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이해를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느끼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이해가 돼야 직성이 풀리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뭘 이해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이 사는 도리를 이해하는 것도 쉽지 않고, 하나의 사건을 이해하는 일도 쉽지 않고, 한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이해하는 일도 쉽지 않고, 믿음으로 구원받는 이치를 이해하는 일도 쉽지 않고, 율법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바울이 쓴 편지를 통해 바울을 이해하는 일또한 쉽지 않습니다. 사실 설교자에게 가장 버겁고 힘겨운 일은 성경이 말하려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읽어내고 전달하는 일입니다. 설교자가 감당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책무도 성경이 말하려 하는 바가 뭔지를 읽어내고 전달하는 일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쉬운 일 같아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은 목사가 해야 하는 일중에 가장 버겁고 힘겨운 일,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이 일입니다. 다른 일은 상대적으로 쉬워요. 성도를 심방하는 일, 마음을 위로해주는 일, 복을 빌어주는 일, 밥 사는 일, 고민을 들어주는 일, 구제하는 일, 프로그램 돌리는 일, 의미 있는 이벤트를 벌이는 일, 세상을 비판하는 일은 그래도 쉽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통해 말하려는 바가 무엇인지를 읽어내는 일은 정말 어렵습니다. 또 읽어낸 것을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일은 더 어렵습니다. 제가 부족해서 그렇겠지만 설교를 준비할 때마다 참 어려움을 느낍니다.
갈라디아서는 갈라디아 교회가 직면한 문제를 이야기한 편지입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직면한 문제가 뭐였습니까? 한 마디로 요약하면 예수를 믿는 유대인과 예수를 믿는 이방인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예수를 믿는 이방인들에게 율법의 행위를 요구해야 하느냐 하지 않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였습니다.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기 전까지는 이런 문제가 불거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이방인들이 많아지면서 이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예수를 믿는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행해야 하느냐 하지 않아야 하느냐, 안식일을 비롯한 유대 절기를 지키게 해야 하느냐 하지 않아야 하느냐, 음식에 관한 정결의식을 지키게 해야 하느냐 하지 않아야 하느냐,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느냐 할 수 없느냐, 하는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이 문제는 어떻게 보면 형식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몇몇 행위와 관련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형식의 문제나 행위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겉으로 보면 형식의 문제 같아 보이지만 이 문제가 불거지게 된 배경을 추적해보면 이 문제 속에는 형식 이상의 문제가 숨어 있었습니다. 바로 율법의 문제였습니다. 율법에 대한 이해가 서로 다른데서 이 문제들이 불거져 나온 것이었습니다. 사실 인간의 문제는 대부분이 이해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손해냐 이익이냐 하는 것 때문에도 수없이 싸우고 갈등합니다만 어떻게 이해하느냐 하는 것 때문에 더 많이 갈등하고 더 치열하게 싸웁니다.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도 예외가 아니었어요. 겉으로 보면 할례 문제라든지 정결 의식 문제 때문에 갈등하고 싸우는 것 같지만 사실은 율법에 대한 이해가 서로 달라서, 바울이 율법을 이해하는 것과 유대주의자들이 율법을 이해하는 것이 서로 달라서 빚어진 갈등이고 혼란이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꿰뚫어봤습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누구보다도 율법에 대하여 열심이었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빌3:6). 바울은 자기의 복음을 비난하는 유대주의자들보다 훨씬 율법에 엄격한 바리새파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도 저들보다 더 뜨거웠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그가 예수님을 알고 나서 어떻게 됐습니까? 그전처럼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했습니까? 아닙니다. 자기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했습니다(딤전1:15).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자랑했었는데 예수님을 알고 난 후에는 정반대로 ‘죄인 중의 괴수’라고 했습니다. 마음으로는 의를 행하고 싶은데 실제로는 원하는바 의를 행하지 못하고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한다고 탄식했습니다(롬7:19). 자기에 대한 이해가 180도 달라진 겁니다. 완전히 뒤집어진 거예요.
자, 왜 이렇게 달라진 걸까요? 바울 자신이 달라져서일까요?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흠이 없었는데 예수님을 알고 나서 갑자기 흠이 많아져서 그런 것일까요? 당연히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를 바라보는 눈이 달라져서 그런 겁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율법의 눈으로 자기를 바라봤고, 예수님을 알고 난 후에는 성령의 눈, 하나님의 눈으로 자기를 바라봤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겠습니다.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문자로 기록된 율법의 눈으로 바라봤고, 예수님을 알고 난 후에는 영에 새겨진 율법의 눈으로 바라봤기 때문입니다. 예, 단지 그 차이에요. 율법의 눈으로 볼 때까지는 자기는 정말 흠 없이 깨끗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눈으로 보니까 자기가 행하는 모든 것들이 더럽고 추악하기가 짝이 없어 보였습니다. 율법의 눈으로는 보지 못했던 죄악들이 새롭게 보였습니다. 진짜 자기를 본 것이지요. 죄인 중의 괴수인 자기를 본 거예요.
바울은 분명히 율법을 따라 살았습니다. 적어도 문자로 기록된 율법을 범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눈으로 보니까 어느 것 하나도 의롭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행한 모든 것들이 명명백백히 율법을 범한 범법행위였습니다. 바울은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충격에 빠졌을 겁니다. 경악을 금치 못했을 겁니다. 자기에게 걸었던 모든 희망과 긍지가 비 맞은 담벼락 무너지듯 무너져 내렸을 겁니다.
그리고 깨달았겠지요. ‘아하~~ 율법의 눈과 성령의 눈은 이렇게 다르구나. 율법의 눈으로는 죄를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이로구나. 뿐만 아니라 율법의 행위로는 결코 의에 이르지 못하는구나!!!’하는 걸 뼈저리게 깨달았을 겁니다. 사실입니다. 율법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 죄를 깨우쳐 알게 하는 기능을 하는데 정작 율법으로는 진짜 봐야할 악을 못 봅니다. 율법으로는 눈에 보이는 ‘죄악’만 보지 눈에 보이지 않는 ‘죄’는 못 봐요. 오직 성령의 눈으로 봐야 죄의 실상이 보입니다.
바울도 그랬습니다. 바울은 어려서부터 율법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죄를 보지는 못했습니다. 자기를 보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을 통해 비로소 죄를 봤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비로소 자기를 봤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 죄를 보고 자기를 보고 나니까 비로소 율법의 한계가 보였습니다. 율법이 선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율법에는 한계가 있다는 진실, 하나님의 뜻을 축소하고 왜곡하는 위험성이 있다는 진실이 보였습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는 진실이 보였습니다. 율법이 있는 유대인이나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나 하나님 앞에 차이가 없다는 진실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진실에 눈이 열리자 하나님이 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는지, 왜 십자가에 죽게 하시고 부활하게 하셨는지, 그리고 왜 성령을 보내셨는지, 왜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게 하셨는지가 절절하게 이해됐습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기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밖에는 달리 구원의 길이 없다는 사실이 정말 가슴 절절하게 이해됐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자 말자 곧바로 예수의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의 복음을 부정하고 핍박하던 길에서 예수의 복음을 자랑하고 증거하는 길로 180도 방향 전환을 했습니다. 바울은 아주 담대하게 선포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2:16)
그런데 유대주의자들은 예수를 믿으면서도 이런 진실을 보지 못한 것이 분명한 듯 보입니다. 저들이 바울의 복음을 비난한 걸 보면 바울이 예수님을 통해 보았던 엄청난 진실들을 보지 못한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바울이 보기에도 저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는 자들’로 보였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는 것이 유대주의자들의 정체였습니다. 그래서 저들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입니까?”(2:17)
자, 여기서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한다’는 것이 무슨 말일까요?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면서도 마음으로는 여전히 의롭게 되려 한다는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자기 안에 의롭게 되고자 하는 욕망, 율법을 행함으로써 자기 의를 증명하고자 하는 열망이 펄펄 살아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면서도 여전히 율법의 체제 아래에서 살고 있다는 말이에요. 그리고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면서도 자기 의를 증명하고자 하는 열망이 살아있다는 것은 결국 ‘내가 살아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물읍시다. 저들은 왜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한 것일까요? 왜 그리스도를 믿으면서도 율법의 체제 아래에서 살기를 고집한 것일까요? 바울의 복음을 들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 또한 왜 그리도 빨리 유대주의자들의 말에 훅 넘어간 것일까요? 크게 두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인간 속에는 ‘자기 의에 대한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 속에는 수많은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성공에 대한 욕망, 부에 대한 욕망, 행복에 대한 욕망, 자유를 맘껏 향유하고픈 욕망, 내적인 공허함을 채우고자 하는 욕망, 사랑에 대한 욕망, 생존하고자 하는 욕망, 유명해지고자 하는 욕망,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 이기고자 하는 욕망 등등 수많은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많은 욕망 중에서도 가장 강렬하고 근원적인 욕망은 단연 ‘자기 의’의 욕망입니다. 자기를 증명하고자 하는 이 욕망이야말로 가장 강렬하고 근원적인 인간의 욕망입니다. 최근에 안철수 씨가 인터뷰하면서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흔적을 남기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흔적을 남긴다는 것이 뭡니까? 한 마디로 자기 존재를 증명하고 싶다는 말입니다.
그래요. 모든 사람 속에는 자기를 증명하고 싶은 강렬한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습니다.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예외가 없어요.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주인공이고 싶고, 자기 힘으로 뭔가를 해냄으로써 자기를 증명하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덕분에 의롭게 됐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완전히 쪽팔리잖아요. 당당하게 나를 증명하고 싶은데 나를 증명할 길이 없잖아요. 텔레비전 연속극에서 ‘나, 이대 나온 여자야!’라고 뻐기듯이 ‘나,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울 것 없이 살아왔어!’라고 할 수 있어야 자부심을 내세울 수가 있는데 ‘예수님 덕분에 의롭게 됐다’ 그러면 자부심을 내세울 여지가 없잖아요. 그래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으면서도 의롭게 되려 하는 것입니다. 자기를 증명하고 싶은 욕망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둘째, 온 세상이 율법의 체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하나에서 열까지 율법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물론 사람들이 법을 지키지는 않지만, 힘 있는 놈들일수록 법 위에서 법을 떡 주무르듯 하며 살지만 그래도 아무튼 법이 세상을 통치하는 도구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법이 없으면 세상이 통제되지 않기 때문에 모든 민족 모든 나라가 법으로 세상을 통치합니다. 사실입니다. 모든 사람은 국가의 헌법을 비롯해서 도덕의 법, 전통의 법, 상식의 법, 종교의 법, 양심의 법이라는 그물망 속에서 살아갑니다. 참 묘해요. 혼자 무인도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양심의 법을 피하지는 못합니다. 자기 행동을 관찰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누군가가 자기를 보고 있는 것 같은 시선을 느낍니다. 자기가 자기를 법의 잣대로 판단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자 습성입니다. 이 본성과 습성이 예수를 믿어도 안 바뀌어요. 율법이 없으면 왠지 갈피가 안 잡히고 허전하고 불안하고 그럽니다. 거기다가 눈만 뜨면 율법의 체제가 삶을 옥죄고 들어옵니다.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이 법의 잣대 아래 놓입니다. 세상이 요구하는 율법의 체제에 맞게 살아야 도태되지 않고 인정받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서도 율법의 체제 아래에서 살아가는 거예요.
사실입니다. 사람 속에는 자기를 증명하고 싶은 욕망이 있기 때문에 예수를 믿으면서도 의롭게 되려 하는 것이고, 온 세상이 율법의 체제 아래 있기 때문에 예수를 믿으면서도 율법의 체제 아래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그리도 빨리 바울의 복음을 떠나 유대주의자들의 간계에 넘어간 것도 다 그 때문이에요.
결국 ‘내가 죽지 않아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죽지 않아서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는 것이고, 내가 죽지 않아서 율법 체제 아래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도 이 사실을 꿰뚫어 알았습니다. 그래서 말했습니다. “나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2:19) 그리고 20절에서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선포했습니다.
이 두 말은 같은 말입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은 ‘내가 죽었다’는 말이고, ‘내가 죽었다’는 말은 ‘자기 의에 대한 욕망’에 대하여, ‘나를 증명하고자 하는 욕망’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입니다. 예, 죽음이 핵심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죽는 일입니다. 적잖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믿는 것을 그저 신앙 하나 갖는 것쯤으로 생각하고, 예수가 구원을 준다고 하니 구원 받기 위해서 예수에게 줄서는 것쯤으로 생각하는데 예수를 믿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것은 예수와 함께 내가 죽는 것입니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내가 죽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세례가 가리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물속에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은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부활생명으로 일어난 것을 표상합니다.
예, 죽는 것이 핵심입니다.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이고, 예수와 함께 죽어야 예수와 함께 부활생명으로 일어납니다. 자기 의에 대한 욕망, 자기를 증명하고자 하는 욕망에 대하여 죽어야 나로부터 해방될 수 있고, 율법의 체제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무술년 새해가 출발했는데 올 한 해를 풍성하게 살려면 죽으십시오. 죽어야 살고, 죽으면 삽니다. 죽으면 죽을수록 풍성하고 자유롭게 살 힘이 생깁니다. 죽으면 죽을수록 무엇에도 걸리지 않는 자유의 삶, 기쁨의 삶, 하나님을 향한 삶을 살 힘이 생깁니다.
그래서 바울은 날마다 죽었습니다. 예수와 함께 날마다 죽었습니다. 자기에 대하여 죽고, 율법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기가 죽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인지하며 살았습니다. 그 결과 자기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고, 율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대주의자들은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마땅히 인지했어야 하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자기가 펄펄 살아있었던 것입니다. 자기 의에 대한 욕망이 꿈틀거린 나머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대다수 그리스도인들도 비슷합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예수와 함께 자기가 죽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않은 채 삽니다.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간간이 듣기는 했지만 새까맣게 잊고 삽니다. 아니, 좀 더 정직하게 말하면 새까맣게 잊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죽는 것을 거부합니다. 예수를 통해 영생을 얻고 싶고, 평안을 얻고 싶고, 복을 얻고 싶어 할뿐이지 예수와 함께 죽고 싶어 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다들 자기 안에 갇혀 사는 겁니다. 자기 의에 대한 욕망, 성공에 대한 욕망, 부에 대한 욕망, 행복에 대한 욕망, 자유를 맘껏 향유하고픈 욕망, 내적인 공허함을 채우고자 하는 욕망, 사랑에 대한 욕망, 생존하고자 하는 욕망, 유명해지고자 하는 욕망,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 이기고자 하는 욕망에 갇혀 사는 겁니다. 율법에 갇혀 살고, 세상의 종노릇하며 사는 겁니다.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인지하면 기쁨의 율법 ‧ 자유의 율법 ‧ 성령의 율법, 사랑의 율법을 따라 살 수 있는데 그러지 않기 때문에 종교의 법 ‧ 도덕의 법 ‧ 전통의 법 ‧ 상식의 법 ‧ 국가의 법 ‧ 양심의 법에 갇혀 사는 겁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는 욕망의 헛발질을 하며 사는 겁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살지 못하고 세상에 대하여 사는 겁니다. 누가 더 큰가, 누가 더 잘 하는가, 누가 더 능력이 있는가, 끝없이 비교하면서 상대적인 박탈감에 사로잡혀 살고, 불안과 초조에 시달리며 사는 겁니다. 예, 어쩔 수 없어요. 예수와 함께 죽지 않은 자, 예수와 함께 죽었다 하더라도 예수와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인지하지 못하는 자는 이렇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여, 다시 말씀드립니다. 여러분, 예수와 함께 죽으십시오. 나는 이미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날마다 죽기를 힘쓰십시오. 자기 의에 대한 욕망, 자기를 증명하고자 하는 욕망에 대하여 죽으십시오. 죽으면 살고, 죽어야 삽니다. 죽으면 죽을수록 풍성하고 자유롭게 살 힘이 생깁니다. 죽으면 죽을수록 무엇에도 걸리지 않는 자유의 삶, 기쁨의 삶, 하나님을 향한 삶, 생기 넘치는 삶을 살 힘이 생깁니다. 기쁨의 율법 ‧ 자유의 율법 ‧ 성령의 율법, 사랑의 율법을 따라 살 능력을 얻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자가 예수를 믿는 자입니다. 율법에 대하여 죽은 자가 예수를 믿는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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