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설교

향유옥합을 깨트린 마리아가 칭찬받은 진짜 이유 (마26:6-13)

새벽지기1 2017. 7. 5. 12:16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귀한 향유 한 옥합(玉盒)을 가지고 나아와서 식사하시는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이것을 많은 갑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 여자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사를 위하여 함이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마26:6-13)  


마리아가 향유 옥합을 깨트려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사건이다. 네 복음서가 공통으로 기록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사건 중에 하나다. 마태, 마가, 누가 셋은 예수님의 공생애를 연대기 식으로 사건 위주로 기록해 내용이 거의 일치한다.

그런데 예수 사건을 직간접으로 목격한 세대가 죽자 점차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 갔다. 예수가 누구인지, 십자가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정확히 밝힐 필요가 생겼다. 제4복음으로 불리는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정체성이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독생자임을 변증할 목적으로 가장 늦게 저작되었다. 이미 공관복음에 소개된 사건들은 중복할 필요가 없어 생략했다.

역으로 말해 요한복음에도 함께 기록된 사건은 예수가 누구이며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밝히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는 뜻이다. 본문의 마리아의 도유(塗油) 사건도 이런 관점에서 해석하지 않으면 온전한 의미를 놓칠 수 있다.

거룩한 낭비의 온전한 의미

마리아는 결혼할 때 쓸려고 모아둔 비싸고 귀한 향유를 전혀 아끼지 않고 예수님을 위해 사용했다. 오늘날의 신자들도 내가 가진 것 모두가 하나님께 받은 것이기에 그분께 되돌려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어떤 수고와 희생이 따르더라도 감수하고 하나님의 일에 충성해야 한다. 흔히 말하듯 하나님의 일을 함에는 “거룩한 낭비”를 마다하지 않아야 한다. 그럼 하나님이 반드시 풍성히 채워주신다. 제가 목회사역을 한 이후로 실제로 세밀하게 절감하고 있기에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은 진리다.

그러나 아끼지 않고 바친 신자의 그 정성, 열심, 헌신이 갸륵해서 하나님이 더 채워주신다고만 이해하면 자칫 반쪽짜리를 넘어 틀린 신앙으로 흐를 수 있다. 큰 틀에서 보면 하나님과 신자끼리 서로 주고받는 거래라는 차원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어떤 인간도 탐욕의 본성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기에 하나님께 바치면 하나님이 채워주신다는 진리가 100% 순수성을 유지하며 실행되기는 불가능하다. 인간 부모와 자식 간에도 근본적으로 거래라는 단어는 성립되지 않는다. 자식이 아직 어렸을 때에 잠시 교육시킬 목적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진정으로 거룩한 낭비란 내가 바쳤으니 하나님께 받을 것이라는 예상 기대 계산 등이 전혀 내포되지 않았다는 것이 전제다. 쉽게 말해 바친 만큼 못 받으면 어떻게 하지라는 생각이 전혀 없어야만 자기 것을 전혀 아끼지 않고 드릴 수 있다. 그런 드림이 의미하는 바는 나라는 인간의 능력은 제로이며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세상의 것들로 이루지 않는다는 믿음이다. 내게 필요하고 소망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 당신이라는 고백이다. 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니 당신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는 간구다.

그런 고백과 간구의 진실 됨을 입증하는 것이 모든 것을 드리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신자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섭리로 진행되고 있는 범사에 실제로 감사함으로 순응하고 있다면 거룩한 낭비를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거룩한 낭비의 더 중요한 나머지 반쪽의 뜻이 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우리 눈에는 아무리 적게 보여도, 나아가 정반대로 무익하고 심지어 우리가 가는 길에 훼방만 놓는 걸림돌 같아도 하나님 쪽에서 보면 크지 않은 일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바치는 것이 손이 부끄러울 정도로 아무리 작아도 순전한 진심을 담아 드리면 하나님은 크게 받으시고 우리에게 최고 큰 유익으로 이끄신다. 한마디로 하나님 쪽에서 도리어 우리에게, 우리와 비교도 할 수 없을 차원의 거룩한 낭비를 하신다는 것이다. 거룩한 낭비가 신자가 하나님에게 바쳐야 할 의무라기보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베푸는 은혜다.    

본문의 마리아는 분명 거룩한 낭비의 표본이다. 그러나 그에게 주님이 먼저 은혜를 베풀었을 뿐 아니라 그런 헌신을 하고 싶은 마음을 심어주신 이도 주님이다. 나아가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이 여인이 행한 일도 함께 기념하라고 했다.(13절) 주님은 어쨌든 그 둘을 동격화 시켰다. 마리아로선 이 얼마나 큰 축복이며 영광인가? 마리아가 순전한 마음으로 거룩한 낭비를 하자 주님은 그것과 비교가 안 되는 거룩한 낭비로 되돌려주셨다.

가난한 자는 항상 있어야 하는가?

예수님이 마리아를 그렇게 높여준 이유는 무엇인가?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행했기 때문이라고 한다.(10절) 언뜻 보면 조금 이상한 것 같다. 예수님 혼자만 좋으면 만사 오케이인가? 무조건 하나님께 가장 먼저 최고 좋은 것으로 드려야 하는가? 이어서 하는 말씀도 그렇다. 어차피 가난한 자는 있게 마련인데 그들이 게으르거나 팔자소관 때문인 것처럼 들린다.

그러니까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그중에서 제자들이 앞장서서 마리아가 거룩한 낭비가 아니라 헛된 낭비를 했다고 비난했다.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일이 구제보다 더 열등한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는 것이다.  

제자들의 그런 분노 내지 불편한 마음을 아시고 주님은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지만 당신께선 그렇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그 일차적인 뜻은 말 그대로 이제 곧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면 이 땅에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보혜사, 당신과 똑 같은 삼위 하나님 성령님이 오실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예수님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니고 신자가 가는  땅 끝까지, 세상 끝 날까지 함께 동행해주실 것이다. 그럼 하나님이 가난한 자와 항상 함께 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떠난 적이 단 한시도 없다.

무슨 뜻인가? 눈에 보이는 현실 세계 안에서 가난한 자를 먹이고 입힐 책임은 신자에게 맡겼다는 것이다. 정작 신자가 거룩한 낭비를 할 대상은 성령의 인도에 따라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바로 그 일이라는 것이다.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하신다고 즉, 너희의 몫이라고 했지 않는가? 그 말씀은 또 가난이 하나님이 복을 덜 주어서가 아니라는 뜻이다. 지구상의 모든 인간이 충족히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이 땅에 하나님은 다 베푸셨지만 인간의 끝없는 탐욕과 죄악으로 인한 시기 다툼 때문에 가난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가난은 너희가 저지른 잘못 때문이니 그 잘못을 너희가 제거하라는 것이다.

요한의 관점에서 보라.

이처럼 성경은 인간이 얼마나 사악한지 그에 대비해 하나님의 긍휼이 얼마나 큰지를 밝혀 놓은 책이다. 최초 인간 아담이 하나님을 눈앞에 대놓고 거역한 후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보인 첫째 반응이 무엇인가? 여자의 후손이 와서 사탄의 머리를 깨트려 죄에서 구원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창3:15) 16절 이하에서 이브와 아담에게 벌을 주기 전에 축복부터 하셨다.

그 이후 성경은 그 원시복음을 더 명료하게 계시하다가 실제로 역사 속에 골고다 십자가로 완전히 실현시켰고 장차 얼마나 아름답고 풍성한 모습으로 완성시킬 것인가에 관해 기록해 놓았다. 성경의 마지막 책 계시록도 요한복음을 지은 요한의 저작인데, 그래서 예수가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선언한다. 신구약 66권의 맨 마지막 구절(계22:21)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모든 이에게 있기를 하나님께서 소원하는 것으로 마감한다.

마리아의 도유 사건도 요한처럼 예수님을 처음과 마지막 되는 위치에 두고 이해해야만 한다. 특별히 예수님이 마리아가 당신께 잘한 것이라고 하신 말씀이 그러하다. 우선 간단히 풀이하면 그녀는 예수님 한 명에게 잘했다. 제자들은 가난한 자들, 여러 명에게 잘해야 한다고 여겼다. 마리아가 부은 향유는 나드 한 근으로 노동자 300명의 하루 품삯에 해당된다고 한다. 지금 식사 중에 일어난 사건이므로 3백 명도 넘는 사람들이 거창하게 먹고 즐길 수 있었다는 뜻이다.

바꿔 말해 제자들은 더 많은 사람에게 더 많은 행복을 주는 것이 더 선한 일이라고 믿었다. 최대공약수의 만족을 추구하는 공리주의적 발상을 한 것이다. 주님은 지금 그런 사상은 복음과 전혀 무관하다고 부인한 것이다. 물론 주님이 더 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 행복해지는 것 자체를 부인한 것이 아니다. 그 영혼을 천국에만 인도하겠다는 뜻도 아니다. 인간에게 참 행복, 참 생명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그런데 그 길은 오로지 예수님 당신께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렸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에게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는 예수님과 개인적으로 인격적인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 일이 전 세계의 기아 문제를 퇴치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만약에 예수님이 보통 인간이었다면 아예 말도 안 되는 말씀이다. 사람들의 공분을 사서 마땅하다. 제자들이 마리아를 제외하고 다 욕하고 떠나도 변명의 여지가 없다.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은 당신이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전제가 없다면 이 말씀의 진의가 결코 이해될 수 없다. 성경은 우스꽝스런 책으로 폐기되어야 한다. 요컨대 제자들은 여전히 주님을 인간 스승으로 대하고 있는 반면에 마리아가 예수님을 보는 시각은 달랐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나에게 잘했다는 뜻은?

이 사건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하기 전에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학자들의 정설이다. 마태는 시간의 순서를 무시하고 이곳에 기록해 놓았다. 마태가 의도한 순서대로 해석해보자. 예수님은 마지막 심판 때에 지극히 작은 자 한 명에게 잘 했는지 여부로 심판의 기준으로 삼겠다고 했다. 제자들의 의도를 순수하게 받아들이면 이왕이면 여러 명에게 더 잘하자는 뜻일 것이다.

설령 정설대로 고난주간 이전에 이 사건이 있었다 해도 제자들은 스승에게서 비슷한 가르침을 자주 들었을 것이다. 성경은 주님은 이웃 사랑이 하나님 사랑과 동격이며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을 이룬다고 강조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제자들에게 공리주의적 발상이 없었다 해도 스승의 가르침을 선한 의도로 실행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마태는 마지막 심판의 기준을 제시한 후에 주님이 마지막이자 네 번째로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예고한 사실도 첨가하고 있다. 마리아는 바로 그 말씀에 주목했다. 유대인들은 시신에 기름을 바르는 관습이 있었다. 어폐가 있지만 마리아는 주님의 천국환송예배들 드린 것이다. 주님의 장례식을 앞당겨 거행한 것이다. 주님도 내 장사를 위한 일이었다고(12절) 그 의미를 바르게 해석해 주었다.

반면에 제자들은 여전히 스승이 죽는다는 사실조차 믿지 않았다. 최고로 잘 봐주어야 마지막 심판에서 작은 자에게 잘한 일로 구원 받으려고만 했다. 자신들의 안위에만 관심이 쏠렸다. 반면에 마리아는 자기 소유가 다 없어지는 것에는 염려도 관심도 없었다. 예수님이 더 이상 이 땅에 계시지 않는다고 하니 너무 안타깝고 애처로웠던 것이다.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심정을 그렇게라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다.

주님이 그녀에게 나에게 잘했다고 칭찬한 것은 마리아는 그녀 자신을 위해서 잘한 일은 없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그 반대라는 것이다. 예수님 대신 자신에게만 잘하려 했고 인간들 사이에 자신을 높이는 일에만 관심을 집중했다는 것이다.

십자가 진리는 몰랐던 마리아.

그렇다고 마리아가 십자가에 담긴 하나님의 대속적 구원의 진리를 깨우친 것은 아니다. 그 사건이 장차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지에 대해선 전혀 감도 없었다. 당시의 지구상의 모든 인간들이 다 그랬다. 최고의 지성인이요 구약성경에 능통했던 바울도, 구원의 길을 탐구하려 했던 니고데모도, 심지어 3 년간 동고동락하며 예수님께 직접 배운 열두 제자도,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최고였던 베드로를 필두로 아무도 십자가를 알지 못했다.

오순절에 진리의 영인 성령이 강림하자 예수님이 사전에 가르친 대로 죄와 의와 세상 임금에 대한 심판의 의미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럴 리는 절대 없지만 만약 성령이 오지 않았다면 십자가는 영원히 비밀에 묻혔을 것이다. 아직도 하나님의 영원한 비밀의 경륜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정은 그분의 영으로만 알 수 있다.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 스스로는 전혀 추측도 못한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계시해 주어야 알 수 있고 또 계시해 주는 만큼만 알 수 있다. 성령이 역사하여 들을 수 있는 귀를 열어주어야 들린다. 성령이 듣게 해주는 들림은 항상 주님의 십자가를 더 깊이 이해하는 모습으로만 나타난다. 주님의 마음이 신자의 마음에 채워진다. 날이 갈수록 주님을 닮아가게 되고 가난하고 비천한 자들을 향한 연민의 정이 깊어지게 마련이다. 신앙이 좋고 나쁜지는 바로 이웃에 대한 긍휼이 많아지는 모습으로 판단해야 하고 마지막 심판 때에까지 그 기준은 이어지는 것이다.  

지금 마리아에게는 성경도, 성령도 임하지 않았고 십자가 죽음도 이틀 뒤라 이런 수준까지는 이르지 않았다. 예수님이 그녀를 칭찬한 이유도 그 비싼 향유를 아끼지 않을 만큼 신앙이 성숙했기 때문이 아니다. 거룩한 낭비는 어디까지나 결과적 모습이고 그 이전에 그럴 수밖에 없었던 진짜 이유가 있었다.

마리아가 믿었던 것은?

마리아가 다른 모든 이와 달랐던 유일한 점이 무엇인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다는 말씀을 있는 그대로 믿었을 뿐이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엄청난 의미를 지닌다. 우선 예수님은 말씀하신 그대로 완전하게 실천할 분이라는 뜻이다. 어떤 가감, 변개, 수정, 포기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신실하게 말씀하신 그대로 지키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이틀 뒤에 십자가에 달린다면 반드시 달린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녀는 십자가 복음의 이신칭의 교리를 몰랐다. 예수님이 죽음의 형벌을 받아 마땅한 모든 죄인을 대속할 제물인지 몰랐고, 그 죽음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둘 다 100% 만족시킨다는 것도 몰랐다. 예수가 완전한 인간이자 완전한 하나님이었기에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해소시키는데 충족한 제물이 되는지에 대해선 완전히 깜깜했다. 꿈에도 상상 못하는 내용이었다.

마리아가 알았던 유일한 내용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뿐이었다. 그분의 가르침과 예언은 실제로 완벽하게 증험된다는 사실에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아무리 말을 청산유수처럼 그럴싸하게 해도 그 사람의 됨됨이가 그렇지 못하면 그 말도 불신하게 된다.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말씀하신 그분을 믿는 것이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절대적으로 신뢰했기에 그분의 말씀도 절대적 진리임을 확신한 것이다.

예수 그분이 아니면 그런 말씀을 절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말씀에 지금껏 들었던 어떤 랍비와는 전혀 다른 권세가 있었다. 구약 성경으로 배운 어떤 선지자와도 차원이 다른 분임을 인식했다. 그 모든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바로 그 사람임을 눈치 챘다. 그래서 이 분을 통해 뭔가 큰 변혁이 일어날 것이라고 기대하며 따랐던 것이다.

남성 제자들은 사회적 정치적 종교적 변혁을 기대했지만 마리아가 본 예수는 달랐다. 우물가의 불쌍한 사마리아 여인, 현장에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 세리 삭개오, 12년간 혈루증을 앓은 여인, 베데스다 연못가의 아무도 돌보지 않는 38년 된 행려병자, 이방인인 로마 백부장 아니 그의 하인 등을 대하시는 그분의 긍휼은 인간사회의 어떤 의로운 구제와 적선과는 차원이 다름을 느꼈다.  

자기 같이 지극히 작은 자 한 명에게 베푸신 사랑은 지금껏 어떤 고상한 도덕이나 경건한 종교와는 비교가 안 되었다. 그분과 아무 말 없이 그냥 함께만 있어도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평강, 안식, 기쁨, 자유를 충만하게 느꼈다. 그래서 예수 이분은 뭔가 인간 존재 자체를 근본적으로 새롭게 개혁할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믿게 된 것이다.

실망에 빠진(?) 마리아

그런데 얼마 안 되어서 십자가에 죽으신다고 하니까 그럼 그 개혁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지? 죽은 지 사흘 후에 부활하겠다고 했지만 그 말은 정말 생면부지인지라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땅의 이 곤고한 백성들의 앞날이 과연 어떻게 될지? 십자가에 죽으시는 주님도 안타까웠지만, 그녀로선 거창하게 백성들까지 걱정할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주님과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는 자기 자신이 더 애처로웠다. 그녀는 완전히 실망에 빠져버렸던 것이다.  

주님은 절망하고 있는 그녀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셨다. 그녀에게 또 다시 거룩한 낭비를 베푸셨다. 성령이 역사하시어 십자가의 구원의 비밀의 끝자락을 조금 보여주었다. 십자가에 드러난 하나님 구속의 뜻이나, 그 후에 어떻게 진행될지 그 후 어떤 엄청난 결과를 낳을지 구체적으로는 몰랐어도 뭔가 예수님이 그냥 죽는 것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님은 로마를 충분히 대적할 수 있는 분인데도 그러지 않았다. 정치적 종교적 세력화도 꾀하지 않았다. 다만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만의 따뜻함과 인자함으로 대했다. 세상의 어떤 인간과도 다른 사랑이었다. 그래서 이 죽음도 뭔가 우리를 위한 목적이 있다는 것, 반드시 우리에게 어떤 소중하고 귀한 열매가 맺힐 것이라는 믿음이 들었다. 틀림없이 최고로 유익한 일이 자기에게 일어날 것 같았다.

지금 예수님은 바로 그 일을 위해서 당신 쪽에서 자신의 생명까지 다 내어주려 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나를 위해서 그분이 엄청나고도 거룩한 낭비를 베풀려 하고 있고 그러면 자기에게도 엄청난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 같았다. 주님의 거룩한 낭비를 깨달은 마리아로선 자기 것이 더 이상 아까울 수 없었다. 향유 한 병이 아무리 삼백 명 노동자의 품삯이라고 해도 그런 주님을 위해선 정말 아무 것도 아니기에 그녀도 거룩한 낭비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에게 낭비라는 생각도 아예 들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님을 위해 장례식을 미리 거행한다는 것이 어폐가 있다고 말했지만 더 큰 어폐를 보태어 말해보겠다. 그녀는 어서 빨리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달렸으면 싶었던 것이다. 주님의 죽음 자체를 바랐다는 것이 아니라 그 죽음을 통해 나에게 베풀어질 은혜가 정말로 궁금해진 것이다. 내 존재가 완전히 새롭게 바뀌는 개혁이 어떤 모습일지, 주님 안에서 새로워진 소속과 신분과 특권이 어떠할 것인지 어서 빨리 알고 겪어보고 싶다는 소원이 부지불식간에 있었던 것이다.

마리아가 기독교 신학적으로 십자가 교리를 전혀 몰랐지만 그녀는 이미 십자가 복음 안에 들어온 것이다. 그녀에게 성령이 간섭하여서 십자가 복음에 의해서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게 된 것이다. 예수님이 천하에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이 여인의 행한 일을 기념하라고 했다. 예수가 실제로 자기 인생의 처음이자 끝이 된 최초의 여인이라는 것을 알게 하라는 것이다. 예수가 주는 축복이 아니라 예수 그분을 자신의 소망과 목적으로 삼은 자, 십자가 복음 안에 최초로 들어온 자임을 선포하라는 것이다.

헌금할 때 손이 떨리는 신자

신자 쪽에서 거룩한 낭비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주 중요하고 귀중하다. 하나님도 크게 기뻐하신다. 열심과 정성과 의지를 담아서 순수하게 아끼지 않고 드려야 한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주일날 헌금봉투에 돈을 담을 때에 손이 떨리는 것이 우리의 실상 아닌가?

그 이유는 하나님 쪽에서 우리에게 베푸는 거룩한 낭비를 모르기 때문이다.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차원으로는 시선을 돌리지 않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된 이유는 하나님께 드리면 그만큼 받을 것이라고만 믿었기 때문이다. 또 그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주님의 말씀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마리아와 같은 최소한의 믿음조차 없기 때문이다. 주님이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자신과 동행해주었던 체험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그런 진리조차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 세상에 조금만 문제와 고난이 생겨도 그저 염려와 걱정이 앞선다. 예수님은 생명까지 아끼지 않고 우리를 위해 최고로 큰 거룩한 낭비를 하셨지 않는가? 그럼 그 외에 다른 모든 좋은 것도 함께 주시지 않겠는가? 신자가 도대체 무엇을 또 염려할 수 있는가?

본문은 교회가 구제는 하지 않고 전도만 한다든지, 그 반대로 구제만 하고 전도는 하지 않는다는 논란에서 어떤 것이 옳고 그른지 밝히는 내용이 전혀 아니다. 마리아처럼 “예수님께 좋은 일”을 행했는지 안 했는지 묻고 있는 것이다. 그분과 일대일의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맺고서 현재 유지하고 있는지 묻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거룩한 낭비를 받아본 적이 있는지 묻는 말씀이다.

성경도 성령도 없이 마리아는 주님의 그 거룩한 낭비를 받았기에 주님께 거룩한 낭비를 할 수 있었다. 그녀처럼 진정으로 주님의 거룩한 낭비를 받은 자라면 이 땅에서 정말로 어떻게 신자답게 살아야 할지 충분히 알 수 있다. 또 알고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실천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본문이 뜻하는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