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에서 갈라디아교회에 닥친 복음의 위기가 ‘사람에게서 비롯된 복음’이냐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복음’이냐의 문제라는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자기의 사도권과 복음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강변함으로써(갈1:1,11-12) 갈라디아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자들의 복음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복음이요 다른 복음이라는 사실을 천명했습니다.
그러나 천명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지요. 그래서 바울은 2장에서 자기가 천명한 것을 구체적으로 입증합니다. 자기가 전한 복음이 하나님께 받은 복음이라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진짜 복음이라는 것을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입증합니다.
바울은 오늘날 예수님의 복음을 이방 세계에 전한 위대한 사도로 인정받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가장 깊이 이해하고 정리한 최고의 신학자요 해석자로 인정받습니다. 그러나 1세기 당시에는 그리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바울은 예수님의 직계 제자가 아니거든요. 다른 사도들은 다 예수님의 직계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름을 받아 3년 동안 동고동락하고, 예수님의 모든 사역과 가르침을 직접 보고 듣고 배운 자들이었습니다. 또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까지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경험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지 않았어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뜻하지 않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바울은 예수님과 일면식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도 떠돌아다니는 여러 가짜 메시아 중의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데 앞장섰습니다.
그러니 그런 바울은 누가 사도라고 인정하겠습니까. 아무리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열변을 토해도 객관적으로 확인할 방법이 없는데 누가 사도라고 인정하고 따르겠습니까? 결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 스스로도 인정했어요. 고린도전서에서 ‘자기는 사도의 반열에 설 자격이 없는 자’라고 자백했습니다(고전15:9). 맞습니다. 바울은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는 치명적인 결격 사유가 있었습니다.
갈라디아교회를 어지럽힌 자들은 바로 바울의 그 약점을 파고들었습니다. 그 약점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습니다. 바울이 돌변하여 예수의 복음을 전하고 있지만 바울은 정통 사도가 아닙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부름을 받지도 않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전하는 메시지도 예수님께 직접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의 복음은 가짜입니다, 라고 맹비난했습니다. 당연히 바울의 사도직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솔깃해했습니다. 당시의 그리스도인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예수님의 직계 제자 출신만을 사도로 인정하는 분위기였고, 그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만을 권위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바울에 대한 비난이 설득력을 얻었습니다.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의 상당수가 바울의 복음에서 떠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매우 당혹스러웠을 겁니다. 그동안 예수님과 반대되는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일정 부분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저들의 방해 공작이 너무 악의적이다 싶은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자기가 받은 복음과 너무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에 놀라기도 했을 것이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앞길이 막힐까봐 걱정되기도 했을 겁니다.
그러나 바울은 주눅 들지 않았습니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하나님의 부름에 대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용기를 내어 진실을 말했습니다. 제일 먼저 자기의 사도직이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된 것’(1:1)이라고 강변했습니다. 자기가 전한 복음에 대해서도 “사람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1:11-12)이라고 똑같이 열변을 토했습니다. 자기는 사도들의 문하생도 아니고,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파송 받은 사람도 아니고, 사이비 사도는 더더욱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진짜 사도라고 열변을 토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변증하기 위해 예수를 반대한 이야기,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에 사도들을 만나러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은 이야기(1:17), 3년 후 예루살렘에 갔을 때에도 잠시 15일을 머물렀을 뿐이고 베드로와 야고보만 만났을 뿐 다른 사도들은 구경도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다 까밝혔습니다(1:18-19). 심지어 어머니의 태로부터 택정함을 받았다고까지 말했습니다(1:15).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는지 마지막에는 “내가 여러분에게 하는 말은 절대로 거짓말이 아닙니다.”(1:20)라고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이것만 말하는 것은 왠지 마음에 걸렸습니다. 복음의 반쪽 진실만 말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복음에는 분명히 아직 말하지 않은 다른 반쪽 진실도 있으니까 그것도 말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2장에서 아직 말하지 않은 복음의 다른 반쪽 진실을 말합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다른 반쪽 진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울은 2장에서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 이야기를 꺼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을 두 번째 방문한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지 14년 후의 일이었습니다. 이 때 바울과 동행한 사람은 바나바와 디도였습니다. 바나바는 유대인이고 디도는 헬라인이었는데 바울은 이들과 동행한 두 번째 방문을 “계시를 따라 갔다”고 표현했습니다(2:2). 여기서 ‘계시를 따라 갔다’는 표현은 사람의 뜻이나 필요에 따라 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필요에 따라 갔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을 ‘계시를 따라 갔다’고 거창하게 말했을까요? 이 부분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거다’라고 말할 수 있는 성경적 자료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거다’라고 말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 표현이 바울이 말하려는 복음의 다른 반쪽 진실과 깊이 연결돼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이 옳은지는 설교의 마지막에 가서 확인해보도록 하고 일단은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바울은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에서 있었던 일을 세 가지로 요약해서 말합니다.
첫 번째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 예루살렘교회의 ‘유력한 자’들, 권위를 인정받아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도들,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2:9)에게 복음을 가감 없이 제시한 일입니다(2:2).
여기서 ‘복음을 제시했다’는 말은 ‘자기가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복음을 사도들에게 상세히 설명하고 그들의 의견을 물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다른 사도들에게 자기 복음에 오류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인받으려고 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단지 자기가 전하는 복음을 정확히 밝힘으로써 교회의 중심인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과 자기가 전하는 복음이 같은 복음이요 하나의 복음이라는 것을 확인하려고 그런 것이었다고 봐야 합니다.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유력한 사도들에게 자기의 복음을 상세히 설명했습니다. 가만히 바울의 복음을 들은 사도들은 바울의 복음에 대해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들이 믿고 전파하는 복음과 어떤 차이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뭘 더하라거나 빼라거나 하지 않았습니다(2:6). 저들은 도리어 바울이 무할례자(이방인)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유대인)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과 같은 것을 인정했습니다(2:7).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하나님이 바울에게 역사하사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다는 사실에 동의했습니다(2:8). 그리고 바울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확인하고 기뻐하며 친교의 악수를 나눴습니다(2:9).
이 일은 그렇게 스펙터클하지 않습니다. 센세이셔널하지도 않습니다. 지극히 미미하고 소소하기 이를 데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일은 기독교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중요하고 역사적인 일입니다. 이 일은 겉보기와 달리 바울의 복음과 예루살렘 사도들의 복음이 같은 하나의 복음이라는 것, 유대인에게 전파되는 복음과 이방인에게 전파되는 복음이 같은 하나의 복음이라는 것이 처음으로 확인된 일이고, 바울의 복음이 하나님의 복음으로 처음으로 인정받은 일입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서 교회가 유대인 교회와 이방인 교회로 갈라지지 않을 수 있었고, 예수의 복음이 예루살렘과 유대인의 벽을 넘어 세계와 이방인에게까지 뻗어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일은 정말 생각할수록 대단한 일이고 역사적인 일입니다.
두 번째는 예루살렘 사도들이 디도에게 할례를 강요하지 않은 일입니다.
할례는 당시에 가장 민감한 문제였습니다. 잘 알다시피 할례는 하나님이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표징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놀라운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창17:6-8)
이렇게 복된 언약의 말씀을 하신 하나님은 연이어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언약의 표징이니라. 너희는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창17:9-14)
할례는 이처럼 하나님의 언약의 표징인데다가 의문의 여지가 없는 말씀이었기 때문에 유대인에게는 생명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할례는 누가 아브라함의 후손인가를 판단하는 최고의 기준이었고, 유대인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최고의 표징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갑자기 나타나서 할례가 필요 없다고 하니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우리나라의 경우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좀 더 쉽습니다. 우리나라는 오래 전부터 남자가 결혼을 하면 상투를 트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상투는 남자가 성인이 되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일종의 표징이었던 셈입니다. 그런데 1895년(고종 32)에 단발령을 내려 상투를 자르게 했습니다. 그러자 『효경孝經』에 나오는 ‘신체발부는 수지부모이니 불감훼상이 효지시야(身體髮膚受之父母不敢毁傷孝之始也)’라, 즉 ‘몸과 살과 머리카락은 부모에게 받은 것이므로 다치지 않게 소중히 다루는 것이 효의 시작’이라는 전통을 내세우며 거세게 반발했습니다. 머리카락 하나를 자르는 일에도 이렇게 거센 반발을 했어요.
그러니 유대인들은 어떠했겠습니까? 할례를 부정하는 바울을 가만히 두고 볼 수 있었겠습니까? 반발하는 게 당연했습니다. 할례를 받지 않아도 된다는 바울의 주장은 유대인의 오랜 전통을 무시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배신하고 거부하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반발하고 비난하는 게 당연했습니다. 바울도 바리새파 출신이었기 때문에 저들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됐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러설 수는 없었습니다. 바울은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사도들에게도 당당히 소개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별것 아닌 행동 같지요? 그러나 이것은 실로 충격적인 행동이었습니다. 할례 받지 않은 자를 예루살렘 교회에 데리고 가고 사도들과의 만남에 동석시켰다는 것은 할례가 없어도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면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부족함이 없다는 것, 할례가 없어도 예수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웅변한 도발적인 행동이었습니다. 마치 200년 전 미국에서 흑인과 백인이 같은 교회에서 예배드리지 못하는 시대에 백인 한 사람이 흑인 한 사람을 데리고 들어가 당당히 예배하는 것과 같은 행동이었습니다.
할례를 고집하는 자들(바울은 이들을 거짓 형제들이라고 부름)은 바울의 이런 도발이 못마땅했습니다. 그래서 바울과 사도들이 만나는 모임에 잠입해 들어가서 디도에게 할례를 베풀라고 요구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일종의 소규모 데모를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할례를 거부하는 바울 일당은 물러가라, 물러가라, 물러가라. 이방인 디도에게 할례를 시행하라, 시행하라, 시행하라]고 외치며 소규모 데모를 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끄떡도 하지 않았습니다. 한 순간도 그들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굴복하면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 전한 복음이 헛되기 때문에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위해서 한 순간도 거짓 형제들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2:4-5).
반면에 사도들의 반응은 거짓 형제들과 달랐습니다. 사도들은 디도에게 할례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2:3).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 디도를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인정하고 순순히 받아들였습니다. 형제로 받아들였습니다. 여러분, 이것도 별것 아닌 행동 같지요? 그러나 이것도 혁명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오랜 원칙과 전통을 깨는 행동, 할례를 받지 않아도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 충분히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될 수 있고 예수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해준 행동이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인 교회가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형제적 관계로 굳건해진 일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사도들이 바울에게 요청한 것은 딱 하나였습니다.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라는 요청. 이 요청은 단지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라는 뜻이 아니라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고 계속 도우라는 뜻입니다. 바울에게 이 요청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이미 가난한 자들을 돕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며 힘써 행한 일 중의 하나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헌금을 모금하고 돕는 것이었습니다(행11:27-30, 12:25, 롬15:25-27, 고전16:1-4). 아무튼 이 요청은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인 교회가 하나의 교회라는 것을 웅변해주는 일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바울이 예루살렘 방문에서 겪은 세 가지 일을 살펴봤습니다. 이제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바울이 이렇게 예루살렘에서 겪은 세 가지 일을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어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요? 자기가 이방인에게 전하는 복음과 사도들이 유대인에게 전하는 복음이 같은 복음이라는 것을 말하려고 그런 것입니다. 1장에서는 자기가 전하는 복음이 하나님께 받은 것이지 사도들에게 받은 것이거나 사람들에게 배운 것이 아니라고 강변했는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니까 2장에서 내가 전하는 복음과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이 같은 복음, 하나의 복음이라고 강변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받습니다. 혈통을 통해 받거나, 학교의 교육을 통해 받거나, 종교의 관습을 통해 받거나, 위대한 선각자의 문하에 들어가서 받지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받습니다. 단독자로 받습니다. 개인으로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로 받은 그 복음은 모두에게 동일한 복음입니다. 바울이 베드로와 상관없이 단독자로 받았지만 바울이 받은 복음은 베드로가 받은 복음과 같은 복음입니다. 바로 이것이 바울이 말하려고 했던 복음의 나머지 반쪽 진실입니다. 이것은 정말 중요한 복음의 진실인데 이 진실이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을 통해서 드러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두 번째 예루살렘 방문을 ‘계시를 따라 갔다’고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예, 복음은 하나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파, 베드로파, 아볼로파, 예수파로 갈라졌는데 그것은 비극입니다. 복음의 본질을 해치는 일입니다. 복음은 나누어질 수 없습니다. 바울의 복음이 따로 있고, 베드로의 복음이 따로 있고, 아볼로의 복음이 따로 있고, 예수의 복음이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복음은 오직 하나가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한 복음이 있을 뿐입니다(고전3:4-6). 그러기 때문에 이 복음을 받은 자는 흑인이든 백인이든, 남자든 여자든, 배웠든 못 배웠든, 젊은이든 늙은이든, 오래 만났든 처음 만났든 다 통합니다. 마음이 통하고 뜻이 통하고 생각이 통합니다. 바울과 베드로가 가까이 지내며 교제한 적이 없지만 복음 안에서 서로 깊은 교감을 나누었듯이 하나님께 복음을 받은 자는 처음 만나도 통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통하는 건 아닙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던 초대교회 안에도 통하지 않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의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오늘의 교회 안에도 이런 자들이 있습니다. 똑같이 예수를 믿는다고는 하는데 말을 나눠보면 도무지 통하지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저 사람이 정말 예수의 복음을 아는 사람인지가 의심스러운 자들이 있고, 심지어 같은 신학대학원에서 공부를 했는데도 전혀 통하는 않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에요. 예수님께서도 교회 안에는 반드시 가라지가 있다고 말씀했습니다(마13:25-40). 그렇습니다. 똑같은 성경을 읽고, 똑같은 예수를 믿고, 똑같은 신앙고백을 하는데도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복음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사람에게서 비롯된 복음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 있습니다. 종교적인 행태는 비슷해 보이는데 속은 다른 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자들과는 통하지 않습니다. 5년 10년을 한 교회 안에 있다 해도 통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런 자들을 가리켜 ‘거짓 형제들’(2:4),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1:8), ‘성도들을 교란하고 어지럽히는 자들’(1:7, 5:12)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다른 복음에 속지 마십시오. 다른 복음에 흔들리지 마십시오. 다른 복음에 귀 기울이지 마십시오. 복음은 오직 하나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복음은 오직 하나입니다. 세월이 흘러도, 시대가 바뀌고 철학이 변해도 복음은 오직 하나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계시된 복음이 있을 뿐입니다.
이 복음은 나라에 갇히지 않습니다. 시대에 갇히지 않습니다. 문화에 갇히지 않습니다. 철학에 갇히지 않습니다. 종교에 갇히지 않습니다. 유대의 전통과 모세 율법에 갇히지 않습니다. 이 복음은 세상의 모든 갇힘에서 자유케 합니다. 세상의 모든 차이와 차별을 무너뜨립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물어뜨립니다(엡2:14). 온 나라와 민족과 백성을 하나 되게 합니다(눅2:10).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복음은 공적인 복음이고 온 세상을 향한 복음입니다. 나를 구원하는 것에서 끝나는 복음이 아니라 온 백성을 구원하는 복음, 온 세상을 구원하는 복음입니다. 이 복음 외의 것들은 다 부분적입니다. 공자도 부분만 말하고, 석가도 부분만 말하고, 노자도 부분만 말하고, 소크라테스도 부분만 말하고, 마호메트도 부분만 말합니다. 과학도 부분만 말하고, 문학도 부분만 말하고, 역사도 부분만 말하고, 철학도 부분만 말하고, 예술도 부분만 말합니다. 그리고 다들 부분만 말하기 때문에 공자로도, 석가로도, 소크라테스로도, 과학으로도, 문학으로도 세계가 하나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만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예수의 복음은 온 세상에 통하고 온 세상을 말하는 진리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만 하나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과 이 복음을 소통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이 복음에 함께 공감하고,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참여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저는 요즘 기도합니다. “주님, 더 많은 이들과, 더 많은 이들과 이 영광스런 복음, 이 자유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이 복음을 나누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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