간판을 내리고 선생을 파면시켜야 한다. 아이들로선 선생이 시키니까 따를 수밖에 없다. 마냥 놀다보니 너무 신나고 재미있어 다른 생각을 할 수 없고 학교라는 곳이 원래 이런 곳인가 보다 오해하게 된다.

술과 담배를 끊지 못하는 것보다 더 큰 죄

불행하고 안타깝게도 이와 동일한 현상이 현대의 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다. 아주 쉬운 예로 술 담배 문제다. 완전히 끊지 못한 교인들을 믿음이 없거나 큰 죄를 지은 양 취급한다. 담배는 예수님 당시에 팔레스타인 지역에 없어서 구약성경에 언급조차 없다. 술은 제사장에 한해 독주를 마시지 못하도록 했다. 예수님은 술을 포도주로 만드는 기적을 베풀었고 자신도 포도주를 마셨다. 완전 금주는 나실인의 서약 기간에만 한정했다.

신약성경도 술에 취하지 말라고만 하지 마시지 말라고 하지 않았다. 그 이유로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엡5:18)고 했다. 술과 담배를 도덕적 종교적 죄로 매도할 성격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령의 충만함과 연결했으므로 영적 차원에서 접근하라는 것이다.

방탕이란 더럽고 부패한 죄를 범하며 음란한 행동을 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시간을 아끼지 않고 낭비하는 바람에 자기 직분에 충실하지 못하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방탕의 뜻이다. 불신자가 술 담배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인가? 현실의 고뇌와 우울과 분노 등을 잠재우려는 것이다. 신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얼마든지 평안을 얻을 수 있다. 또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의지하여 고난을 이겨낼 수 있지 않는가?

술과 담배는 하나님을 모르는 불신자들이 현실적 고난으로 너무 힘들어하니까 그 모습이 안타깝고 불쌍해서 고충을 누르라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다. 그러나 그 효과는 일시적일 뿐이다. 또 너무 과다하게 사용하지 말라고 중독의 부작용이 나타나게 했다.

신자는 술 담배 문제를 나쁜 행동이나 죄로 접근하지 말아야 한다. 그보다 그런 것에 빠져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과의 온전한 교통을 방해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만 믿고 의지할 수 있는데 자신이 문제를 해결하려 한 셈이다. 하나님의 권능을 세상의 힘으로 대체한 것이 잘못이다.    

대신에 신자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와 권능을 회상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것은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 무엇을 염려하며 고민할 필요가 있는가? 네 눈앞의 문제와 고난과 비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과연 어느 쪽이 더 큰지 곰곰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오해는 마셔야 한다. 술 담배를 마음껏 즐겨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세상 사람들도 웰빙을 생각해서 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나쁜 것인 줄 잘 안다. 신자가 그런 것을 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 강단에서 논하는 것 자체가 사실은 부질없는 일이다. 술 담배를 하지 말라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분명히 옳은 가르침이다. 그러나 신자가 왜 하지 말아야 하는지 성경적인 이유를 정확히 가르치지 않는 것이 문제다.

더 큰 문제는 아직 완전히 끊지 못하는 신자들을 아직 구원받지 못한 양 간주하고 열등한 교인으로 차별하는 것이다. 그 교인이 술 담배를 끊지 못한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더 큰 잘못이다. 믿음의 본질을 등한시하는 것이다. 십자가 복음의 풍성함, 아름다움, 참 진리 됨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니까 술 담배 하는 불신자에겐 내가 교회 출석했다간 죄인 취급당하겠다는 인식이 들게 만들어 아무 문제 삼지 않는 성당으로 가게 만든다. 참 복음이 전파되는 일을 나서서 훼방한 셈이다.    

더 큰 약대도 삼킨다.

이보다 더 큰 약대를 삼키는 일이 또 있다. 이곳 이민교회에서 쉽게 볼 수 있다. 교회의 행사나 모임이 너무 많다. 거의 일주일 내내 교회에 붙어살게끔 만든다. 그러면서 신자는 “교회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나도 틀린 말이 아니다. 긍정적 효과도 분명히 나타난다.

문제는 어쩌다 일이 있어서 몇 번 불참하면 믿음이 약하다고 경원시한다. 그러다 혹시 집안에 우환이라도 생기면 “봐라! 예배에 제대로 안 나오더니 하나님께 벌 받았다”고 뒤에서 수군댄다. 목사도 그런 방향으로 은연중에 가르친다. 그런데 교회에 365일 개근하다시피 한  집사가 중병이 걸리거나 사업에 실패하면 지금껏 남을 그렇게 비방한 터라 자기 고난을 털어놓지도 못한다. 자신의 모든 문제를 드러내어 함께 위로 권면 기도해주어야 할 사랑의 공동체가 종교적 형식과 위선의 틀에 묶이어 교회 본연의 일을 하지 못하는 결과까지 낳는다.

평일에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교회에 모이게 하는 의도는 어쨌든 믿음을 성숙케 하려는 선한 것이다. 그런데 교인들을 가만히 놓아두면 딴 짓을 하니까 차라리 교회에 모이게 하는 것이 낫다고 여기는 것은 참으로 가난하고 치사한 믿음이다.

그런데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쓴”(행2:46a) 본을 따르라고 강조한다. 성경 구절로 뒷받침하니까 아무도 반발하지 못한다. 성경은 원래 장절의 구분이 없었다. 반드시 죽 연결해서 읽고 해석해야 한다. 그들이 성전에만 모이려 힘쓴 것이 아니다.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었다.”(46b) 교회에 모인 결과가 일상적인 삶에서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거기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47절)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찬미하며 삶에서부터 자신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렸다. 당시 세대의 이방인들의 생활 방식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았다. 윤리적으로 하자가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며 어떤 고난도 이겨내었다.

그리고 십자가 복음을 전했다. 불신자들이 손 놓고 가만히 있는데 하나님이 갑자기 불현듯 구원해 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구원하길 기뻐하신다.(고전1:21) 신자들이 말로써 복음을 전했다. 무엇보다 그 살아가는 모습으로 불신자들로 영적 찔림을 받게 만들었다. 성령의 충만함이 초자연적 은사나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은 극히 일부다. 성령은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이 더 드러나게 하는 모습으로만 역사한다.    

초대 교회는 일주일 내내 성전에 모이지 않았다. 핍박을 받게 되자 모이기조차 너무 힘들어져 어쩌다 지하 공동묘지에 겨우 모일 수 있었다. 각종 사역 프로그램은커녕 신약성경도 아직 없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만 붙들었다. 나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에 자기도 연합하였다는 흔들림 없는 믿음 하나뿐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께 진정으로 항복했고 예수님을 진심으로 닮고 싶었으며 실제로 예수님이 가신 길을 그대로 따라갔다. 예수님만이 인생의 목적이요 소망이었다. 술과 담배를 하거나 모임에 빠지면 열등 교인이라고 매도하지 않았고 그런 인식조차 없었다. 함께 모여서 예수님 이야기만으로 지샜고 예수라는 이름만 들어도 서로 눈물을 흘렸다. 정말로 신약성경이 강조하는 대로 문자적으로 무엇을 먹든 마시든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만 살았다.
  
환난을 당해도 담대하라.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에 제자들에게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고 선포하셨다. 십자가에서 공중 권세 잡고 있는 사탄의 흑암 권세를 다 깨트리셨다. 신자들도 그 십자가 승리를 실제로 체험했고 삶의 모든 부분에서 그 승리에 참여했다. 어떤 고난과 핍박도 믿음으로 이겨냈다. 설령 목숨을 잃는 경우가 생겨도 이 땅의 장막이 무너지면 예수님이 먼저 가서 도저히 이 땅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하고 아름다운 하늘의 거처를 마련해 놓았음을 알았다.

스데반이 돌에 맞아 최초로 순교할 때에 하늘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빛을 보았고 또 그 빛이 자기 얼굴에 반사되었다. 그 얼굴에 비췬 빛을 본 모든 이들이 큰 충격을 받았고 경이롭게 여겼다. 그가 믿는 예수를 나도 알고 믿고 싶다는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지금껏 자기들의 인생이 갈급하고 공허하고 피폐했던 까닭이 십일조를 내지 않고 성전 모임에 결석했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이 자기 영혼에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임을 절감케 되었다.

신자는 자기의 전부 생명까지도 걸 수 있는 절대적 진리를 깨달았고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랑을 주시는 분을 만난 사람이다. 그래서 그분께 실제로 전적으로 헌신하며 살고 있는 자다. 온갖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교회에 묶어 두려고 시도하는 것은 죄송하지만 십자가 진리와 복음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에 대한 자신감이 없기 때문이다. 성령의 충만함이 인생을 얼마나 진실하며 아름답고 의롭게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의 살아 역사하는 말씀의 권능이 얼마나 오묘하며 광대한지 제대로 체험하지 못한 것이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도 이 땅에 종교는 흘러넘쳤다. 하나님이 제물에 배불렀고 그 냄새에 질렸을 정도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예수님이 일곱 번이나 외식한다고 꾸중할 수밖에 없었다. 주님은 종교의 틀을 과감히 깨트리고 참 생명을 불어 넣었다.

그런데 지금은 교회들이 신자들로 실제 삶에서 참 생명을 누리게 하기는커녕 거꾸로 그 생명을 종교의 틀에 다시 묶고 있다. 예수님이 깨트리신 것을 제자리로 되돌리고 있다. 교회 중심의 삶을 살라고 강조하다 못해 교회 건물 가까이 이사 오면 하나님께 복을 받는다고까지 가르치는 지경이다.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경이 그렇게 가르친 적은 결코 없다.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경말씀 중심으로 살라고만 했다.

모이지 말고 흩어져 이웃을 사랑하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고 그가 밟는 모든 땅을 차지하게 하겠다고 약속하셨다.(창13:17) 아브라함도 그 말씀을 받자마자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이르자 여호와를 위해 단을 쌓았다.(18절) 가는 곳마다 여호와께 제사 드리며 경배했다. 예수님도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땅 끝까지 흩어지라고 명하셨다.

하나님 중심이 교회 중심으로, 그것도 지역교회라는 종교조직체 중심으로, 나아가 목사 중심으로 변질되었다. 신자끼리 모여 뜨겁게 기도하여 고난과 문제만 해결되는 복을 받는 것으로 그친다. 이웃 사랑은 완전히 등한시 한다. 그러니 세상 사람들은 모든 잘못을 내 탓이라고 고백하면서 회개하고 사회악 개선에 적극 참여하는 천주교를 더 좋아한다. 제가 볼 때는 이단 중의 최고 이단을 참 종교라고 존경받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교회에 프로그램이 많아서 교인들을 다양하게 양육하는 것은 분명히 옳고 선한 일이다. 그러나 거의 교회에 묶어놓다시피 하면서 그것으로 그치면 초등학교에서 한글과 구구셈은 안 가르치고 체육만 시킨 꼴이다. 하나님이 신자를 향한 뜻은 의외로 간단하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를 받고 있다면 당신을 사랑하는 것과 똑같이 이웃도 사랑하라는 것이다.

신자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성령으로 거듭날 때에 실질적으로 완성된다. 예수님은 영단번의 완전한 제물로 바쳐졌다. 신자 또한 그분의 죽음과 부활에 연합했기에 영단번의 제물로 함께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다. 그 구원은 결코 최소 되지 않고 영원한 하늘의 영광은 보장되었다.

따라서 예수 믿고 난 이후에 할 일은 하나뿐이다. 바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웃 사랑을 실천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것도 간단하다. 이웃이 있는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이웃의 범위를 정확하게 정의 내려 주셨지 않는가? 당장의 도움이 필요한 자는 누구나 다 이웃이라고 말이다.

하나님은 이웃 사랑 안에 당신의 참 생명과 사랑을 놀랍고도 풍성하게 체험할 수 있게 해놓으셨다. 교회나 목사가 이웃 사랑을 등한히 하는 것은 신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과 은혜를 막는 일이다. 더 정확히 말해 인간이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쁨과 행복을 얻지 못하도록 하는 일이다.

일주일 중 하루는 분명히 거룩한 안식일로 지켜야 한다. 신자도 연약하여 죄에서 자유롭지 못한지라 세상에서 찌들고 넘어질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진리로 깨끗케 되고 참 생명으로 새 힘을 얻어 영혼이 소생되는 재충전을 해야 한다. 그리고 세상으로 진군해 나가야 한다. 나머지 6일 간은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빛을 드러내야 한다.

만약에 교회가 특별히 목회자가 이 일을 등한히 여긴다면 본문의 예수님의 저주가 반드시 임할 것이다. 목사는 교인을 교회에 가능한 많이 묶어두려 해선 안 된다. 한 명이라도 온전한 십자가군병으로 양성해 세상으로 내보내야 한다. 하나님은 그 한명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세상을 거룩하게 바꿀 수 있다.

히브리서 13:16의 말씀으로 결론을 맺자.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이웃 사랑을 제사, 그것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라고 표현했다. 성전에 모이지 않고 공적 예배의 절차가 전혀 없는데도 말이다. 주일 하루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삶의 현장은 엿새나 된다. 더 많은 시간을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대로 살아간다면 하나님이 더 기뻐하실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