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의 국가조찬 기도회에서 이명박 대통령이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모습의 사진이 신문에 났소. 바로 옆에는 김윤옥 여사도 함께 무릎을 꿇고 있었소. 당시 기도 순서를 인도하던 한기총 대표회장 길자연 목사가 무릎 꿇고 통성기도를 하자고 주문하자 거기에 모였던 모든 이들이 따라했다는 거요. 손학규 민주당 대표도 똑같이 했소. 어떤 이들은 두 손을 들고 기도하기도 했소.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모습이오. 아마 기자들만 기도하지 않고 기도하는 모습을 촬영하거나 뉴스를 작성했을 거요.
하나님 앞에서 모두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크게 이상한 일이 아니오. 그가 대통령 아니라 대통령 할아버지라 하더라도 무릎을 꿇을 때는 꿇어야 하오. 그런데 예배도 아니고, 또한 교회에서 모이는 모임도 아니고 기자들을 불러다가 그럴듯하게 치르는 조찬기도회에서 무릎을 꿇는 모습을 연출한다는 것은 모양이 우습소. 그것도 자리가 마루나 방바닥이 아니라 카펫 바닥이 깔려 있고 의자에 걸터앉게 되어 있는 국제회의실에서, 더구나 남자들은 구두에 양복을 입고 여자들은 양장을 한 채 무릎을 꿇었소. 작위적으로 보이오.
도대체 합심기도, 또는 통성기도가 무엇이오? 어떤 형식의 기도라 하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마음을 담아낼 수 있다는 제 삼자가 뭐라 할 수는 없소. 문제는 성서와 신학적인 근거를 갖추고 있느냐 하는 것이오. 그런 것이 없이 단지 신앙적인 효율성만 앞세운다면 신앙의 변질은 불을 보듯 분명하오. 한국에서 습관적으로 행해지는 통성기도의 성서적 근거를 찾기 힘드오. 합심해서 기도하라는 요구를 반드시 지금 행태의 통성기도와 일치시킬 수도 없소. 함께 모여 순서에 따라서, 또는 공동의 기도문으로 기도한다고 해서 그것이 합심 기도가 아닌 것은 아니오. 하나님께 부르짖으라는 표현도, 주로 시편에 나오지만, 두 손을 들고 흔들면서 서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도 못할 정도로 큰 소리를 내면서 기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소. 오히려 조용히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이 부르짖는 기도라 할 수 있소.
통성기도가 일종의 내적 치유에는 큰 도움이 될 거요. 일단 큰 소리를 치면 스트레스가 해소될 것이고, 여러 사람이 함께 소리를 내면 거기서 어떤 강한 힘을 느낄 수도 있소. 만약 기도를 심리의 내적 치유 정도로 생각한다면 그렇게 통성기도를 하시오. 자주 해보시오. 좋은 효과가 날 것이오. 그러나 기도를 하나님과의 영적 소통이며 영적 호흡이라고 한다면 그렇게 하지 마시오. 가능하면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든지, 공동의 모임이라고 한다면 순서에 따라서 기도하시오. 갈멜산에서 아합의 어용 선지자들이 기도하던 모습과 엘리야의 기도하던 모습을 비교해보시오. 통성기도는 기도의 고성방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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