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갈라디아서

갈라2-바울 복음의 기원 (갈라디아서1:11-20)

새벽지기1 2017. 12. 4. 08:28


갈라디아서는 성경 66권 중에서 가장 논쟁적인 책입니다. 바울은 1장 1절부터 마지막 6장 18절까지 자기가 전하는 복음과 자기를 비판하는 자들의 복음을 대비해가면서, 누가 진정한 복음을 전하는 것인지를 놓고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논쟁을 이어갑니다. 이 논쟁은 신학적인 교리 논쟁이 아닙니다. 갈라디아교회에 닥친 실제 위기를 놓고 논쟁합니다. 그래서 논조가 급박하고 말투도 거칩니다. 꾸짖고 묻고 따지고 비꼬고 저주하는 말들이 툭툭 튀어나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교회의 위기를 견해 차이로 보지 않습니다. 뭘 강조하느냐의 차이로 보지 않습니다. 갈라디아교회를 어지럽히고 있는 복음은 바울이 받은 복음과 다른 복음이라고 봅니다(1:6). 하나님을 떠나는 배교라고 봅니다(1:6, 4:8-11). 성령을 떠나 육체로 기울어지는 것이라고 봅니다(3:3). 진리에 순종하기를 멈추는 것이라고 봅니다(5:7).

 

그렇다면 물읍시다. 바울은 왜 이렇게 갈라디아교회에 닥친 문제를 심각하게 보는 것일까요? 갈라디아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이 예수를 부정하는 것도 아닌데 바울은 왜 이렇게 날선 논쟁을 하는 것일까요? 이 논쟁을 통해서 바울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 질문을 품고 갈라디아서를 읽어야 합니다. 이 질문 없이 갈라디아서를 읽으면 피상적으로 읽게 됩니다. ‘율법으로 구원 받냐, 믿음으로 구원 받냐’하는 논쟁으로만 읽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읽는 것은 갈라디아서를 잘못 읽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려고 하는 핵심 논쟁을 이해하지 못한 채 껍데기만 읽는 것입니다.

만일 갈라디아 교회에 닥친 위기가 ‘율법이냐 믿음이냐’라면 바울이 이렇게 심각하게 덤벼들지 않았을 것입니다. 빈대를 잡겠다고 초가삼간을 태우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훨씬 부드럽게 대응했겠지요. 율법을 앞세우지 말고 믿음을 앞세우라고 권면하는 정도에서 그쳤을 겁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바울은 훨씬 진지하게, 심각하게, 노발대발해가면서, 분노해가면서 이 문제에 대응했습니다. 온 세상의 운명이 걸리기라도 한 듯 자기 영혼을 쏟아가며 항거하고 변증하고 설득했습니다. 왜냐하면 갈라디아 교회에 닥친 위기가 ‘율법을 따를 것이냐 믿음을 따를 것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복음을 따를 것이냐, 하나님의 복음을 따를 것이냐’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편지의 서두에서 ‘내가 사도가 된 것은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된 것’(1:1)이라고 선언한 것도 그 때문이고,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1:11-12)이라고 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바울의 이 말을 오고 오는 모든 세대의 교회들에게 하는 말이라고 듣습니다. 바울이 당면한 역사적 현실과 무관하게 듣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모든 세대의 교회들을 향해 이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전도한 1세기 갈라디아교회를 향해 이 말을 했습니다. 특별히 바울을 비난하는 자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입니다.


이렇게 당시의 상황을 감안해서 들으면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는 말이 좀 다르게 들립니다. ‘나를 비난하는 자들이 전하는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는 말로 들립니다. 예, 바울이 말하려고 하는 핵심 논쟁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은 복음이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복음이냐’ 하는 것이 갈라디아서의 핵심 논쟁입니다. ‘믿음이냐 율법이냐’가 아니라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냐’가 갈라디아서의 핵심 이슈요 핵심 논쟁입니다. 이것이 갈라디아서의 핵심 논쟁이기 때문에 바울이 편지 서두에서 ‘내가 사도가 된 것은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되었다’고 선포한 것이고,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못 박은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사람의 뜻으로 말미암은 복음이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복음이냐’가 갈라디아서의 핵심 논쟁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논쟁의 흐름을 따라가며 읽어보세요. 다 그 이야기입니다.

 

바울이 자기 이력을 밝히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보기 전에 자기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이렇게 밝힙니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다.”(1:13-14)

한 마디로 자기는 진짜 유대인이라는 말입니다. 겉뿐만 아니라 뼛속까지 진짜 유대인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뼛속까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은 자기의 변화가, 예수를 핍박하던 것에서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의 변화가 인간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대부분 아시겠지만 바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 왕의 직계 후손입니다. 유대인 중에서도 율법에 엄격하다는 바리새파 출신입니다. 거기다가 길리기아(갈라디아 동남쪽) 다소 출신입니다. 1세기의 다소는 교육과 문화의 도시로 유명했습니다. 고대 학자인 스트라보는 다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다소 사람들은 철학과 모든 지식 분야에 매우 열심이었다. 학파나 철학자들의 강의에 관해서는 아테네인과 알렉산드리아인, 그밖에 이름 있는 어느 곳도 능가한다. ~~ 다소에는 모든 종류의 수사학파가 존재한다. 많은 인구가 있고, 강력했으며, 길리기아의 수도가 될 만한 특성을 갖추고 있었다.”

바울은 이렇게 활발한 교육과 문화의 도시에서 헬라어를 사용하며 자랐고 수사학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청소년 시절에 예루살렘으로 유학을 가서 가말리엘이라는 최고의 스승 밑에서 히브리어로 된 구약성경을 읽고 배우며 유대 전통을 몸에 익혔습니다. 바울은 바리새파에 속한 자로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빌3:6). 예루살렘에 살면서 대다수의 유대인이 사용하던 아람어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여러 가지 면에서 바울은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었습니다. 헬라어와 성서 히브리어, 아람어까지 자유로이 읽고 쓰고 말하고 듣는 최고의 지성인이었습니다. 거기다가 나면서부터 다소의 시민권에다가 로마의 시민권까지 가졌습니다. 이 정도면 갖출 건 다 갖춘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질 수 있는 특권은 다 가진 엘리트 중의 엘리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바울, 앞길이 대낮같이 밝은 바울이 예수당을 따라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유대 전통을 거부하는 예수당,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를 받는 예수당, 바울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전혀 다른 길을 가는 예수당을 따라야 할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인간적으로 보나 사회적으로 보나 손해날 것이 빤하고 망할 것이 빤한데 왜 예수당을 따르겠습니까? 예수당을 따를 이유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예수당에 속할 이유도 없고 예수당이 될 가능성도 애당초 없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바울이 왜 예수당을 따랐을까요? 왜 지금까지 그렇게도 반대했던 예수의 종이 되었을까요? 바울은 그 이유를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설명합니다.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라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1:15-17)

한 마디로 사람 따라나서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것이 괜찮아 보여서 따라나선 것 아니고, 가까운 사람과 의논한 결과 따라나선 것 아니고, 먼저 사도된 자들의 권유를 받아 따라나선 것 아니라는 말입니다. 앞뒤 손익계산을 해보니 크게 성공할 것 같아서 따라나선 것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직 하나님이 부르셔서, 예수의 복음을 이방에 전하라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부르셔서 예수의 종이 됐다는 말입니다. 열두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즉각 따라나선 것처럼 자기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즉각 따라나섰다는 말입니다. 이 길이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을 스스로 부정해야 하는 길임에도 불구하고, 핍박과 고난이 눈앞에 펼쳐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쌓아왔던 것들을 다 잃게 될 것이 빤해 보임에도 불구하고 즉각 따라나섰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으로 물읍시다. 바울은 왜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을 스스로 부정해야 하는 이 길, 지금까지 쌓아왔던 것들을 다 잃게 될 것이 빤해 보이는 이 길, 핍박과 고난이 눈앞에 펼쳐져 있는 이 길을 즉각 따라 나선 것일까요? 하나님이 두려워서일까요? 즉각 따라 나서지 않으면 죽을까봐 겁나서일까요? 아닙니다. 자기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가 너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보는 순간, 부활하신 예수가 하나님의 최종적인 계시라는 것이 깨달아졌기 때문입니다.

 

사실 바울은 어느 누구보다도 이스라엘을 부르신 하나님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을 부르신 하나님,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 그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모세를 부르시고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신 하나님,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신 하나님,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불순종하자 다시 흩으신 하나님, 바벨론 포로가 되게 하신 하나님, 하지만 끝내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하신 하나님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하나님에게 소망을 걸었고, 그 하나님께서 끝내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올곧게 살려고, 율법을 따라 살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십자가에 죽은 자를 메시아라고 믿고 따르는 자들을 핍박한 것도 그래서였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 죽은 자가 바울 앞에 나타났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부르시고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고 탄식하시며 바울 앞에 나타났습니다. 이 사건은 단지 죽음에서 살아난 억세게 운수 좋은 한 사람을 목격한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건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죽은 자를 일으켜 하나님의 보좌 우편으로 들어 올리신 것을 목격한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계시가 최종적으로 성취된 것을 목도한 사건이었습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를 보는 순간, ‘아~~ 이 분이 하나님의 최종적인 계시로구나.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하나님, 모세에게 말씀하신 하나님, 다윗에게 말씀하신 하나님, 여러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마지막 때에 그의 아들 예수를 통해 말씀하셨구나.’라고 깨달았습니다. ‘지금까지 아브라함을 통해 말씀하시고, 모세를 통해 말씀하시고, 다윗을 통해 말씀하시고,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셨던 것들이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최종적으로 성취됐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하나님의 최종적인 계시요 모든 계시의 완성이라는 놀라운 진실이 깨달아졌습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바울은 지금까지 아브라함 이야기, 모세와 출애굽 이야기, 율법 이야기, 제사 이야기, 다윗 이야기,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을 랍비들이 설명해주는 대로, 부모와 전통이 말하는 대로 이해하고 믿고 따랐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고 나니 지금까지 들어왔던 이야기가 새롭게 들렸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의 백성으로 부르신 이야기가 얽힌 실타래 풀리듯 술술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새롭게 이해되고 해석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성경 이야기만 그런 게 아닙니다. 모든 이야기는 끝까지 들어야 풀립니다. 소설도 마지막 장까지 읽어야 풀리고, 영화도 끝까지 봐야 스토리가 이해되고 연결되고 해석됩니다. 하나님의 계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도 중간까지만 봐서는 풀리지 않습니다. 어느 한 부분만 봐서도 풀리지 않습니다. 아브라함 이야기를 아무리 열심히 들어도, 모세 이야기를 천만 번 들어도, 선지자들의 이야기를 귀가 닳도록 들어도 그것만으로는 하나님의 계시가 풀리지 않아요. 마지막 계시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야기를 들어야 비로소 앞에 있는 계시가 풀립니다. 마지막 계시인 예수님을 보기 전까지는 풀렸다 해도 풀린 게 아니에요. 마지막 계시를 봐야 비로소 풀립니다. 마지막 계시를 봐야 제대로 풀립니다.

바울도 그랬습니다. 마지막 계시인 예수를 보고 나서야 비로소 풀렸습니다. 지금까지 들어왔던 모든 이야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부른 이야기들 속에 숨어 있던 의문들이 얽힌 실타래 풀리듯 술술 풀렸습니다. 새롭게 이해되고 해석됐습니다. 그래서 즉각 따라 나선 겁니다. 박해와 핍박이 눈앞에 펼쳐져 있고,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을 스스로 부정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주저함이나 두려움 없이 기쁘게 따라 나선 겁니다.


결국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자기 이력을 밝힌 것은 자기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은 자기를 비판하는 자들의 복음이 사람의 뜻으로 된 복음이라는 사실을 폭로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바울은 알았습니다. 바울을 비판하는 자들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바울은 알았어요. 저들의 가르침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지 않고 사람의 뜻으로 된 것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꿰뚫어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들의 복음을 ‘다른 복음’이라고(1:6) 단언한 것입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누구든지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분노 섞인 말을 한 것입니다(1:7,8).

 

바울은 이렇게 해서 갈라디아서의 핵심 논쟁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드러냈습니다. ‘믿음이냐 율법이냐’ 하는 것이 갈라디아서의 핵심 논쟁이 아니고,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복음이냐 사람에게서 비롯된 복음이냐’ 하는 것이 갈라디아서의 핵심 논쟁이라는 것을 선명하게 드러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가 직면한 문제도 똑같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복음을 듣고 따르느냐, 사람에게서 비롯된 복음을 듣고 따르느냐’ 하는 것이 한국교회가 직면한 가장 핵심적인 문제입니다. 지금 많은 목사와 성도들이 사람에게서 비롯된 복음을 하나님의 복음인 줄 알고 추종하고 있습니다. 명성교회가 목사 세습을 강행한 것도 실은 사람에게서 비롯된 복음을 하나님이 복음인 줄 알고 추종한 결과입니다.


물론 제 이야기에 반대할 사람이 많을 겁니다. 상당수 목사와 그리스도인들이 제 이야기를 부정할 것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고, 하나님의 복음을 충실히 믿고 있다고 주장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압니다. 하나님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복음에 눈뜬 사람은 압니다. 한국교회가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복음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비롯된 복음을 열심히 추종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갈라디아서만 제대로 읽어도 알아요. 그런 면에서 한국교회는 지금 갈라디아서를 읽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를 읽고 핵심 논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힘써야 합니다. 그래야 한국교회가 바로 설 수 있습니다. 사람의 복음에서 하나님의 복음으로 돌아설 수 있습니다. 종교에 갇힌 생활에서 구원을 사는 생활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참된 복음의 영광을 알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번 기회에 갈라디아서를 깊이 읽으시기 바랍니다. 갈라디아서를 통해 하나님의 복음에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복음에 깊이 뿌리내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