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 있을찐저 회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外飾)과 불법이 가득하도다.”(아23:27-28)
정반대의 두 가지 접촉금지 명령
예수님이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일곱 번 질책한 말씀을 순서대로 살펴보고 있는 중으로 오늘은 그 여섯 번째이다. 안은 깨끗하지 않는데 겉만 깨끗한 척한다는 다섯 번째 꾸중과 동일한 맥락이지만 자세히 살피면 조금 더 확장 발전된 의미를 지녔음을 알 수 있다.
주님은 그들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했다. 예수님은 알다시피 아리마대 요셉의 가족 묘지에 묻혔다. 굴을 파고 그 안을 계단식 침대 구조로 만들어 시신을 눕힌 후에 입구는 돌로 막았다.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려낼 때에도 주님은 굴을 막고 있는 “돌을 옮겨 놓으라”(요11:39)고 명령했다.
이런 가족 묘지는 어지간한 재산이 있어야 가능했다. 입구를 돌로 막았기에 무덤인줄 알 수 있었다. 개인 소유의 땅 안에 있기에 가족이 아닌 일반인이 그 앞을 지나갈 필요가 없었다. 본문의 무덤은 길가나 들판에 평토장(平土葬)한 무덤을 말한다.
율법에선 시체와 뼈는 물론 무덤을 만져도 7일간 부정한 것으로 규정했다.(민19:16) 평토장 한 것을 사람이 모르고 밟고 지날 수 있다. 비가 많이 오거나 농지를 경작하다보면 흙이 벗겨져 뼈가 노출되어서 부지중에 접촉할 수도 있다. 그래서 반드시 회칠한 표지석을 세우도록 했다. 이는 무덤을 멋지게 치장하려는 것보다 지나가는 사람으로 무덤인 줄 알게 해서 피해가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한 것이 단순히 위선적이라는 차원을 넘어선다. 대단히 냉혹한 말씀이다. 회칠한 것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을 말한다. 사람들로 율법을 잘 지키도록 관리 감독하는 역할에는 충실했다는 것이다. 주님도 “아름답게 보인다”고 그 점을 인정해주었다.
무덤은 그들의 안으로 시체와 뼈가 가득하다고 했다. 다른 사람들은 시체와 접촉하지 말라고 가르쳐놓고 막상 본인들은 시체를 만져서 부정해진 정도가 아니라 아예 뼈와 시체 그 자체라고 했다. 무슨 뜻이 되는가? 유대 대중들이 접촉해선 안 되는 대상이라는 것이다. 백성들이 지도자들을 만나면 피해가라는 것이다.
요한복음 9장에 예수님이 안식일에 나면서 소경을 고쳐준 사건이 나온다. 공회에서 그 부모를 불러다 누가 고쳐주었는지 물었더니 그 부모가 아들이 장성한 어른이니 직접 물어보라고 대답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했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했기”(요9:22) 때문이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폭력 남편이나 성범죄 전과자들을 법원에서 접근금지 명령을 내리듯이 유대 백성들에게 예수님과 접촉하지 말라는 규정을 발효한 셈이다. 주님이 고난 주간 첫날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 백성들이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마21:9)라고, 메시아 그리스도의 별칭임, 열렬히 환영했다. 현행법을 위반했고 공권력을 완전히 무시한 셈이다.
세상 권력은 법을 제정해서라도 예수님과 그 추종자들을 유대 사회에서 추방하려고 시도했다. 반면에 주님은 도리어 그들이 하늘나라에서 쫓겨나 문 밖에서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선포한 것이다. 유대의 인간 지도자들은 종교적 정결을 위한 표지석을 무덤 위에 세우도록 했다.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이미 깨끗해졌기에 외부의 더러움만 피하면 된다는 뜻이었다. 반면에 주님은 하나님의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그들의 추하고 더러운 안을 깨끗하게 만들어줄 표지석으로 십자가를 골고다 언덕에 세웠다. 또 직접 그 십자가에 달리심으로써 모세의 놋 뱀처럼 당신께 진심으로 엎드리면 누구라도 그 더럽고 추함에서 건져주시기 위해서였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큰 착각
주님은 처음에는 유대 지도자들의 잘못된 가르침과 관습의 대표적 예 넷을 들었다. 다섯 번째 꾸중에선 그렇게 된 원인이 그들의 안이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 찼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래서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26절)고 회개를 촉구하셨다.
지금 여섯째 꾸중에선 그들을 회칠한 무덤이라고 했다. 끝까지 완악하게 회개하지 않아 그 안이 여전히 더럽고 추하다는 것이다. 본문에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이 자기들 안의 탐욕과 방탕을 제거하지 않은 이유를 밝혔다. “사람에게 옳게 보이려”(28절)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람에게 옳게 보이려 하니까 겉을 깨끗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한국 속담에 열 길 물의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의 속은 알 수 없다고 한다. 인간은 또 본성적으로 눈에 보이는 대로 일차적으로 판단하는 존재다. 유대 지도자들은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들 안을 보지 못하리라 판단했다. 더 정확히 말해선 그들은 자기들의 안과 겉이 다 깨끗하다고 착각했다. 또 사람에게 옳게 보이는 일은 하나님에게도 당연히 옳게 보이리라 오해했다.
예수님이 “사람에게 옳게 보이려” 한다는 설명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사람에게만 옳게 보이려 했다는 것이다. 만약에 하나님에게만 혹은 하나님에게도 옳게 보이려 했다면 그런 표현을 사용할 리가 없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에게 옳게 보이려 하지도 않았고, 하나님도 그들을 옳게 보지도 않았다는 뜻이다.
참으로 심각하게 숙고해야 할 말씀이 아닌가? 그들 스스로는 하나님 눈 밖에 나려고 시도는커녕 꿈도 꾸지 않았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길 가다 강도를 만나 거반 죽게 된 사람을 제사장과 레위인은 피해서 돌아가며 도와주지 않았다. 시체로 오인했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 정확한 원인을 성경이 설명하고 있지 않지만 어쨌든 그들은 그만큼 율법을 엄격히 지키려 노력했다.
무덤에 회칠하라는 가르침도 자기들의 탐욕과 방탕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다른 이로 법을 순종케 하는 선한 일이었다. 이것 외에도 분명히 선한 가르침들이 많았다. 그런데도 왜 예수님은 그들을 하나님께 옳게 보이려 하지 않았다고 하셨는가? 왜 하나님도 그들을 옳게 보지 않아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없다고까지 말씀하셨는가?(33절)
예수님이 질책하신 뜻
어떤 신학생이 만약에 아주 많은 돈이 생기면 무슨 일을 해보고 싶으냐는 질문을 받았다. 익명으로 아무도 모르게 고아원 같이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도와주고 싶다고 대답했다. 또 조금 망설인 후에 나중에 누군가가 내가 익명으로 선행한 주인공인줄 알아내서 세상에 널리 알려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기도 하다고 실토했다.
단순한 선행보다도 몇 배의 칭찬을 받고 싶다는 뜻이다. 겉으로는 사람에게 보상과 칭찬을 바라지 않고 자기 자랑도 하지 않으려고 익명으로 선행을 하는 아주 아름다운 모습을 보였다. 그 안에는 자기를 높이려는 치사함과 교만함의 극치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 인간의 실상이다.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이런 썩고 썩은 마음이다. 겉만 깨끗하게 한다고 해서 인간이 절대 깨끗해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26절에서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고 했다. 그럼 “그 후에 겉도 깨끗이 하라”고 해야 논리적으로 합당한 흐름이다. 그러지 않고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고 말씀하셨다. 겉은 능동적 우선적으로 깨끗이 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겉을 바꾸는 도덕적 종교적 회개(悔改)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그 안인 마음 자체가 깨끗이 되도록 회심(回心)하는 것에 주력하라는 뜻이다.
주님의 말씀을 심각하게 숙고해야 하는 이유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이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계명이 바로 쉐마이지 않는가?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신6:5)
그들은 자기 쪽의 열심과 의지와 능력을 총동원하여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려 했다. 말하자면 하나님에게 옳게 보이려 무진장 노력했다. 문제는 하나님에게 잘 보여야 하니까 자기들 겉을 깨끗케 하는 결과만 낳았다. 또 겉을 깨끗이 하려니까 항상 어떤 일을 행하는 모습을 띌 수밖에 없었다. 도덕적 종교적 열심과 헌신과 정성이 반드시 외적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데만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지금 주님이 질책하신 뜻은 그 대신 안을 먼저 하나님의 진실함과 선함과 아름다움으로 채우라는 것이다. 하나님께로만 온 것으로 채워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실제적, 체험적, 개인적, 인격적 관계가 없으면 결코 안이 깨끗해질 수 없다는 점을 온전히 인식하라는 것이다. 인간의 안은 스스로는 선하게 바꿀 수 없을 만큼 철저히 타락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안이 깨끗해지는데도 유대 지도자들은 그런 체험도 인식도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께 빈 손으로 나가야 한다.
바꿔 말해 인간은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수만 명이 출석하는 교회로 성장시켰어도, 정말로 보상을 바라지 않고 은밀히 많은 선행을 했어도, 말씀과 기도로 매일 아침을 은혜롭게 시작해도, 사람들 앞에 자기를 높여서 잘 보이려고 전혀 시도하지 않았어도, 하나님 앞에 설 때는 정말로 빈 손으로 나와야 한다.
하나님을 알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는 뜻이 무엇인가? 예수를 믿기 전과는 전혀 다른 의도와 의미와 가치를 갖고서 선행을 하게 되었다는 그 자체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은혜임을 알게 된 것이다. 성경 말씀을 읽으며 내 영혼을 깨끗케 하고 또 나의 모든 앞날을 주님이 선하신 인도에 완전히 내어맡기려 기도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세상이 줄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이 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의 은혜를 알고 그분의 사랑의 품 안에 거하면서 그 받은 사랑을 주위에 나누며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 인생의 가장 큰 소망과 보람이 된 것이다.
또 그 모든 것들은 오직 하나님께 받은 것임을 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 실제로 그 받은 것을 누리며 살아야 한다. 아주 무능한 아들을 둔 아버지가 아들에게 좋은 직장도 잡아주고 결혼도 시켜주고 큰 집도 사주고 생활비마저 대주었다고 하자. 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가 큰 집을 샀고 좋은 직장에 다니며 예쁜 아내를 얻었다고, 어쨌든 행위의 주체는 자기니까, 자랑할 수 있겠는가? 그럼 너무 우스꽝스럽다 못해 바보 같은 짓 아닌가? 아버지에게 단순히 보고만 하면 된다. 아니 보고조차 할 필요 없다. 아버지가 모든 것을 마련해주었기에 이미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나갈 때는 아무리 믿음이 좋고 신령한 신자라도 진정으로 낮아져서 순전한 감사와 찬양과 경배만 드려야 한다. 아니 그럴 수 있는 자라야 정말로 경건한 자다. 요컨대 신자가 겉으로 행동으로 나타내야 할 것은 하나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죽으라면 죽는 것이다. 또 살라고 하면 사는 것이다. 현실에서 형통을 하던 실패를 하던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겨야 한다.
특별히 도무지 이해도 안 되고 견디기 힘든 문제와 상처와 환난 중에 있을 때에 그래야 한다. 전혀 변함없고 한 치의 가감(加減)도 없기에 영원토록 썩지 않고 놀랍도록 오묘한 모습으로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사랑을 고난 가운데서 발견해 낼 줄 알아야 한다. 최소한 그렇다는 사실이라도 확실히 알아야 한다. 그래서 기독교에선 세상 사람이나 다른 종교와는 달리 범사에 감사하라, 항상 기뻐하라는 불합리한 명령을 하는 것이다. 실은 명령이 아니라 그분의 약속이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하면 그분이 그렇게 될 수 있게 해주신다.
예수님이 26절에 말씀하신 방식을 빌려서 표현하면 이렇다. 먼저 안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그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으로 충만하게 채워라. 그리하면 겉으로 네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리라.
유대인이 신앙의 금과옥조로 여기는 쉐마의 내용도 사실은 이와 동일하다. 하나님을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 사랑하라는 것은 겉을 깨끗케 하는 일에 해당된다. 그 앞에 안을 깨끗케 하라는 말씀이 나온다.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신6:4) 모든 선한 것은 오직 하나이신 하나님 그분께로 온다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사랑으로 먼저 안을 채우라는 것이다. 유대 지도자들이 실패한 첫째 원인이 바로 이 쉐마의 앞부분은 무시하고 뒷부분만 열심히 자기 힘으로 이루려 했던 것이다.
예수님 오시기 전 유대의 영적 상황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 땅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말라기 선지자가 BC 450 년경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한다는 하나님의 한탄을 전한 후에 실제로 하나님의 계시가 끊겼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직접 대면이 일어나지 않았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사랑이 실종되었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더러운 떡, 토색한 물건, 저는 것, 병든 것을 바치고는 도리어 하나님이 복을 주지 않는다고 의심 불만 불평하는 상황이 주님 오실 때까지 450 년간이나 이어졌다.
그런데 말라기의 예언 바로 6년 전 BC 444 년경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는가? 놀랍게도 바벨론 포로 귀환한 후에 성전과 성벽을 재건한 후에 하나님께 봉헌하는 의식을 거행했다. 유대인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까닭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고 율법대로 살지 않았으며 우상을 숭배한 죄 때문이라고 절감하고 영적 부흥을 이루려한 것이다.
느헤미야 8장에 보면 학사 에스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자 백성이 전부 일어나 아멘으로 화답했고 심지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울었다.(느8:9) 그런 영적 부흥회가 3주 이상 지속되었고 24일 째는 금식 기도회까지 열었다.
말라기 선지자가 예언한 시기에 조금의 편차는 있겠지만 학계에서 인정하는 년대로는 겨우 만 6년 만에 이스라엘은 영적으로 완전히 부패해진 것이다. 그 까닭은 오직 하나다.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을 열심을 다해 사랑했다. 하나님에게 옳게 보이려고 성전과 성벽을 화려하고도 장엄하게 지어서 그분께 봉헌했다. 겉으로 하나님의 일을 아름답고 깨끗하게 행했다.
그럼 하나님으로부터 반대급부로 보상이 당연히 따라올 줄 기대했다. 그러나 현실의 삶은 이전보다 나아진 것 없이 여전히 피폐하니까 자신의 겉이라도 자기 힘으로 풍성하게 꾸미려 든 것이다.
하나님이 막상 그들에게 바라고 그들로부터 보고 싶었던 모습은 무엇인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는 그런 큰 징계를 70년이나 겪었으니까 이제는 당신께로 완전한 빈 손으로 나오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시온에 다시 모여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찬양과 감사와 경배를 드릴 수 있게 된 것 자체가 세상에서 최고, 아니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은혜요 축복임을 깨닫기를 하나님은 원했었다.
그래서 성전 예배를 마치고 돌아갈 때도 빈 손으로 돌아가는 모습까지 보시길 원했던 것이다. 세상에서 최고 아니 비교할 수 없는 은혜를 받았는데 또 더 받아야 할 무엇이 남아 있는가 말이다. 유대인들은 성전에 나올 때에 도덕적 종교적 업적을 잔뜩 손에 들고 왔으니 돌아갈 때는 현실의 형통과 출세를 가득 채워서 가려했다. 주님은 바로 그런 마음을 분문에서 시체와 뼈가 가득한 무덤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려 하지 말라.
유대인들이 그 큰 영적 부흥을 이루고선 어떻게 단 6년 만에 타락할 수 있는지 그들만 탓할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그들을 비난할 자격이 전혀 되지 않는다. 크리스천 속담 격으로 “예수 믿은 처음 3년은 기도 응답이 잘 된다”고 흔히 말한다. 그럼 3년 후부턴 기도 응답이 잘 안 된다는 뜻이다.
처음 예수를 믿은 자에게는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신자의 범사를 세밀하게 돌보신다는 사실을 완전히 알게 해줄 필요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고 계신다는 것은 3년의 응답으로 충분히 알 수 있다. 그 후로는 하나님이 정말로 원하는 모습으로 바뀌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도록 계속 자라야 한다. 이웃을 자기 몸같이 사랑해야 한다. 땅 끝까지 가면서 십자가 복음의 은혜를 나누어야 한다.
그 일은 등한히 하고 계속해서 처음 3년처럼 자신의 형통과 안일만을 위해서 기도하니까 하나님이 응답해주실 리가 있겠는가? 그런데도 신자들은 오히려 내가 그만큼 기도하고 봉사하고 헌금을 많이 했는데도 왜 아직도 이 모양 이 꼴인가 그저 불평하기 바쁘다. 도덕적 종교적 일에 겉으로 많은 실적을 쌓았다는 것이다. 순전히 자기 자랑뿐이다.
하나님께 완전한 빈 손으로 나오지 않은 것이다. 그렇게 된 까닭은 그 자신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앞에 완전히 빈 손이 되어본 체험이 없기 때문이다. 성령의 간섭으로 자신의 더러운 안이 깨끗이 씻어진 적이 없다. 자신은 하나님 앞에 빈 손으로 설 수밖에 없는 무익한 존재임을 절감하지 못했기에 항상 빈 손이 아닌 뭔가를 들고 나와서 반대급부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6년이 걸렸지만 우리는 그 반인 기껏 3년 만에 성전 문이 닫혀버렸다. 기도 응답이 안 된다는 것이 바로 그런 뜻이지 않는가?
신자라면 하나님을 정말로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 엄격히 말하면 사실은 그렇게 사랑하려 하지 않아도 된다. 요한 사도가 어떻게 선언했는가?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4:10)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려 한 적이 없다. 아니 믿으려고도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 정반대편에 서서 세상을 사랑하고 내 힘만 믿었다. 나 외에는 어느 누구도 좋아하지 않았으며 세상 어떤 것이라도, 심지어 하나님이라도 나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다. 내 영혼은 하나님과 등을 지고서 아무 이유 없이 예수를 싫어했다. 그런 나를 성령이 간섭하여 아무 이유 없이 예수가 좋아지게 된 것이다. 또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왜 그렇게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도 도무지 알지 못했다.
아무 이유 없이 믿게 되었다는 것은 지정의로 분석해서 믿은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영을 내 영에 부어주셔서 영과 영이 교통하게 되었고 내 안을 그분의 영으로 깨끗케 해준 것이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인간 스스로 자기를 고치고 변화시켜서 바치려고 자기 힘으로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목적이다. 기독교는 그 반대다. 예수님은 죄와 사탄과 사망의 세력에 묶이어 자신을 더럽고 추한 탐욕과 방탕에 방임하여 그 안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인간들이 너무나 불쌍해서 구원해주러 하늘에서 내려오셨다. 흑암에 파묻혀 있던 자들을 빛의 나라로 그분이 옮겨주셨다.
기독교 신앙의 올바른 출발.
따라서 기독교 신앙은 다윗이 시편139편에서 고백한 내용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다는 것이다. 나의 앉고 일어섬과 혀의 말과 마음의 생각까지 통촉하시어 알지 못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고백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결심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나 개인을 속속들이 아시고, 그것도 태초부터 예정하여 택하시고, 당신의 완전하고 거룩한 계획 가운데서, 지금부터 영원까지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십자가 예수님의 대속 죽음과 그 구원의 진리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일대일 인격적으로 대면하고 그 사랑 앞에 완전히 항복하는 것이다. 그랬기에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나도 필연적으로 또 자연적으로 나도 그분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다윗은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다”(시139:6)고 고백했다. 하나님이 나를 알고 있고 사랑하는 그분의 나에 대한 지식이 가장 오묘할 뿐 아니라, 그분이 나를 그렇게 사랑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성령을 통해 나로 알게 해준 것과 그런 은혜를 알게 된 나의 지식 또한 너무나 기이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우리 모두 너무 좋아하는 시편23편에서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나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23:5) 원수의 목전이라는 것은 당장 죽을 지경에 이른 곤경이다. 그 때 주님이 상을 베풀었다고 한다. 보상 축복의 상(賞)이 아니라 테이블을 뜻하는 상(床)이다. 그런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 순전한 감사와 경배를 드릴 수 있는 믿음과 소망을 ‘주께서’ 자기 마음에 심어주었다는 것이다.
유대 지도자들은 오직 사람들에게만 옳게 보이려 했다. 다른 이들 앞에서 자기 잘난 것만 증명하려 한 것이다. 어느 누구보다 위에 올라가 자기가 가장 잘나고 옳아야만 했다. 아무리 경건하고 신령한 도덕적 종교적 명분을 앞세우고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총동원했어도 불행하게도 하나님 앞에 단 한 번도 빈손으로 나간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으로선 그들을 외면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창하고 화려하게 치장을 했어도 자기 잘난 것을 증명하려는 시도는, 아담이 하나님을 배제하고 자기가 이 땅과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려했던 원죄에서 하나 나아진 것이 없다. 잘 봐주어야 변질된 모습의 또 다른 원죄일 뿐이다. 그러니 지옥의 판결을 도무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현대 기독교의 가장 큰 잘못
현대의 목회자와 신자의 가장 큰 잘못이 단순히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열심과 정성이 모자라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런 사랑은 더 뜨겁고도 강하게 흘러넘친다. 요한 사도와 다윗과 같은 고백이 없어진 것이다. 내가, 우리 교회가 하나님을 이만큼이나 사랑하고 있으니 하나님도 그에 걸맞게 사랑을 겉으로 나타내 달라고 요구한다.
목사도 자꾸 하나님을 사랑하는 모습을 겉으로 드러내라고 가르치고 독려한다. 교회 중심으로만 모이라고 한다. 쉐마의 둘째 구절만 강조하고 더 중요한 첫째 구절은 등한시한 유대 지도자들의 잘못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오직 하나인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가르치지 않는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퇴색되고 있다. 예수님이 교회와 신자의 진짜 머리가 되어있이 않다. 성령의 충만한 임재와 인도만을 구하고 있지 않다.
대신에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 빈 손으로 나오지 말라고만 강조한다. 언뜻 들으면, 아니 실제로도 아주 아름다운 가르침이요 신자가 행해야 할 모습이다. 그러나 그 손에 순전하고 진정한 감사와 찬양과 경배로만 채워서 들고 나아와 함에도 교회가 목사가 원하는 겉으로 드러난 종교적 업적과 행사만 들고 나오라고 한다.
거기다 빈 손으로 나오지 않았으니 하나님이 절대로 빈 손으로 돌려보내지 않는다고 또 다른 잘못된 가르침을 반복한다. 신자들이 그 가르침대로 열심히 따랐는데도 실제로 받은 것이 없고 삶이 나아지는 모습이 보이지 않자 신앙생활에 힘이 빠진다. 믿음으로 승리하기는커녕 실패한 것처럼 여기게 된다. 십자가 복음으로 승리하는 기쁨을 맛보지 못하는 변질된 믿음만 형식적으로 붙들고 있다. 교회 안에서부터 승리를 누리지 못하니 교회 밖에서 기독교를 올바로 볼 리가 없지 않는가?
예수를 믿어 신자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 빈 손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절감했기에 언제나 그분께 빈 손으로 나오고 또 빈 손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십자가 대속의 죽음을 통해 나를 구원해주시고 그 은혜 가운데 살게 해주시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기쁨이요 행복임을 알기 때문이다. 최고의 것을 이미 다 받았으니 더 받을 것이 없음도 알기 때문이다.
신자의 겉모습이 아무리 세상에서 실패했어도 실망하고 염려할 이유는 하나도 없다. 진정으로 하나님 앞으로 빈손으로 나오되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만은 절대 놓지 않는 신자는 하나님도 절대로 그대로 두지 않는다. 당신만의 절대적이고 영원한 계획에 따라 당신의 때와 장소에서 당신만의 방식으로 당신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반드시 이끄실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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