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갈라디아서

갈라5-율법의 한계와 위험 (갈라디아서2:15-21)

새벽지기1 2018. 1. 1. 16:19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자기가 전한 복음이 하나님께 받은 참된 복음이라는 것을 뜨겁게 변호했습니다. 이론과 논리가 아닌 사실과 사건에 기초해서 강렬하게 변호했습니다. 심지어 안디옥의 이방인 형제들과 아무 거리낌 없이 교제하며 식사하던 베드로가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들을 보고 슬그머니 자리를 떠나자,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한 행동이 아니라고 책망한 일화까지 털어놓으며 자기가 전한 복음이 정말 부끄러울 것 없는 복음이요 부족함이 없는 복음이라는 것을 선명하고 강렬하게 변호했습니다.

 

이처럼 아주 선명하고 강렬하게 복음을 변호한 바울은 이제 자기가 전한 복음의 정당성을 논증하기 시작합니다. 바울의 논증은 매우 심오하고 날카롭고 논리 정연합니다. 신구약 전체를 꿰뚫는 통찰력이 빛납니다. 그러면 바울의 논증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바울의 논증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문제로부터 시작합니다. 바울의 복음은 한 마디로 ‘예수가 온 백성의 구주이고, 온 백성의 구주인 예수를 믿으면 누구든지 구원 받는다’는 것인데, 바울은 이 복음의 정당성을 논증하기 위해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는 시편의 고백(143:2)을 차용합니다. 그리고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지 않는다”(v.16)는 근원적 진실을 선포합니다. 바울은 16절에서만 이 말을 세 번 반복합니다. 바울이 이처럼 같은 진실을 세 번씩이나 반복해서 말한 것은 첫째로 이것을 이해하지 않고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 칭의’의 진리가 이해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신 칭의’의 진리를 떠받치고 있는 핵심 전제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근원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이 부패했다고 말합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이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려고 하는 핵심 이슈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에 대한 것입니다. ‘의롭게 하다’라는 동사는 마지막 심판의 때에 하나님이 선언하실 무죄판결을 가리킵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의롭게 하다’라는 동사가 갈라디아서에만 8번 나옵니다. 로마서에도 15번 나옵니다. 이것은 바울 신학의 주요 관심사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사람을 의롭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주요 사역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옳습니다. 의롭지 않은 사람을 의롭게 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일이고, 가장 관심 갖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다른 무엇보다도 사람이 의롭게 되기를 원하십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음으로써 의로움에서 멀어진 이래로 하나님이 가장 바라시는 것, 가장 깊이 관심 갖는 것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신 것도 그 때문입니다. 율법이 없으면 어떻게 사는 것이 의롭게 사는 것인지를 알 수 없으니까 의롭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지침으로 율법을 주신 겁니다. 율법은 다른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야 할 의로운 삶의 지침입니다.

 

그런데 의로운 삶의 지침인 율법, 하나님이 주신 율법이 예수의 복음에 걸림돌이 되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2장 16절은 갈라디아서의 핵심 구절인데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을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 되냐, 믿음으로 의롭게 되냐’ 하는 문제를 말한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해하는 것은 심히 부족한 이해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한 번도 믿음과 행위를 대립적으로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항상 믿음과 함께 행위도 강조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도 선을 행하라고 권면했습니다. 때가 이르면 반드시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니 낙심하지 말고 선을 행하라,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라고 적극 권면했습니다(갈6:9-10).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복음에 합당한 행동을 하지 않았을 때에 가감 없이 책망한 것도 행위를 다른 무엇보다 중시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바울 당시의 유대인들은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 가면 그 문제가 나오기 때문에 그 때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만 유대인 중에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우리는 유대교를 행위의 종교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교도 엄연히 은혜의 종교입니다. 구약을 보십시오.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말하지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유대교와 기독교는 같은 토대 위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하나의 토대 위에 서 있습니다. 바울과 바울을 비난하는 유대주의자들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하나의 토대 위에 서 있는 건 분명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이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 되냐, 믿음으로 의롭게 되냐’를 놓고 논쟁하지는 않았다고 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뭣 때문에 갈등하고 논쟁한 것일까요? 그것은 율법에 대한 이해가 서로 달랐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논쟁한 진짜 문제는 율법이 절대적인 것이냐 절대적인 것이 아니냐 하는 거였습니다. 율법의 유효성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으로 끝났느냐 안 끝났느냐, 율법이 지배하는 시대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함께 끝났느냐 안 끝났느냐 하는 거였습니다. 바울은 율법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유대주의자들은 율법을 절대적인 것으로 보았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함께 율법이 지배하는 시대가 끝났다고 보았습니다. 반면에 유대주의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도 불구하고 율법이 유효하다고 보았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이후에는 율법이 의로운 삶의 지침이 될 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반면에 유대주의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이후에도 여전히 율법이 의로운 삶의 지침이라고 보았습니다.

좀 다른 각도에서 말하겠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의 체제를 넘어섰습니다. 반면에 유대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율법의 체제 안에 갇혀 있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나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v.19)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율법이 폐기됐다는 말이 아닙니다.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율법이 나쁘다는 말이 아닙니다. 율법의 체제를 넘어섰다는 말입니다. 문자로 기록된 율법을 넘어 영으로 새겨진 율법으로 들어갔다는 말입니다.

 

바울과 유대주의자들은 이처럼 율법에 대한 이해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그리고 이 다름으로 인해 초대교회가 몸살을 앓았고, 엄청난 갈등과 논쟁에 휩싸였습니다. 또 이 다름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토대 위에 확고하게 설 수 있었던 반면 유대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토대 위에 확고하게 서지 못했던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초대교회를 뒤흔든 가장 근원적인 문제는 율법이었습니다.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도 율법이었고, 하나님을 향해 사는 것을 가로막은 최대의 걸림돌도 율법이었습니다.

율법은 이렇게 예수의 복음에 심대한 영향을 미칩니다. 그런데 의외로 율법 문제에 주목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율법은 흘러간 옛 이야기라고만 생각하지 율법이 갖고 있는 근본 성격에 주목하지는 않습니다. 주석이나 강해서들을 봐도 율법에 대해 깊이 다루지 않습니다. 고작해야 율법과 은혜를 대비시키고, 행위와 믿음을 대비시키는 정도로 그칩니다. 그러나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따져 묻는 핵심 이슈는 ‘율법을 어떻게 이해할 것이냐’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도 바울과 함께 이 문제를 추적해보겠습니다. 먼저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은 율법을 어떻게 이해하십니까?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구원의 용도로 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이렇게 살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구원 안내서로 주셨다고 생각하십니까? 율법은 구원의 용도로 주어진 게 아닙니다. 율법은 구원받은 자들이 살아야 할 의로운 삶의 지침으로 주어졌습니다.

바울은 아브라함을 통해 이 사실을 논증합니다. 갈라디아서 3장에 가면 아브라함 이야기가 나오는데 아브람은 하나님의 부름과 복된 약속을 받은 첫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아무런 이유 없이 오직 은혜로 아브람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아이가 없는 그에게 내년 이 맘 때쯤 아이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늘의 별처럼, 땅의 티끌처럼 후손이 많을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참으로 밑도 끝도 없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람은 하나님의 밑도 끝도 없는 말씀을 액면 그대로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브람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의롭다고 하셨습니다(창15:6).

여기서 아브람이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습니까? 아닙니다. 율법이 없는 상태에서 율법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은 것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지금 이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은 아브라함을 상기시키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갈3:5-6) 무슨 말입니까? 율법이라는 것은 애당초 구원의 용도로 주어진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율법 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처럼 우리도 율법과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성경에서 구원의 원형으로 회자되는 출애굽 사건에서도 같은 상황이 반복됩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율법을 잘 지켜서 이집트에서 해방됐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을 지키기 위해서 구출해내셨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으로 이집트에서 구출해내시고 홍해를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후에 율법을 주셨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율법을 주신 게 아니라 은혜로 구원한 후에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을 구원한 후에 율법을 주셨을까요? 어떤 용도에 쓰시려고 율법을 주신 걸까요? 율법이 하는 일은 크게 네 가지입니다. 첫째, 율법은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야 할 의로운 삶의 지침 역할을 합니다. 둘째, 율법은 죄를 알게 합니다. 셋째, 율법은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언약 백성이라도 사람의 의지와 능력으로는 율법을 따라 살지 못한다는 것을 일깨우는 역할을 합니다. 넷째, 사람은 결코 율법을 따라 살지 못한다는 것을 일깨움으로써 예수님 앞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결국 율법은 예수님이 오셔서 완전한 구원을 성취할 때까지 잠정적으로 필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영원무궁한데 모세에게 주신 율법은 영원무궁하지 않아요. 율법은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만 잠정적으로 자기 역할을 할 뿐입니다.

 

이것 뿐 아닙니다. 율법에는 결정적인 한계가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인데 하나님의 뜻인 율법이 하나님의 뜻을 축소시키고 왜곡합니다.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뜻을 문자로 표현하는 게 가능할까요? 십계명 안에 하나님의 뜻을 다 담을 수 있을까요?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는다 해도 하나님의 뜻을 다 기록할 수 없습니다. 수천만 권의 책에다가 율법을 꼼꼼히 기록한다고 해도 율법을 기록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다 담아낼 수 없어요.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다, 라고 기록하는 순간 하나님의 뜻은 축소되거나 왜곡됩니다. 노자가 2500년 전에 정확히 말했어요.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 도는 이미 참 도가 아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이든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 진실은 축소되거나 왜곡될 수밖에 없습니다. 진실은 결코 언어로 표현될 수 없어요. 정병선이라는 한 인간의 진실조차도 언어로는 다 표현되지 않습니다. 키만 해도 그래요. 정병선은 키가 크다고 해도 정확한 표현이 못되고, 키가 작다고 해도 정확한 표현이 못됩니다.

 

하나님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어떤 설명을 한다 해도 그 설명이 하나님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합니다. 말이나 문자는 부분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무한하신 하나님을 언어라는 그릇에 담는다는 건 애당초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우겨 담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나님을 언어라는 그릇에 우겨 담으면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이 찌그러집니다. 축소되고 왜곡됩니다. 이것이 언어의 위험성이요 문자의 한계입니다.

율법도 예외가 아닙니다. 수천만 권의 책에다가 율법을 꼼꼼히 기록한다고 해도 율법을 기록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다 담아내지 못합니다. 물론 오해는 하지 마십시오. 율법이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율법이 선하지도 않고 거룩하지도 않다고 말하는 건 아닙니다. 율법은 분명히 선하고 좋은 것입니다. 율법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은 하나님의 뜻에 미치지 못합니다. 율법은 죽었다 깨어나도 하나님의 뜻의 일부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일부분인 율법을 다 지킨다 한들 그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전혀 불가능합니다.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율법에는 위험성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율법은 자칫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습니다. 율법의 한계를 알고 이해하면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는 것은 피할 수 있는데 그렇지 않으면 자칫 율법을 절대화하게 되고, 율법을 절대화하게 되면 그 순간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가로막습니다. 율법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율법이 선하고 좋은 것임에도 불구하고, 율법이 의로운 삶의 지침임에도 불구하고 율법을 절대화하게 되면 율법이 하나님의 뜻을 찌그러뜨리고 가로막습니다. 율법이 생명을 죽입니다.

율법을 절대화하고 율법에 집착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율법을 따라 살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결코 의로운 삶을 살지 못합니다. 의로운 삶을 살기는커녕 오히려 악을 행합니다. 가장 잔인하고 차갑게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죽입니다. 교만이 하늘을 찌르고 자기 의라는 감옥에 깊이 갇혀 있습니다. 세상에 율법주의자처럼 무섭고 잔인한 사람들이 없습니다. 사실입니다. 율법은 놀랍게도 하나님의 뜻을 왜곡하는 주범입니다. 의로운 삶을 가로막는 최고의 걸림돌입니다. 율법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율법의 잠정성과 한계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잠정성과 한계를 깨닫지 못하고 절대화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행함으로써 자기를 증명해보겠다는 의욕이 앞서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와 같은 율법의 위험성을 내다봤습니다. 아니, 유대주의자들에게서 직접 목도했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선언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v.16) 또 이렇게도 말했습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v.19) 참 놀라운 말입니다. 우리의 상식을 완전히 뒤집는 말입니다. 율법은 분명히 우리의 유익과 의로운 삶을 위해 주어졌는데도 그 율법으로는 의로움을 얻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율법이 하나님에 대하여 사는 것을 가로막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면 율법에 대하여 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고린도후서에서는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고후3:6)이라고도 말합니다. 참 아이러니한 역설입니다. 그러나 이 역설이 율법의 한계요 위험성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율법의 이 한계와 위험성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런데 유대주의자들은 율법의 이 한계와 위험성을 직시하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율법에 대하여 죽었는데 유대주의자들은 율법에 대하여 죽지 않았습니다. 저들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진정한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한 채 율법의 세계에서 서성거렸던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교회 안에도 그런 자들이 부기지수입니다. 예수를 믿기는 하는데 율법에 대하여 죽지 않은 자들, 율법의 한계와 위험성을 직시하지 못한 채 율법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 율법과 은혜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자들, 행위와 믿음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자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정반대로 율법의 한계와 진면목을 잘못 알고 율법은 필요 없다며 아예 폐기처분해버리는 자들, 은혜와 율법 ‧ 행위와 구원을 완전히 갈라치기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율법과 은혜 ‧ 행위와 믿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지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을 넘어선 율법의 세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율법에는 두 차원이 있습니다. 문자로 기록된 율법이 있고, 영에 새겨진 율법이 있습니다. 둘 다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그런데 문자로 기록된 율법은 구체적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등등 매우 구체적입니다. 그런데 영에 새겨진 율법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가 전부입니다. 사랑하라. 끝. 전혀 구체적이지 않아요.

자, 이것은 뭘 말할까요? 하나님의 율법은 선을 긋거나 규정하거나 틀 지울 수 없다는 말입니다. 구획을 나누거나 정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사랑이라고 하는 삶의 지향성으로 표출될 뿐이지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출될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사랑하라는 것 외의 그 무엇으로도 구체화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옳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오직 하나, 사랑 속에 다 들어 있습니다. 사랑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이 율법을 넘어선 율법입니다. 이 율법은 문자로 기록된 율법을 능가하는 율법입니다. 더 완전하고 차원 높은 율법입니다. 자유의 율법입니다. 기쁨의 율법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죽음으로 우리를 문자로 기록된 율법에서 해방하였습니다. 사랑이라고 하는 자유의 율법, 기쁨의 율법, 영에 새겨진 율법을 따라 살게 하려고 문자로 기록된 율법에서 해방하였습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세계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믿음의 세계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유대주의자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기록된 율법에 갇혀서 참된 율법의 세계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예수를 믿는 이방인들을 기록된 율법의 틀 속에 가두려고 안간 힘을 썼습니다. 바울의 복음을 비난하는 죄를 범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은 문자로 기록된 율법에 매이지 않기를 바랍니다. 율법은 폐기됐으니 율법 없이 살자고 날뛰는 오류에도 빠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오직 사랑이라고 하는 자유의 율법, 기쁨의 율법, 성령의 율법을 따라 살기를 힘쓰십시오. 자유의 율법이요 기쁨의 율법이요 성령의 율법인 사랑의 율법을 따라 살기를 힘쓰십시오. 이런 사람이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진정한 믿음의 세계에 들어간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