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 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15:20-26)
당신의 버킷리스트 1위는?
최근 버킷리스트(Bucket List)란 말이 많은 사람들의 화두(話頭)가 되고 있다. “Kick the Bucket”이라는 영어 숙어에서 유래된 말이다. 자살하는 사람이 양동이를 발밑에 딛고 서있다 오랏줄을 목에 건 후에 발로 양동이를 차면 죽게 된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는 행동이라는 뜻이다.
버킷리스트는 그래서 죽기 전에 꼭 해보고 싶은 일을 적은 목록이다. 가보고 싶은 여행지, 먹고 싶은 음식, 읽어야 할 책 등을 관련 기관이나 매체에서 열 개 혹은 백 개씩 선정해 발표한다. 사람들은 그 리스트대로 따라 하기를 즐긴다. 이런 시사상식을 모르는 사람들도 개인적인 필생의 소망은 몇 가지씩 갖고 있다.
신자도 신앙생활을 하며 이루고 싶은 일들이 있다. 예컨대 천국 가기 전까지 성경통독 100회 하겠다, 40일 금식을 해보고 싶다, 노후에 아프리카 선교를 가거나, 평생 모은 돈을 사회에 기부하여 장애인 센터를 건립하고 싶다는 등의 일생의 소망을 품는다. 그리 거창하지 않아도 주일학교 교사나 중보기도 모임 인도자가 되고 싶다는 소박한 꿈도 꾼다.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모든 신자의 버킷리스트에 첫째로 오를 항목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육신이 부활되는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26절)이라고 했지 않는가?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가 부활이라는 뜻이다.
그럼 당장 두 가지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우선 예수님의 재림은 언제일지 모르는 먼 장래의 일이다. 또 육신의 부활은 신자가 계획, 준비, 노력, 달성할 성격이 아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죽기 전에 이뤄야 할 리스트와 무관한 것 같다. 결코 그렇지 않다.
버킷리스트를 다 이뤘다면?
금주에 한국 TV에서 남미 볼리비아의 우유니 사막을 소개하는 여행 프로그램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해발 약 3,500 미터 고원에 끝도 없이 평평하게 펼쳐진 사막에 새하얀 소금 가루가 깔려 있는 곳이다. 세계 모든 여행가들의 버킷리스트에 으뜸으로 손꼽히는 곳이다.
봄철 우기에 비가 바닥에 조금 깔릴 정도로 오면 그 물이 하늘을 완벽하게 반사해서 하늘과 땅의 경계가 없어진 것 같은 착시 효과가 생긴다. 그 사막 위에 서있는 자는 하늘에 올라 붕붕 떠다니는 것 같은 신비한 체험을 할 수 있다고 한다. TV 화면으로만 보아도 너무 아름답고 신비로워서 죽기 전에 한 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였다.
그런데 만약 버킷리스트 백 가지 모두를 완벽하게 성취한 후의 기분은 과연 어떨까? 분명히 큰 보람과 성취감과 기쁨이 생길 것이다. 문제는 그 즐거움이 오래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차츰 허전한 느낌이 조금씩 밀려들어오다가 결국에는 처음 느꼈던 희열보다 더 큰 공허감이 엄습하지 않겠는가? 축구광이 월드컵 기간 내내 열광하다가 끝나면 이제 무슨 재미로 살아가지 한탄하듯이 말이다. 버킷리스트라는 용어 자체도 의미심장하다. 문자 그대로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들이니까 다 하고나면 남은 것은 죽는 일뿐이지 않는가?
지금 인간의 욕심이 끝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뜻이 아니다. 사람이 더 좋은 것, 더 큰 기쁨과 만족과 행복을 추구하려는 것이 나쁘거나 죄는 결코 아니다. 그런 욕심이 없다면 인간의 성장과 발전은 없다. 모든 생명체가 갖는 본성이다. 그런 욕심이 있기에 성장할 수 있다. 버킷리스트를 작성하는 것은 물론 달성 후에 공허감이 생기는 것 둘 다 그 생명력이 활발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다.
버킷리스트를 달성한 후에 실망감이 생기는 것은 리스트의 항목을 잘못 선정했기 때문이다. 모든 버킷리스트가 세상에서 이룰 일이다. 또 모든 세상일은 유한하다. 썩어 없어지지 않는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없다. 자기가 달성하고자 하는 소망과 목표가 아무리 선하고 아름답고 진실한 것이라도 그 일 자체가 일시적이기에 그것으로 누리는 기쁨도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 인간의 탐욕 때문만이 아니다.
밑이 터진 웅덩이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실상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지만, 두 가지 결정적 잘못을 저질렀다고 선포했다. “생수의 근원되는 하나님을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하지 못할 터진 웅덩이.”(렘2:13)라고 했다.
웅덩이를 파는 것은 생수를 얻어 담아두려는 시도이기에 전혀 잘못이 아니다. 오히려 선한 일이다. 버킷 리스트를 하나씩 성취하려고 노력하며 더 큰 기쁨을 얻으려는 것은 분명히 의미가 있다. 달성한 후에 공허감이 생겨 또 다른 시도를 하는 것도 욕심이 과한 것이라기보다 여전히 생수가 갈급하다는 반증이다. 잘못은 자기들이 파고 있는 웅덩이가 밑이 터진 줄을 모르는 것이다. 또 그렇게 된 까닭도 생수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을 배제한 채 인간 혼자 스스로 시도했기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우유니 사막을 소개한 담당 PD가 본인은 구체적으로 인식하지 못했겠지만 목사인 제가 듣기에는 예레미야 선지자와 비슷한 고백을 했다. 그날 밤 멀리 떨어진 숙소에서 사막을 바라보니 하늘의 별들이 호수에 반영되었다. 그 수많은 별들이 땅에 쏟아져 내려온 것 같은 장엄한 광경이 낮에 보았던 풍경과 체험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오묘해서 계속 넋을 잃고 보았다고 했다.
제 나름대로 그 의미를 분석해보았다. 한국에서 30시간이나 비행기를 타고 와선 사막까지 자동차로 일박이일의 여행을 했다. 낮에는 우선 자기 계획대로 달성했다는 성취감부터 느꼈을 것이다. 또 땅과 하늘의 경계가 무너져 자신이 하늘에 올라간 것 같은 감격도 누렸다. 그러나 지구라는 시공간의 틀 안에서 자기 노력으로 얻었고 인간의 자의식만으로 인식된 기쁨이었다.
반면에 밤에는 낮에 햇빛에 가려 보이지 않던 별들이 일시에 나타났다. 사막 위에 쏟아져 내린 것은 지구라는 울타리가 무너진 셈이다. 인간이 속한 시공간을 넘어 우주 전체가 자기 속에 충만하게 채워져 들어옴을 느꼈다. 그와 동시에 그 광대한 우주에 비해 자기는 너무나 미약한 존재임을 절감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씀에 비추면 낮에 자기가 하늘에 오른 것 같은 감격은 스스로 웅덩이에 판 것에 해당된다. 물을 저축할 수는 없어도 잠시 담겼다가 빠져나가는 동안에 일시적 갈증은 해소는 된다. 반면에 밤에는 자연과 지구를 넘어 전 우주 속에 자신이 완전히 파묻혔다. 자기가 계획하고 기대했던 일이 아니며 스스로의 노력과 수고도 전무했다.
그분이 크리스천인지 알 수 없지만, 그는 전 우주를 지으시고 통치하시는 창조주이자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품 안에 잠겼던 것이다. 진짜로 잊을 수 없는 체험을 한 것이다. 인간이 자의적 노력으로 쟁취한 감격과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그분의 경이는 도무지 비교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인간의 태생적 한계
다른 모든 피조물과는 달리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게 지어졌다. 하나님 대신에 이 땅을 거룩하고 아름답게 다스리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신 후에 당신의 영을 직접 코에 불어 넣어주셔서 생령(生靈)이 되었다. 인간이 하나님의 영을 공급받지 못하면 죽을 영이 된다. 육신적으로 살아있을지라도 죽은 것과 다름없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해도 그 기쁨이 잠시뿐인 것이다.
4, 5세기에 살았던 성 어거스틴은 젊었을 때에는 천하의 난봉꾼으로 방탕하기로 유명했다. 긍정적으로 표현하면 당시의 버킷리스트를 다 달성했던 자다. 그랬던 그가 어떻게 고백했는가?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찾기 전까지는 어떤 인간도 평강을 누릴 수 없다고 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인간이 더 큰 기쁨을 추구하는 자체는 결코 나쁘지 않다. 하나님을 배제한 채로는 어떤 기쁨도 온전하고 영원한 기쁨이 될 수 없다는 것이 인간의 태생적 본성이자 한계라는 것이다. 더 큰 불행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예의 그 PD가 자기 입으로 시인한 것처럼 그 사실을 알고는 있는데 영적으로 무지해 온전히 분별하지 못하고 하나님을 끝까지 완악하게 부인한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어리석고 불쌍한 처지인가? 버킷리스트만 해도 열심히 달성한다는 것은 역으로 말해 죽음을 향해 걸어간다는 뜻이다. 죽기 전에 이룰 일이므로 빨리 죽으려는 셈이지 않는가? 기쁨을 더 추구하는 욕심이 생명력의 증거라고 했지만, 그 생명력의 실상도 날로 죽어가는 것이다. 즉 삶과 죽음을 주관하는 하나님께로 향해 가는 것이다. 이는 모든 세대 모든 인간이 알 수 있는 사실이자 진리이자 상식이다. 그런데도 죽어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한국에도 아주 좋은 예가 있다. 알다시피 삼성의 고 이병철 회장이다. 인간 세상의 버킷리스트로 따지면 이 분만큼 다 이룬 자도 없다. 죽음을 맞이하게 되자 24가지 질문 리스트를 작성했다. 시공간을 초월한 영원을 주제로 하여 인간의 삶과 죽음에 관한 본질이 궁금해진 것이다. 지구라는 틀 안에서는 풍광 좋은 여행지나 하고 싶은 일을 다 이룬 분이다. 그가 이제 영원을 향해 가는 자기 영혼의 여행에 관한 버킷리스트를 작성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분은 세상을 창조한 구약의 하나님부터 믿지 못했다. 그 하나님이 죄 중에 빠져 인간 스스로 밑이 터진 웅덩이를 파면서 평생토록 갈증에 시달리는 모습을 너무나 안타까이 여겼다는 사실은 더더욱 몰랐다. 그 불쌍한 인간을 구원한 독생자 예수의 십자가 사랑은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죽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전부를 바쳐서 죽어도 좋은, 그렇게 바칠만한 절대적 진리를 얻으려 시도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가 빠졌기에 아무리 해도 해답을 얻을 수 없었다. 영원을 향한 영혼의 버킷리스트마저 성령 하나님의 인도를 구하지 않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달성하려니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최근에 버킷리스트가 화두가 되는 까닭이 무엇인가? 웰빙(well being)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이전에는 먹고 사는 일 즉, 생존이 급선무였다. 한국이 이제 최소한 굶어 죽지는 않게 되자 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너무나 아이러니하게 버킷리스트를 다 성취하면 더 큰 절망이 생기지 않는가?
버킷리스트는 인간이 달성할 수 있는 최고치, 최대치의 한계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 리스트를 다 이루면 분명히 이 세상에선 최고의 감동과 즐거움을 얻는다. 지상 최고의 풍경과 맛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지구라는 틀과 인간의 태생적 한계는 벗어날 수 없다. 파스칼은 모든 인간의 내면에 하나님이 아니고는 채워질 수 없는 빈 공간이 있다고 했다.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한계는 하나님을 부인하고는 절대 극복할 수 없다는 뜻이다.
기독교를 외면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천국과 지옥, 구원과 심판을 가르는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인간이 스스로 자기 인생을 평가해 봐도 완전한 만족을 결코 얻을 수 없었다고 시인하는 셈이다. 불신자의 입장에서 보면 버킷리스트를 다 달성하는 자가 제일 부럽고 그 인생의 평가도 100점을 주지 않는가? 그러나 막상 그 리스트를 다 이룬 자는 죽음 밖에 남지 않았다고 실토한다면 실질적 의미에서 열심히 살고 있어도 죽은 것이지 않는가?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그 인간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선포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신자에게 있다.
문제는 예수 믿는 신자에게 더 많다. 성경통독을 백회 하거나, 평생 모은 돈으로 홈리스 센터를 건립한 후에도 불신자보다 더 큰 잘못을 범할 수 있다. 성경은 오직 예수라는 열쇠로 해석해야 하고, 신자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해도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한다.
그런데 얼마든지 예수님을 배제한 채 자신의 의지력만으로 그 일을 달성할 수 있다. 예수님을 드러내기보다 그 업적이나 일을 달성하는 것 자체를 목표로 삼을 수 있다. 그럼 자기 자랑과 자신의 인간적 의밖에 남지 않는다.
불신자들은 공허감이 생기면 또 다른 리스트를 달성하려 노력이라도 한다. 신자는 그 하나 이룬 것이 훈장이 되어 평생 어깨에 붙어 다닌다. 오직 십자가의 사랑으로 서로 죽기까지 섬겨야 할 영적 공동체 안에서조차 도덕적 선행과 종교적 경건으로 사람의 등급을 매기고 차별한다. 그런 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화 있을찐저!”라고 일곱 번이나 야단치셨다. 지금도 그런 바리새인들과 비슷한 행태가 교회 안에서 성행하고 있다.
교회에서까지 행세깨나 하려는 자들은 예수님이 상대조차 않으신다. 그런 사실도 모르고 설치는 자들은 너무나 어리석고 불쌍할 뿐이다. 그런 뻔한 잘못을 범하지 않는 겸손한 신자들에게도 어쩜 더 큰 잘못이 있다.
서두에 예수님 재림할 때의 육신의 부활이 신앙의 궁극적 목표라고 했다. 사실은 틀린 말이다. 목표란 현재로선 달성될지 안 될지 모르는 상태이고 또 달성되어야만 기쁨이 생긴다는 뜻을 내포한다. 신자에게 육신의 부활은 목표가 아니라 종착지다. 이미 확고하게 보장되어 있다.
성령의 간섭으로 그 인생이 뒤집어져서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자는 영생을 이미 얻은 것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17:3)고 했다. 예수님의 십자가 진리를 알아 그 은혜에 진심으로 항복한 자는 영생을 갖고 있다. 예수 믿은 후에는 그 영생의 삶은 출발했다, 영생 안에, 부활 안에 살고 있는 것이다.
비유컨대 처음 예수님을 영접할 때는 디즈니랜드 입장권을 산 것과 같다. 그 이후의 삶은 디즈니랜드 안에 들어와서 온갖 놀이기구를 타고 즐기는 중인 셈이다. 각각의 놀이기구가 주는 스릴과 재미는 서로 달라도 무엇을 타도 신나고 즐겁다. 부활을 목표로 하는 신앙은 여전히 디즈니랜드를 찾아가고 있지 아직 입장한 것이 아닌 꼴이다.
현재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
현재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이 점이다. 대부분의 신자가 부활 생명을 소지했다는 확신이 없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이 땅에서부터 이미 천국 안에 있는 자답게 천국 같은 삶을 살지 않는다. 유토피아처럼 살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로운 통치를 온전히 받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주일 예배를 드리거나 성경을 읽을 때에 계속해서 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고백밖에 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볼 때는 신앙고백이 아니라 종교적 타령이나 주문처럼 받아들일 가능성이 많다. 예수를 믿고 난 후에도 여전히 죄인이라는 것은 분명히 성경적 진리다. 또 그런 고백을 하는 순수한 의도를 무시하거나 매도하려는 것이 아니다. 자칫 예수님을 닮아가지도 자라지도 않는, 그러지 못하는 것인지 안 하는 것인지, 핑계로 동원된다면 큰 잘못이라는 뜻이다.
바울은 본문 바로 앞에서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예수님도 다시 살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했다.(16절) 부활이 확실히 있기에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또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라고 한다(20절) “첫 열매”라는 말은 그 후에 나머지 열매들도 있는데 신자들의 것이라는 뜻이다.
나아가 아담 안에선 죽음뿐이라고 한다.(22절a) 예수 믿기 전에는 세상의 버킷리스트를 아무리 달성해도 공허감뿐이었다는 것이다. 반면에 예수 안에선 모든 사람이 삶을 얻는다고 한다.(22절b) 완전하고 절대적이며 영원한 진선미 자체이신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푼 유일한 생수의 근원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라는 뜻이다. 신자가 십자가 은혜 안에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하나님의 방식대로 이 땅에 실현하면 아무리 세상사람 눈에는 손해 보는 일 같고 하찮고 심지어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을 해도 영원한 기쁨과 참 생명을 풍성하고도 아름답게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진리에 바탕을 두고 성경을 해석한다면 일독(一讀)만 해도 속에서 생수의 샘이 생긴다. 또 그 업적(?)을 교회 안에서 결코 자랑하지 않으며 도리어 작은 일에 충성하며 작은 자들을 진심으로 섬기게 된다. 그러나 작금 한국 교회에선 예수님의 십자가가 완전히 빠져도 새벽기도 천일 제단을 쌓거나 성경 백독을 하면 그것으로 뜨겁고 굳센 믿음의 표본이라고 칭찬하고 또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고 있지 않는가?
너무나 불쌍해진 기독교와 신자들
바울사도는 육신의 부활은 예수님 재림할 때에 달성된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멸망 받을 원수가 죽음이라고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활이 이 땅의 삶에서부터 신자의 버킷리스트의 실제적인 1위 항목이라고 명확하게 선언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10:28)
하나님을 죽도록 사랑하라는 단순한 뜻이 아니다. 세상의 것들이 결핍 부족 되더라도 신자의 영원한 운명은 절대 방해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 영생 안에 있고 부활한 자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것이라고는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부활생명을 소지했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자신의 모든 것, 생명까지도 걸 수 있는 절대적 진리를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안에서 발견하였고, 또 그 사랑을 자신의 삶에서 누리고 실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땅에서 내 손으로 지은 집이 무너지더라도 하늘에 하나님이 지으신 영원한 장막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극렬한 풀무 불에 던져질 때에 하나님이 구원해 주실 것을 믿었다. 그리고 설령 “그리 아니 하실지라도” 절대로 왕이 만든 우상 신에게 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지 않는가? 물론 세상의 것들도 중요하고 필수적이다. 그러나 신자는 비록 그것으로 인해 죽는 한이 있어도, 그것으로 울고 웃지 않아야 한다. 이미 부활 생명을 소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교인들의 실상은 어떠한가? 하나님을 부인하고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과 똑같은 버킷리스트를 작성해선 하나님의 힘만 빌려서 이루려고 한다. 그것도 자기가 원하는 시기와 방식대로 이뤄지지 않으면 하나님께 불평과 원망을 쏟아 붓는다. 다니엘의 세 친구는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도 하나님만 경배하겠다고 했는데 하나님의 방식도 아닌 자기 방식대로 되지 않았다고 푸념하니 거룩한 성전에서 우상을 숭배하는 꼴이지 않는가?
바울 사도는 신자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고전15:9)라고 했다. 신자가 부활을 모르는 불신자처럼 살고 있는 모습, 부활의 참 생명을 누리지도 실현하지도 않는 것이 가장 불쌍하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이 땅의 형통에만 몰두하니까 하나님은 물론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도 가장 불쌍한 모습이 되었고 그 신자 또한 가장 불쌍한 자가 된 것이다. 쉽게 말해 세상의 버킷리스트는 세상의 방식으로만 이뤄진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또 그런 리스트를 이뤄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은 외면한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고 가르치지도 않으니 이 얼마나 불쌍한가? 아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닌가?
부활의 아침을 맞아서...
오늘은 주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을 기념하는 부활절이다. 그래서 부활을 소망하고 목표로 하며, 부활이 있음을 확신하라고 권면한다. 이는 엄밀히 말해 틀린 말이다. 신자는 이미 부활 안에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안에 있다. 비록 연약하고 아직 죄의 본성이 남아서 쓰러지고 넘어져도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완전하며 영원한 은혜에서 벗어날 수 없다.
내가 내 된 것이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인함이라는 고백을 한다면, 성령의 간섭으로 자기 인생이 완전히 뒤집어지는 거듭남의 체험이 있다면, 그래서 비록 성령의 열매 맺음이 더딜지라도 주님을 닮고 따라가려고 노력한다면, 육신의 부활은 단지 시간문제일 뿐이다. 그럼에도 부활을 소망하라고 권면할 수 있는 까닭은 이 땅에서부터 부활 안에 들어와 있지만 완성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완성은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에 될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부활의 첫 열매가 됨으로써 그분을 따르는 모든 신자에게도 부활은 당연히 확보되었다. 마찬가지로 이 땅에서부터 말씀과 기도를 통해 주님과 인격적으로 대면하고 교제 동행함으로써 천국의 기쁨을 조금이라도 맛본 자는 그와 도무지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이 하늘에 보장되어 있다.
예수님을 닮으려고 노력하면서 조금이라도 그분의 진리의 말씀으로 자유로워지는 것을 체험한 자는 천국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과 예수님을 희미하게 알지만 천국에선 얼굴과 얼굴을 맞대면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부활은 믿고 소망하기 보다는 큰 설렘을 안고 예상하고 기대하면서 기다려야 한다.
이 부활의 아침에는 정말로 내가 부활의 참 생명을 실현하며 살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불신자는 알 수 없는 풍성함과 충만함 안에 있는지? 예수님의 말씀이 나를 통해 세상 사람들 앞에 절대적인 진리로 비춰지고 있는지? 하나님이 내게 주신 소명과 내 인생을 향한 계획이 그분에 의해 완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불사신처럼 행동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한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다시 십자가 진리 안에서 부활의 참 생명만 의지하고서 담대하고도 당당하게 세상과 맞서야 한다.
이번 주에 한국에서 엄청난 비극이 발생했다. 전 국민이 깊은 슬픔에 잠기다 못해 패닉상태에까지 이르렀다. 어른들의 잘못으로 아이들이 억울한 죽음을 당했다. 그래서 교회마다 부활절 행사나 예배를 간소하게 치르는 대신에 회개의 기도를 하고 있다. 하나님이 마지막까지 구출의 기적을 베풀어주시고 유족의 슬픔을 위로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교회와 신자가 행할 더 중요한 일이 있다. 한국 사회에 하나님은 점차 부인되고 절대적 원칙과 기준도 없어지며 부정부패 부조리가 만연하고 있다. 신자마저 그런 상황을 예사로 여기고 그 안에 동참하고 있는 너무나 큰 죄를 철두철미 통회 자백 회개하고 고쳐야 한다. 당장 나부터 정말로 정직하고 순결하게 살 것을 결심하고 실천해야 한다.
어린 자녀들을 잃은 유족들의 슬픔을 위로할 길도 없고 온전히 헤아릴 수도 없다. 그러나 만약에 우리 인생이 이생뿐이면, 그래서 지구라는 시공간의 틀에만 갇혀 있다면, 이번 일은 최고의 비극일 것이다. 버킷리스트를 역으로 만들면 절대로 일어나선 안 될 일의 첫째 항목이 될 것이다. 세상에선 최고로 억울한 죽음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 신앙을 가진 신자에겐 천국에서 육신적으로 다시 만날 소망이 있다. 이런 큰 비극도 오히려 영적으로 성숙할 수 있는 계기로 삼을 수 있다. 이 땅에서의 남은 삶을 더 거룩하고 아름답게 성장 발전시킬 수 있다. 나아가 부활을 모르고 믿지 않기에 이 비극이 죽을 때까지 최고의 트라우마로 남을 불신자들을 안타까이 여겨서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고 부활 생명을 전하며 나눠줘야 한다.
육신의 부활이 신앙의 버킷리스트 1위라는 것도 어폐가 있는 틀린 표현이다. 신자는 부활을 이미 소지하고 있다. 대신에 이 땅에서부터 부활을 실제로 누리는 것이 신자 버킷리스트의 첫째가 되어야 한다. 또 그것은 반드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기까지 이 땅의 죄악과 부조리와 맞서 싸우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 자기 생명을 걸만한, 다른 말로 죽음과 맞바꿀 만한 진리를 십자가에서 발견하고 그 안에 있는데 더 이상 두려울 것이 무엇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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