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 갔더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쌔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쌔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주소서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마25:1-13)
교회 생활에 충실한 악한 종
예수님은 신자에게 종말을 준비하는 두 가지 자세를 당부했다. 먼저 깨어 있으라고 했다. 종말은 반드시 언제가 닥칠 것이므로 자기 세대의 영적 징조를 분별하라는 것이다. 둘째로 예비하라고 했는데 영적으로 각성한 것을 실제 삶에 적용하여 실천하라는 것이다. 이제 25장은 이 두 당부를 열 처녀, 달란트, 작은 자의 세 비유를 들어서 쉽게 가르치고 있다.
이 세 비유 모두에는 대조 되는 두 종류의 사람이 등장한다. 지난주에 살펴본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과 악한 종에 대해 보충해서 설명하는 내용이다. 주목할 점은 이 세 비유의 악한 종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따르지 않는 불신자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두 규칙적 종교생활을 하고 있는데도 종말에 냉혹하고도 가차 없는 심판에 처해질 것이라고 한다.
예수님은 종말의 불신자의 운명에 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당신의 말씀을 듣는 일차 청중이 여호와 하나님을 열심히 믿는 유대인들이기 때문이다. 거기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실존(實存) 자체를 믿지 않는다. 혹시 실존은 믿어도 인간사에 완전히 손을 떼고 있다고 여기기에 종말은 그들에게 아무 의미가 없다. 가르쳐봐야 소 귀에 경 읽기일 뿐이며 가르치는 자가 오히려 이상한 사람 취급 받는다.
불행하게도 그들이 종말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심판 자체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심판에서 제외되지도 않는다. 더 안타까운 사실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권능과 사랑을 전혀 맛보지도 알지도 못하기에 일생을 허무함과 갈급함으로 마감하게 된다. 죽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기에 제대로 잘 살지도 못한다.
예수님의 관심은 항상 하나님을 아는 자에게만 집중되어 있다. 당신께서 재림하시어 심판하는 것은 결국 교회 안의 알곡과 쭉정이를 분리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세 비유를 통해 자신이 과연 알곡과 쭉정이 어느 쪽에 속하는지 스스로 진지하게 평가해봐야 한다.
구원과 심판이 반반(半半)?
첫 번째 열 처녀 비유를 정확히 해석하기 위해선 예수님 당시의 유대 결혼관습부터 알아야 한다. 이해하기 쉽게 한마디로 정리하면 결혼식은 신부 집에서, 리셉션은 신랑 집에서 행해졌다. 고대는 마을이 작아 같은 동네에서 신부를 구하기 힘들어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데려왔다. 신랑과 신랑친구들이 신부 집에서 결혼식을 마치고 돌아오면 대체로 한밤중이 되었다. 열 처녀들은 동구 밖 멀리까지 나가 신부를 영접하여 모셔 들이는 들러리 역할을 했다. 신랑신부 일행이 도착하면 기다리고 있던 신랑의 가족, 친척, 손님들이 잔치를 벌였다.
들러리들이 밤새도록 꼬박 깨워 있었던 것은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쌔”(5절)라고 했다. 들러리들이 전부 졸며 잤다. 만약 모두가 밤새 자지 않았다면 도적이 언제 들어올지 몰라 철야하며 경비를 서야하는 주인(마24:43)과 같다. 이처럼 예수님은 종말주의자들끼리 모여 집단 공동체생활을 하는 것은 철저히 부인하셨다.
주님이 불시에 다시 오신다는 진술은 모든 세대 사람들에게 더디 온다고 여겨질 수밖에 없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불에 올린 냄비를 쳐다보고 있으면 물이 끓을 생각도 않는 것 같다. 종말에만 신경 쓰고 있으면, 본문 비유의 경우엔 신랑이 언제 올지 시간만 재고 있으면 더디 온다고 여겨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심판이 무한정 연기된 것은 아니다. 신랑이 올 때 되면 반드시 오듯이 종말도 때가 되면 임한다.
반면에 스토브에 올려놓은 냄비에 신경 쓰지 않고 다른 일을 하고 있으면 순식간에 끓는다.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중에 종말이 온다고 했다. 물이 끓는 시간은 동일하듯이 종말이 와야 할 때에 온 것뿐이지만 막상 종말을 당한 그 세대로선 아주 급작스레 온 것 같다. 이런 맥락에서 성경에서 종말이 어느 세대에나 임박하다고 말하는 진술은 절대적 진리가 된다.
이 비유에서 슬기 있는 처녀와 미련한 처녀가 각기 다섯 명이라고 해서 구원과 심판을 받는 자의 숫자가 반반(半半)으로 나뉜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다. 예수님이 계속해서 종말에는 영생과 영벌 둘 뿐이지 중간회색지대가 없다고 강조한 뜻을 더 분명하게 나타낸 것이다. 만약에 슬기로운 처녀와 미련한 처녀의 숫자를 각기 다르게 말했다면 분명히 비율을 뜻하니까 해석은 달라질 것이다.
실제로 슬기로운 처녀 즉, 구원 받은 숫자가 열 명 중에 한 명뿐이라고 해도 예수님이 그대로 말했을 리 만무하다. 교회의 모든 모임에 출석률을 따지고 성경공부에 시험을 쳐서 상위 10%의 사람들은 교만에 빠지며 나머지를 비평하기 바쁠 것이다. 현재 교회 상황을 살피면 결코 그럴 리 없지만, 슬기로운 처녀가 9명이라고 하면 모두 느긋하고 게을러져 교회출석률마저 크게 떨어질 것이다. 인간이 얼마나 치사하고 비겁한지 예수님이 우리보다 더 잘 아시기에 우리 수준에 맞추어 하나님 구원의 경륜의 비밀을 가르치신 것이다. 인간의 그 치사함에 대비해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과 은혜가 얼마나 정미한지 깨달을 수 있어야 한다.
심판 받아 마땅한(?) 미련한 처녀들
문제는 9절이다. 미련한 처녀의 등불이 꺼져가기에 기름을 나눠달라고 요청했는데 슬기 있는 처녀들이 냉정하게 거절했다. 언뜻 자기들끼리만 구원 받으려는 비정하고도 배타적인 태도 같다. 미련한 너희들은 심판 받아 마땅하다고 정죄하는 것 같다. 그런 의미는 추호도 없다. 믿음이 연약하거나 이제 갓 믿은 신자들을 인내심을 갖고 지켜보며 교육시켜야 할 책임이 먼저 믿은 신자와 교회에 있다는 뜻도 아니다.
슬기로운 처녀는 기름을 따로 채운 여분의 통을 등불과 함께 들고 갔다. 신랑은 거의 항상 한 밤중에 오므로 반드시 기름을 더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미련한 처녀들은 쓰고 있던 등에 남아 있는 기름의 양도 확인하지 않고 별도 기름통도 챙길 생각 않고 그냥 들고 왔다. 그럼 금방 꺼질 등을 왜 들고 왔는가? 당시 잔치에는 자기 등을 들고 오지 않으면 도적이나 불청객으로 취급했기 때문이다.
오래전에는 이 넓은 미국 시골로 자동차 여행을 할 때에는 주유소가 드물어 여분의 기름통을 준비해야만 했다. 만약 동행한 친구가 기름이 떨어져서 나눠주면 두 차 모두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고 중도에 서버리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 친구 차를 가까운 주유소로 돌려보내야 한다. 본문의 상황을 현대 결혼식에 대입하면 신부 들러리가 리셉션의 초대장은 들고 왔는데 들러리 드레스는 갖고 오지 않은 셈이다. 들러리끼리 드레스는 나눠 입을 수 없지 않는가? 빨리 드레스 가게에 가서 구해 입고 오라고 돌려보내야 한다. 그러나 드레스 가게는 이미 닫았고 겨우겨우 구해 입고 왔더니 연회는 끝나고 호텔 문도 닫혀 버린 것이다.
기름을 나눠주지 않은 것이 사랑과 인내로 섬기지 않았다는 도덕적 종교적 결격 사항과 연결될 소지는 전혀 없다. 대신에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과 신자의 일대일 개인적 관계에서만 이뤄진다는 것이다. 믿음이 좋은 마누라 치맛자락만 잡는 것만큼 영적 낭비는 없다는 뜻이다.
신자는 먼저 용서 받은 죄인일 뿐이다. 다른 이의 죄를 하나님이 용서해주시는데 힘을 보태거나 영향을 미칠 수는 결코 없다. 단지 자신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대면하여 용서 받았다는 사실과 그 감격을 증언할 수 있을 뿐이다. 다른 사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냄새를 맡게 해줄 수 있을 뿐이다. 그리스도의 참 생명을 나눠주시는 이는 하나님이다.
기름을 준비하지 않은 이유?
미련한 처녀도 유대인이다. 혼인잔치에 신랑이 한밤중에 돌아온다는 사실쯤은 이미 알고 있다. 어쩌면 기름을 준비하지 못해 낭패 본 경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준비하지 않은 것이 매사에 덤벙되고 잘 잊어먹는 성격 탓이 아니다. 하나님은 성격과 기질을 구원과 심판의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그것들은 하나님이 각 개인에게 가장 합당하고 유익하도록 주신 선물이다.
이 처녀들은 처음부터 기름을 준비하는데 관심이 없었다. 멀리 가서 신부를 맞이할 역할을 꼭 내가 해야만 하나? 다른 처녀들이 알아서 하겠지? 들러리 역할을 맡을 의사가 없었던 것이다. 대신에 혼인잔치에서 먹고 마실 일에만 마음이 가있었다. 정말로 신랑 신부를 맞이할 생각이 있었다면 기꺼이 기름을 준비했을 것이다.
이는 교회에 출석은 해도 정작 신랑 되시는 예수님과 그분의 십자가 구속의 진리를 알지 못하고 배우려고도 하지 않는 신자들이다. 그 결과 현실의 삶에서 그분과 동행하여 풍성하고도 세밀한 은혜를 누려본 적이 없다. 다른 이를 복음으로 초청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일과는 아예 담을 쌓고 있다. 나의 평안과 형통과 출세만을 소망하여 그 일을 하나님이 마땅히 도와주어야만 한다고 믿는다. 제사는 뒷전이고 젯밥에만 관심이 몰린 교인으로 바로 쭉정이다.
집에서 쓰던 등을 기름 잔고도 확인 않고 들고 온 것은 평소에 전혀 말씀을 보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주일에 교회에 빠지면 혹시 벌 받을까 두려워 성경에 쌓인 먼지를 털어서 들고 경건하게 차려 입고 출석은 한다. 복을 빌어주거나 감정적으로 잠시 자극하는 설교를 듣고는 은혜 받았다고 여긴다. 자기 형통을 위해 주일날만 잠시 기도한 후에는 일주일 내내 세상 사람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살아간다.
여분의 기름이 없으면 중도에 꺼진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고 있는데도 준비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신자가 예수님과 개인적 관계를 가진 것이 처음 구세주로 영접했을 때에 잠시 한번 뿐이라는 뜻이다. 그마저 엄격히 말하면 예수님이 죄인들을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교리에 동의하고 입술로만 고백한 것에 불과하다. 진심으로 그 은혜에 감사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의 사랑이 없으면 그 인생에 오직 절망과 죽음뿐임을 아직 절감하지 못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두 손 들고 나온다는 전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한 항복과 순종이 없었다. 예수님의 보혈의 공로로 덧입혀진 중생의 체험이 없다. 지역개별교회에 출석만 하면 영생보험에 들고 천국입장권을 받아 쥔 양 착각한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왜 십자가에 죽으셨는지, 그 죽음이 나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 그 결과 내가 어떻게 바뀌었고 또 앞으로 바뀔 수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그저 하나님이 인생만사를 주관하시기에 나에게 좋은 일만 늘어나게 해달라고, 최소한 나쁜 일만 생기지 말게 해달라고 비는 것이 신앙의 전부다.
슬기 있는 처녀의 실체는?
예수님은 종말에 대비해 “깨어서”, “예비하라”는 두 당부를 하셨다. 본문의 결론은 그런즉 깨어 있으라고 했고(13절), 시작도 천국에 관해 말씀한다고(1절) 했다. 종말의 영적 각성에 대해 가르친다는 뜻이다. 그러나 종말의 징조를 분별하여 대비하라는 뜻만이 아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혼인잔치에 참석할 수 있는 자는 구원 받은 신자뿐이다. 또 구원은 예수를 처음 믿을 때부터 유효하다. 하나님이 종말에 임박해서 인심 쓰듯이 구원을 남발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모든 세대 모든 신자는 주님이 재림하던 안 하던 그분을 영접하여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온 순간 이미 신부의 들러리가 아니라 주님의 신부가 된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하고 의롭고 아름다우며 풍성하고 오묘하며 생명력 넘치는 통치를 받게 된다. 천국에 들어온 것이다. 예수님의 지상 메시지도 항상 천국이 이미 도래했다는 것에 초점이 맞춰졌다.
요컨대 본문의 슬기 있는 처녀가 종말에 영성이 뛰어나 깨어서 잘 예비하고 있는 우등 신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예수 믿는 모든 신자가 슬기 있는 처녀다. 신자는 이 부분에 오해가 없어야 한다. 구원, 영생, 천국이 신자가 노력하여 쟁취할 목표가 아니다. 항상 바로 눈앞에 보이는 도착지점이다. 예수님의 보혈로 염색된 주홍빛 카펫이 거기까지 죽 깔려있고 신자는 그 위를 걸어가고 있는 중이다. 좌우로 벗어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비록 우리 모두 연약하고 욕심 많으며 죄에 빠져 수시로 쓰러지고 넘어져도, 심지어 이전 방향으로 되돌아가도 여전히 그 주홍 카펫 위다. 혹시 밖으로 뛰어 나가려 하면 하나님이 강제로 다시 끌어다 놓으신다. 신자가 현실에서 겪는 고난, 상처, 연단 등이 실은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모습이다. 신자가 아무리 자주 많이 넘어져도 주님은 그 카펫을 걷어가지 않으신다. 일단 출발하면 반드시 도착지점에 이르게 된다. 신자 개인은 죽으면 천국이 기다리며, 이 세상은 때가 되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변할 것이다.
너무나 지당한 말씀을 되풀이하려는 것이 아니다. 굉장히 심각하고 두려운 말씀이다. 역으로 말해 미련한 처녀도 단지 종말의 징조를 분별하지 못하는 영성이 떨어진 신자가 아니라는 뜻이다. 교회에 성실히 출석하며 새벽에 기도를 열심히 하고 때로 천일 제단을 쌓는 신자 중에 구원의 문이 닫히고 종말에 영원한 지옥 형벌에 태워질 쭉정이가 있다는 것이다.
오해는 말아야 한다. 현재 닥친 자신과 자기 주변의 현실적 문제, 상처, 고난을 해결받기 위해서 천일 아니 만일이라도 간절히 눈물로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소지하고 있다는 의미가, 믿음이 자기 인생에 기여하는 역할이 그것만으로 그치면 제사보다 젯밥에만 관심이 있는 자요 그 안에 영생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미련한 처녀를 내쫓은 이유는?
미련한 처녀들을 예수님이 내쫓은 이유를 25절에서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예수님께서 그들을 모른다고 하신다. 이상하지 않는가? 누구보다 교회 활동에 열심을 내고 천일 제단까지 쌓고 있는데 어떻게 모를 수 있단 말인가?
성경에서 “안다”는 용어는 부부가 서로 아는 것을 뜻한다. 부부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슬플 때나 기쁠 때나 평생을 지지고 볶으며 살아가면서 배우자를 알아나간다. 나중에는 상대의 눈빛만 보아도 무엇을 뜻하는지 알며, 심지어 얼굴 표정과 말투와 제스츄어까지 닮아 간다. 구약성경에선 성관계를 하는 것에도 바로 이 단어를 사용했는데 그럴 정도까지 상대를 삶에서 체험적으로 꿰뚫어 아는 것이다.
만약에 부부가 슬프고 힘든 일이 생겨서 서로 싫어지면 잠시 이혼했다가 기쁘고 즐거운 일이 생기면 다시 같은 상대와 재혼을 한다고 가정해보라. 평생을 그렇게 이혼과 재혼을 반복한다면 부부라고 할 수 없고 상대를 알아갈 기회조차 전혀 없다. 쉽게 말해 돈을 잘 벌어 줄 때만 남편 취급을 하는 것이다. 그럼 남편은 돈 벌어주는 기계다. 부부관계를 유지하는 힘도 사랑이 아니라 돈이다. 아예 돈이 남편이 된다. 천일제단을 쌓으면서 오직 현실의 고통만 없애달라고 비는 것은 신자는 주님과 바로 이런 부부관계를 맺고 있는 셈이다. 예수님이 너희를 알지 못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 않는가?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꿰뚫어 아시고 있다. 반면에 우리는 예수님을 알려고 하지 않고 그럴 용의도 없다. 오직 예수님이 베풀어주시는 기도의 응답에만 관심이 가있다. 요한복음 17:3은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자 모든 인생에게 참 생명을 주시는 능력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또 그렇게 깨달은 대로 실제로 내 생각과 말과 행동이 따라야 한다. 주님의 십자가가 내 인생을 이끄는 근본 방향이자 도착지가 되는 자에게 영생이 있는 것이다.
예수 십자가 은혜 안에 있다는 것은?
신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안에 있는 자다. 그 의미는 그분의 십자가 은혜보다 더 좋은 축복과 은혜는 결코 없음을 실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자꾸자꾸 깊이 알아가고 있는 중이라는 뜻이다. 그분을 알면 알수록 아무리 슬프고 힘들어도, 때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억울한 일과 상처와 고난이 겹쳐도, 그래서 그 고난이 언제 끝날지 도무지 징조가 안 보여도, 심지어 그러다 핍박 받고 순교로 끝이 나도 주님을 놓지 않는 것이며 놓고 싶지도 않는 것이다. 그분이 나의 주인 되심에 전혀 변화가 없는 것이다.
지난 주 미국 뉴스에서 64년을 해로한 부부 중에 아내가 죽자 남편이 네 시간 만에 죽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아내를 못 잊어 자살을 한 것이 아니라 그냥 자연사 한 것이다. 아내가 없으니 너무 허망하고 더 살아야 할 의미와 가치가 없어졌던 것이 죽음으로까지 이어진 것이다. 그 나이에 서로 호사와 사치를 누리게 해줄 기력은 없었을 것이다. 그냥 옆에만 있어 주어도 기쁨과 소망과 행복이었는데 그 모든 것을 상실한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 영생 보험을 드는 것이 아니다. 내 의지로 결단하여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도 아니다. 절대자에게 귀의하여 마음의 평정을 얻는 작업도 아니다. 예수 십자가의 그 무한하고도 무조건적이며 일방적인 사랑 앞에 완전히 항복하는 것이다. 철두철미 자신의 무력함, 무가치성, 공로 없음을 인정하고 그 위에 더럽고 추하며 사악하기까지 한 자신의 실체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어 벌거벗기는 십자가 진리의 말씀 앞에 완전히 납작 엎드려지는 것이다. 그렇게 항복한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그렇게 겸비해지는 순간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참 생명을 넘치도록 풍성하게 부어서 새 사람으로 바꾸어 주신다. 나라는 존재가 완전히 뒤집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없는 삶은 바로 죽음임을 절감하고서 그분만이 내 인생의 소망과 방향과 가치가 되는 것이다.
깨어서 예비해야 하는 것이 종말에 영적 분별력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일이 아니다. 신자가 평소에 항상 지녀야 할 자세다. 예수를 믿는 신앙의 본질이다. 항상 깨어 있지 않으면 종말을 대비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신자라고 말할 수도 없다. 예수 십자가의 은혜를 제대로 안다면 항상 깨어서 예비할 수밖에 없다. 그것도 부득이함이나 종교적 의무감이 아니라 기꺼움과 감사함과 즐거움으로 말이다.
기독교 신앙이란 자신이 예수를 처음 믿은 후에 지금 이 자리 이 모습에 이르도록 하나님의 영원하고 절대적이며 완전한 계획과 뜻 가운데 한 번도 벗어난 일이 없었음을 확신하는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그분의 역사가 이해도 되지 않고 때로는 의심과 불신을 넘어 원망까지 했지만 지나고 보니 나에게 가장 유익하고 합당하며 완전한 길이었다고 깨달은 적이 수도 없이 많기에 그런 믿음이 생긴 것이다.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이 나를 그런 절대적이고 완전하며 영원한 뜻으로 처음부터 이끌고 오셨는데 종말에는 그보다 더한 영광으로 인도할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런 은혜에 언제 어디서나 내 전부를 드리는 것이 바로 종말을 대비해 깨어 있는 올바른 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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