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설교

복수(複數)로 사용해선 절대 안 되는 두 단어 (마26:1-5)

새벽지기1 2017. 6. 20. 05:06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을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하여 팔리우리라 하시더라

그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가야바라 하는 대제사장의 아문에 모여 예수를 궤계로 잡아죽이려고

의논하되 말하기를 민요(民擾)가 날까 하노니 명절에는 말자 하더라.”(마26:1-5)


역사상 최대의 비극이자 희극

예수님은 종말과 재림에 대한 감람산 강화를 마치고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예고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해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마16:16)이라고 고백한 이래 네 번째이자 마지막 예고였다.

그러나 제자들은 여전히 그 죽음의 의미와 차후 인류에게 끼칠 영향을 전혀 깨닫지 못한 것 같다. 그들의 십자가 사건 전후의 행적을 보면 스승이 죽는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인정하지 않은 것 같다.

그들이 완악하고 믿음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도무지 실감할 수 없지만 스승이 이야기하니까 반신반의 하면서 아무 대꾸하지 않았다는 것이 더 타당한 설명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구원을 받았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최초로 세우는 예수님의 대리인이 되는 놀라운 영광을 누렸다. 인간 제자들의 공로라곤 전무하되 전적으로 하나님의 택하심의 은혜였던 것이다.

반면에 제자들과 동일한 시간과 공간 아래 있으면서도 정반대의 대척지점에선 유대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일 모의를 하고 있었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산헤드린 공회를 정식으로 소집하지 않고 대제사장 공관의 안뜰인 ‘아문’(3절)에 공회원 72명 중에 일부 주도층들만 모였다. 아마도 정식 회의를 소집하면 니고데모나 아리마대 요셉 같은 온건파가 제동을 걸까 염려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유대의 최고 명절인 유월절 기간이다. 유월절이 어떤 날인가? 애굽에서 노예로 비참한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을 열 가지 재앙과 홍해의 기적으로 구원해 낸 출애굽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다. 하나님의 큰 구원을 크게 기뻐하는 날에 인간사회의 최고 지도자들은 바로 그 하나님을 죽이려 하고 있다. 인류 역사상 최대의 비극이다 못해 희극이기도 하다.

사실 그들은 오래전부터 예수를 죽이려고 결의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어서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일까 구체적 방안만 의논한 것이다. ‘궤계’(4절) 즉, 부당한 권모술수를 동원해야 할 만큼 예수를 죽여야 할 죄목은커녕 명분도 없었다. 어떡하든 빨리 죽여야 할 정도로  싫고 미웠던 것이다.  

무산된 계획

그럼에도 민요(民擾)-민중폭동이 일어날까 염려하여 절기 중에는 결행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비록 그들이 예수와 그 추종자들을 이단으로 지목하긴 했지만 명절에 죽이는 것은 여러모로 모양새가 빠진다고 여긴 것이다. 실제로도 폭동이 일어날까 많이 염려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에 유대 대중들이 열렬히 호응하는 것을 똑똑히 목격했다. 예수의 소문이 갈릴리를 넘어 사마리아와 이방에까지 널리 퍼진 까닭이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네로 황제 때에 예루살렘 총독이 유월절에 희생 제물로 바쳐진 양이 256,500 마리라고 보고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양 한 마리가 어른 열 내지 스물 명의 몫인데 열 명만 잡아도 250만 명이 넘는다. 예루살렘에 상주하는 인구를 빼어도 최소 200만이 훨씬 넘는 순례객들이 모였다는 뜻이다.  

그렇게 엄청난 군중이 모여 서로 토의하다가 자칫 정치적 종교적 민감한 이슈가 발발하면 로마에 큰 위협이 될 수 있으니 주시해야 한다고 보고한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는 메시아 대망사상과 로마에 항거하는 기운이 최고조에 달했었다. 유대 지도자들도 아주 예민해져 있었다. 그런 판국에 메시아일 가능성이 있는 예수를 갑자기 죽이면 큰 소란이 일어날 것이다. 순례객들이 다 돌아간 후에 평소에 대제사장의 직접적인 통치를 받아 입김이 먹혔던 예루살렘 주님만 있을 때에 예수를 제거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완전히 무산되었다. 예수님은 최후의 만찬으로 유월절 양을 제자들과 함께 드시면서(17-25절), 가룟 유다의 배반을 예언했다. 다른 제자들은 눈치 채지 못했지만 유다 본인은 자신의 계획이 탄로 났다고 보고 곧바로 밀고했다.

그 날을 “무교절의 첫날”(17절)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유월절에 무교병을 먹기에 무교절이라고도 부른다. 그런데 요한복음과 비교해 보면 유월절 양을 드신 날은 사실은 집안에 누룩을 제거하고 깨끗하게 청소하여 유월절을 준비하는 하루 전 날이었다. 정규 유월절 식사를 주님은 하루 앞당겨 시행한 것이다.

그럼 유다에게 어떤 생각이 들었겠는가? 스승이 자기와 유대 지도자들 간의 당신에 대한 살인 모의를 알아채고선 유월절 식사를 일부러 일찍 마치고 제자들과 곧바로 갈릴리로 돌아가려나 보다라고 짐작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그래서 서둘러 밀고하고는 그런 사정을 전해들은 대제사장도 어쩔 수 없이 계획을 바꾸어 유월절이 시작하는 첫날에 예수를 체포하여 처형을 집행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스스로 세우신 십자가

골고다 십자가 사건은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사회 권력층이 주도하여 로마의 협력을 얻어 시행한 것 같아도 사실은 예수님의 일정과 계획에 따라 진행되었다. 주님은 당신의 죽음을 네 번째로 예고하면서 이틀 후라고 정확한 날짜까지 밝혔다. 아브라함에게 후손을 주겠다고 25년 전에 약속했다가 마지막 한 해를 앞두고 내년 이맘때에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구체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계시해 주셨다. 예수님은 바로 그와 동일한 하나님이었다.  

단순히 전지(全知)하기에 장래 사건을 미리 알았다는 차원이 아니다. 적극적 능동적으로 모든 사람과 모든 사건을 합력시켜서 십자가를 당신께서 직접 세우셨다. 골고다 언덕길을 주님은 자발적으로 기꺼이 오르셨다.

최후의 만찬 전에 어떤 사건이 있었는가?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마리아가 향유 옥합을 깨트려 예수님의 머리에 붓는 일이 있었다. 제자들은 그 돈을 가난한 자의 구제에 쓰지 않고 허비한다고 화를 내었다. 틀림없이 유다는 마리아를 야단치기는커녕 오히려 칭찬만 하는 스승에게 가장 큰 배신감을 느끼고 배반할 결심을 확고히 굳혔을 것이다.

어떤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그 파장이 심대한 사건들이 같은 맥락으로 겹치면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필연이다. 필연이라는 것은 사전에 디자인 된 어떤 계획에 따라 일어났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 마리아가 향유를 부을 마음도 예수님이 심어주셨다는 것이다.

마태가 예수님의 죽음 예고를 대제사장의 살인 모의에 앞서 기록하고 있음이 의미심장하지 않는가? 하나님의 모략이 인간의 모략과는 별개이자 더 우선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님이 대제사장의 살인모의를 알아채고 모든 정황을 다시 분석하여 아무래도 십자가에 죽어주는 것이 낫겠다고 결심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십자가 사건이 위대한 한 인간 예수의 숭고한 희생적 죽음이라고 해석될 여지가 한 치도 없음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인간 최고의 지혜와 모략과 능력과 수단을 다 동원해도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섭리를 단 1 밀리미터도 벗어날 수 없다. 예수님 혼자서 십자가를 지지 않고도  세상 모든 사람을 당장에 심판과 구원으로 나눌 수 있다. 십자가에 아무 말 없이 달리셨다고 해서 그분의 지혜와 능력에 추호의 부족도 없다. 하나님만의 사랑과 권능으로 공평과 정의와 진리를 100% 완벽하게 충족시켰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자기만족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죄와 사탄과 사망의 멍에를 지고서 갈 바를 모르며 허공만 치고 있는 인간이 너무나 불쌍하고 안타까워서 인간에게 최선의 길을 제시해 준 것이다. 정확히 말해 유일하고 완전하며 영원한 절대적 구원의 길이다. 한 죄인을 참 생명으로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는 십자가 외에 어떤 방도도 불가능하다.

때가 차매 오신 구주

유대 지도자들은 단순히 민요가 날까 염려하여 예수님을 유월절이 끝나고 죽이려 했다. 그러나 그 배경에는 사탄이 도사리고 있었다. 예수가 유월절 어린 양으로 부각되는 것을 싫어해서 처형을 연기시키도록 대제사장 무리들을 조종했던 것이다. 주님은 사탄의 그 흉계마저 꿰뚫어 아시고 그 계획을 깨트리셨다. 유월절 첫날에 십자가에 달림으로써 당신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과 동격화 시켰다. 구약성경의 수많은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완벽하게 실현되었음을 십자가에서 당신의 온 몸으로 분명히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요1:1) 십자가는 인간을 창조하기 전부터 하나님의 영원한 모략 가운데 있었다. 어떤 흉악한 죄인이라도 또 세상에서 완전히 실패하여 비참한 절망 가운데 있는 자라도 십자가의 긍휼 앞에 진정으로 겸비하게 엎드리면 하나님의 신령한 중생의 역사가 임한다.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존재로 뒤바꿔 주신다. 천하 만물은 예수 안에서, 예수에 의하여, 예수를 위해서 창조되었다.(골1:16)

그럼에도 최초 인간 아담은 하나님을 거역하여 타락했다. 그리고 곧장 하나님께 당신이 붙여주신 이브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었다. 오늘날의 신자들로 치면 지금 현재 내가 겪고 있는 모든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있게 한 책임이 하나님에게 있다고 도리어 큰소리친 것이다. 하나님은 그럼에도 장차 여자의 후손으로 오시는 이가 너를 유혹하고 조종하여 그렇게 만든 진짜 원흉인 사탄의 머리를 깰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그 약속의 보증으로 하나님 당신께서 직접 짐승을 잡아 죽여서 죽음의 형벌을 받아 마땅한 아담의 죄 값을 대신 물게 했다.

이 땅도 아담의 타락과 함께 하나님의 벌을 받아 엉겅퀴와 가시덤불이 무성해지고 모든 인간이 평생 고난이 그치지 않는 광야 같은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 고난 중에 인간이 자기 능력으로 스스로 만든 나뭇잎 옷으로는 절대 평강과 안식이 없음을 하나님은 아시고 아담에게 그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지어 입히셨다.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에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시어 보호하고 인도하시겠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인간이 타락할 것을 아시고도 인간을 창조하셨다. 창조 전에 구원의 계획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자의 후손에 대한 그 약속은 노아, 아브라함, 모세, 사무엘, 다윗을 거치며 승계되고 구체화 되어 가다가 때가 차매 성령으로 동정녀에게 잉태하여 나사렛에서 구주가 나셨다. 이제 이틀 뒤면 태초부터 마련되어 있던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과 새로운 창조 계획이 완성될 것이다. 인간들이 십자가 구원의 진리를 알아먹든 못 먹든 하나님의 영광은 골고다 언덕 위에 찬연히 빛나게 될 것이라고 지금 주님 당신께서 마지막으로 직접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언약을 누구보다도 더 잘 깨달아서 백성들에게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는 자들은 어떻게 했는가? 당대로선 구약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그 날 즉, 메시아가 와서 구원을 주는 날을 깨어서 예비하고 있어야 했음에도 메시아 그분을 대적하여 죽이려 하고 있다. 성령의 조명을 받아 성경을 제대로 연구했다면 지금 자기들 눈앞에 서있는 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자기 양심으로만 판단해도 최소한 의인임을 인정해야 했다. 아니 그들도 예수가 의인인 줄 익히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도리어 죽이려 들었으니 이 얼마나 완악하고 사악한 자들인가? 인간의 도덕성 종교성이 아무리 경건하고 의로워도 돈 한두 푼 더 차지해 안락하게 살려는 탐욕 앞에는 완전히 무력해지는 것이 인간의 실상이다. 죄의 덩어리로 전적으로 타락한 존재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죽어도 엎드리지 않고 도리어 고개를 뻣뻣이 쳐들고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운 점 하나 없다고 자랑하고 있다. 구약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더러 목이 곧은 백성이라고 계속 한탄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다.  

이상한 성경의 기록(?)

그런 인간 실체에 대한 더 결정적인 증거는 본문 안에 있다. 본문 3절에는 “대제사장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성경을 제대로 읽는 신자라면 이 부분에서 뭔가 이상하다고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

율법에는 대제사장은 아론 가문의 장자(長子)만이 맡게 되어 있다. 세습제, 종신제로 전임 대제사장이 죽어야 후임 대제사장이 세워지기에 대제사장은 항상 오직 한 명이어야 한다. 장자가 여러 명일 수는 없지 않는가? 아론이 죽자 그 대제사장의 에봇을 벗겨 장남 엘르아살에게 입혔다고 기록하고 있는 대로다.(민20:25,26)  

대제사장은 예수님을 예표한다. 구원을 주시는 구세주 하나님과 또 그분이 베푸는 구원의 길은 하나뿐이다. 여럿일 수 없다. 모든 구원의 길이 옳다고 하면 아무 것을 믿지 않는 것도 구원의 길이 된다. 진리는 하나이지 여럿이 진리라면 진리가 없다는 뜻이 된다.

대제사장 직이 세습제인 까닭은 하나님의 공동체에는 반드시 하나님이 세운 지도자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이 규정이 없었다면 대제사장을 차지하려는 권력다툼이 굉장했을 것은 너무나 뻔하다. 하나님이 세운 대제사장이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율법대로 온전히 시행하면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는 반드시 풍성하게 임하게 마련이다.

또 종신제인 것은 전 백성을 대표하여 모든 사람의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 앞에 서야할 자라는 뜻이다. 특별히 도피성 제도에서 보듯이 자기 목숨을 걸고 백성들의 죄를 대속해야 하기 때문이다. 비록 고의가 아니라 실수로 살인했어도 살인 죄인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해보복법의 원리에 비추면 자기 생명을 내어 놓아야만 한다. 그러나 대제사장의 생명과 연계하여서 자신의 죄 값을 그에게 전가하여서 대제사장이 죽어야 비로소 완전한 용서와 구원과 자유를 얻게 된다.

이처럼 구약성경에 이미 십자가 복음의 원리는 충분히 계시되어 있다. 더 가시적 현실적 모습으로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 안에 실현되어졌다. 요컨대 대제사장이라는 단어는 절대로 복수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들”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는 너무나 큰 이단이자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 않는가?

예수님이 성전청소를 단행한 진짜 이유

본문에서 대제사장들이라고 복수로 표현했는데 현직 가야바 외에 여러 명이 있었다는 뜻이다. 한국에서 장관을 지나면 계속 장관으로 호칭해주는 것과 같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단 대제사장은 본문과 사도신경에 나오듯이 가야바였다. 그런데 요한복음 18:3에 따르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님을 체포하여 먼저 대제사장 안나스에게 가서 재판을 받았다. 안나스는 가야바의 장인으로 장인이 사위에게 대제사장직을 세습한 것이다.

다시 요세푸스의 기록을 빌리면 유대 지역에 대해 로마와 결탁한 헤롯 왕가의 통치체제가 시작된 BC 37년부터 헤롯이 지은 그 장엄한 성전이 파괴된 AD 67년까지 약 100년 간 무려 28명의 대제사장이 봉직했다고 한다. 평균 재임 기간이 4년 미만이다. 로마가 정치적 목적으로 임명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은 완전히 휴지조각이 되었다. 세계 최고 강국의 지배를 받는 변방의 한 작은 민족의 종교적 겉치레로 취급당해 철저히 무시되었다. 인간 사회의 최고의 지성이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의 공동체를 통제 교육시키려 든 것이다. 쉽게 말해 예루살렘의 로마 총독이 기분 내키는 대로 대제사장을 교체한 것이다.

역으로 말하면 누구나 총독의 눈에 들면, 명목상으로는 아론 가문의 사두개 집안사람으로는 세웠겠지만, 대제사장이 될 수 있었다는 뜻이다. 총독에게 뇌물을 바치든 아부하든 눈치를 잘 맞추어 주면 된다. 장인이 사위에게 세습하려면 총독과 어떤 방식으로든 결탁이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삼척동자라도 짐작할 수 있다. 한마디로 대제사장들이 하나님을 전혀 모르고 온갖 가증한 우상을 음란하게 섬기는 로마에게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의 영적인 문제를 위탁하거나 최소한 타협했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고난주간의 첫날에 성전으로 찾아가 제물 장사치들과 환전상을 쫓아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젠 더 확실히 이해가 되었을 것이다. 그 일을 지상 사역의 마지막으로 삼으신 의미를 오늘날의 신자들, 특별히 목회자들이 정말로 진지하고도 심각하게 분별할 줄 알아야 한다. 단순히 성전 부패를 청소했다는 도덕적 종교적 차원으로서가 아니다.

성전 청소를 단행한 후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대제사장이 나타나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따졌다. 자기 허락 없이 성전에서 못할 짓을 했다는 것이다. 자기는 로마에 아부하여 그 자리에 오른 주제에 말이다. 하나님 본체이신 예수님더러 로마 즉, 세상 권세를 잡은 사탄의 최고부하의 허락부터 받고 오라는 뜻이다.

눈에는 안 보였지만 예수님은 구약시대 내내 유대인들의 대제사장이셨다. 율법을 수여하신 분이다. 하늘에서 이스라엘의 역사에 직접 개입하셔서 필요하다면 연단과 풍요를 번갈아 주시면서 당신의 택하신 백성들의 종교교육과 영성훈련을 이끄셨다.

지금 바로 그분에게 로마, 아니 사탄의 하수인인 인간 대제사장이 너무나 뻔뻔한 도무지 입에 올릴 수도 없는 대역무도의 불경을 행하고 있다. 예수님이 그 자리에서 즉사시키지 않은 것만도 얼마나 큰 은혜와 자비인지 모른다. 일본에 아부하여 총리대신이 된 이완용이 독립운동가를 체포해선 일본에 협력하는 것이 애국하는 일인데 일본을 거역했으니 민족의 배신자라고 야단치며 처형한 것과 같다. 아니 그것과도 도무지 비교할 수 없는 잘못이다.    

대제사장이 둘인 현대 교회

그런데 이런 어처구니없고 말도 안 되는 죄악이 예수님 당대가 아닌 오늘날 대명천지에, 그것도 복음주의 교회 안에서 떳떳이 자행되고 있다. 한국교계의 지도자로 추앙받는 일부 대형교회 목사들이 담임목사 직분을 세습하고 있다. 교회 안에 대제사장이 아버지와 아들 둘이 있는 셈이다.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은 목회자뿐만 아니라 신자들에게도 좁고 협착한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세상의 죄악과 사탄과 사망의 세력과 맞서 싸우다 보면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게 마련이다. 외롭고 고달픈 싸움을 싸워나가야 한다.

그런데 자기 아들에게 교회를 개척하는 그 고생은 시킬 수 없다고 세습을 하고 있다. 대제사장이 자기 생명을 전 백성의 죄 값과 연계시키는 도피성 제도와 정반대다. 성경을 제대로 이해했다면, 도피성 제도에 담긴 하나님의 뜻이라도 안다면 도무지 행할 수 없는 짓이다. 성경을 알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담임목사가 되어서 성경을 가르칠 수 있다는 말인가? 성경을 무시하는 짓이다. 성경을 무시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무시하는 짓이지 않는가?

거기다 그런 담임목사에게 반대하고 교회에 충성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거역하고 성령을 훼방하는 죄라고 매도한다. 더 큰 문제는 교인들 대부분이 무엇이 틀렸는지도 모르고 그저 아멘으로 그런 목사에게 화답한다. 성경을 무시하는 일에 신자들이 더하다. 평생을 두고 성경을 스스로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세상의 권세, 명예, 재물이 더 생기면, 아니 그것만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성경은 얼마든지 무시하겠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서 예수님 당대의 대제사장들보다 더 심한 짓도 쉽게 자행하겠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 그런 목적으로만 교회에 출석하고 있다. 그러고도 무엇이 잘못인 줄도 모르고, 아니 교회 안에서 종교적 열성을 보이니 아주 신령하다고 착각하고 있다. 오죽하면 세상 사람들마저 교회 안에 예수가 없고 교회 밖에 있다고 비아냥거리겠는가?

원래 복수로는 절대 사용할 수 없는 대세사장이라는 단어를 추악하고 치사하고 완악한 인간들이 복수로 사용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보다 사정이 더 나빠졌다. 절대로 복수가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되는 예수라는 단어마저 복수로 사용하고 있다. 예수 외에 구원의 길이 얼마든지 있다고 기독교 교회 안에서조차 인정하고 있으니 말이다. 십자가 복음이 퇴색되다 못해 아예 실종되어 가고 있다.

인간의 타락이 과연 어디까지 이를지 정말로 두렵기 짝이 없다. 그러면 그럴수록 예수님의 십자가만이 높아져야 한다. 인간의 살고 죽음은, 정말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의 진리를 온전히 깨닫고 그 사랑 앞에 항복하는 길 외에는 절대로 없음을 뼈저리게 절감해야 한다.

본문 말씀이 오늘날의 신자에게 던지는 의미는 본문과 똑같이 “이틀 후면 유월절이 되리라.”이다. 이제 곧 예수님이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다. 오셔서 예수라는 단어를 복수로 사용하고 있는 자들을 영영한 불에 던질 것이다.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을 향해 내가 너희를 도무지 모른다고 하면서 새 하늘과 새 땅 밖으로 내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