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설교의 성경 본문은 로마서 7:15-25절이었소. 충분하게 설명하지 못한 대목이 있어서 여기에 보충하오. 특히 25b절이 그렇소. “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이미 25a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말했으면서도 바울은 죄의 법 운운했소. 하나님의 법과 죄의 법을 대립적인 개념으로 보면 이 문장을 이해할 수 없소. 그리스도인들에게 죄의 법은 무조건 나쁜 걸로 되어 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소. 설교에서 짚었지만 죄의 법은 옳고 그름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의 육체적 삶을 견인해가는 규범을 가리키오. 그것과 상관없이 살 수는 없소.
우리는 먹지 않으면 생명을 부지할 수가 없소. 남녀의 성관계가 아니면 아이들을 낳을 수가 없소. 식욕과 성욕은 죄의 법이오. 나쁜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 몸을 지탱해가는 원리라는 뜻이오. 그런 것을 신앙의 차원에서 해결할 수는 없소. 류영모는 50세 초반에 해혼(解婚)식을 거행했다 하오. 아내와 함께 살기는 하지만 성관계는 하지 않기로 한 거요. 류영모라는 분의 삶 자체가 정신적으로 워낙 차원이 높고, 또 기인이라 불릴만한 요소도 많아서 그게 가능할지 모르지만 일반 사람들에게는 안 되는 거요. 류영모는 아이를 낳기 위해서만 성관계를 해야 한다고 고집하셨다 하오. 완전히 엄격한 청교도들과 비슷한 입장을 보였소. 하루에 밥도 한 끼만 드셨다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믿음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주장하오. 결혼 문제도 그렇소. 젊은이들이 결혼을 주제로 기도하오. 자기가 원하는 조건을 늘어놓소. 기도하고 만난 상대와 늘 좋은 부부관계를 맺는 게 아니오. 믿음이라는 게 실제 삶에서는 허약하기 그지없을 때가 많소. 신앙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인격적으로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게 행복한 결혼 생활에서 더 좋은 길이오. 세상의 삶을 너무 신앙적으로만 생각하지 말라는 뜻이오.
죄의 법을 섬긴다는 바울의 주장은 마틴 루터의 ‘두왕국론’과 비슷하오. 하나님 나라와 세상의 나라, 거룩한 나라와 세속의 나라로 구별할 수 있소. 이것은 성속이원론이 아니오. 두 나라 모두 하나님의 통치 안에 있지만 작동원리가 다른 것이오. 서로 다른 원리를 하나로 묶어낼 수는 없소. 그래서 루터는 영주들의 정치에 깊이 개입하지 않았소. 정치 원리를 신앙으로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오. 이에 반해서 칼뱅은 제네바에서 신정정치를 펼쳐보려고 했소. 신앙의 원리로 정치를 한 거요. 칼뱅의 제네바 신성정치는 실패했소.
거룩한 질서와 세속의 질서를 이렇게 구분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사람이 잘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기인하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현실 삶에서 불가능한 것이오. 물론 그런 방향으로 사회가 변화되도록 노력해야겠지만 그것이 가능한 것처럼 말할 수는 없소. 그래서 결국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모인 교회에서도 나름으로 질서가 필요하고, 법이 필요하고, 강제력이 필요하오. 그게 바로 죄의 법이오. 죄의 법을 섬긴다는 바울의 고백을 좀더 깊이 생각해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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