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23 15

휘몰아치듯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제야 조금 틀이 잡히나 봅니다. 휘몰아치듯 시간이 흘렀습니다. 몸이 이제서야 길들여지나 봅니다. 이제까지와는 달리 이웃의 틀에 맞추어야 하기에 이사와 함께 좀 분주했습니다. 책정리가 힘들었고 모든 기기들을 새롭게 세팅하는데 많은 시간이 흘렀네요. 어제서야 비데가 설치됨으로 대충 마무리 되었네요. 여러 차례 어르신들과 만났고 어제는 앞으로 섬길 교회의 목사님과 저녁을 같이했습니다. 어르신이 거하시는 뜰 안에 예배당이 있는데 집에까지 걸어서 15분 거리입니다. 갈 때는 내리막인데 올 때에는 약간 오르막입니다. 시골길? 이기에 차가 무섭더라고요ㅎㅎㅎ 지금은 어르신을 병원에  모셔드리고 가까운 곳에 있는 투썸에 와 있습니다. 제법 넓은 곳인데  좀 시끄러운 음악이 거스리지만 그런대로 운치가 있네요. 치료시간이..

지속적인 경건의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삼상11:12-15) / 리민수목사

지속적인 경건의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삼상 11:12-15)  본문은 사울이 길갈에서 명실상부한 공식적인 이스라엘 왕으로 즉위하는 장면이다.  주목할 것은 사울이 일찍이 자신이 왕으로 선출된 것을 인정하지 않았던 자들(삼상 10:27)을 용서한 것(12-13절)이다. 즉 사울은 자신의 반대자를 숙청하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관대하게 용서하고 온 이스라엘이 하나가 되도록 화합을 도모했다.   그러나 사울은 그만 집권 후반기에 교만하여 이러한 관대함은 사라지고 하나님을 업신여기며 추악한 정치적 탐욕에 사로잡혔다. 이는 그가 하나님 앞에서 지속적인 경건의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세계의 비밀이신 하나님(욥 38:1-7) / 정용섭목사

창조절 8주, 2024년 10월 20일  욥 이야기 혹시 신정론(神正論)이라는 신학 용어를 들어보셨는지요. 신정론은 이유를 알 수 없는 인간의 극심한 고통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나왔습니다. 의학기술이 고도로 발전한 지금도 선천적으로 큰 장애를 안고 태어나는 아이들이 있고, 길을 가다가 ‘묻지 마’ 폭행에 희생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연재해나 각종 사고로 중도 장애인이 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전쟁은 군인만이 아니라 수많은 부녀자와 아이들까지 희생시킵니다. 참척의 고통도 일상적입니다. 이런 마당에 하나님은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나요? 하나님은 정의롭고 사랑이 충만하며 전능하신 존재일까요? 2024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한강의 작품 배경에도 이런 문제의식이 놓여 있습니다. ..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히11:8) / 이금환목사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히브리서11:8)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자기 고향, 자기가 살던 땅, 친척들을 떠나 올 때 모든 것이 다 보이는 것도 아니었고, 살 집이나, 약속의 땅에 대한 실물 계약서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미래의 모든 청사진이 완벽하게 그려져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디로 가야할지, 그곳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가본 적도 없고, 듣도보도 못한 곳이라 갈 바를 알지도 못하면서도 믿음으로 순종하며 나아갔습니다. 우리가 미래를 모르는 것보다 아브라함은 훨씬 더 불확실한 미래를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나아갔습니다.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불안하십니까? 믿음으로 기도하며 그 미래를 향..

대림절에 대해(4) / 정용섭목사

승천과 재림을 주제로 하는 명화를 볼 수 있소. 실제로 예수님이 공중 부양의 모습으로 그려지오. 그림은 말이 전하지 못하는 어떤 궁극적인 진리를 전하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독자들을 착각하게도 만드오. 화가들도 실제로 공중 부양이 일어난다는 뜻으로 그렇게 그린 것은 아니오. 궁극적인 생명의 세계로 변화되었다는 사실을 그렇게 표현한 것뿐이오.     궁극적인 생명이라는 말이 어쩌면 상투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소. 생명이면 그냥 생명이지 궁극적인 생명이 따로 있느냐고 묻고 싶소? 이걸 내가 명쾌하게 설명할 자신이 없소. 이는 곧 예수 부활을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는 것과 같소. 간접적으로 말하겠소. 노자와 장자가 말하는 도(道)를 생각해보시오. 그걸 실증적으로 해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소. 궁극적인 생명도 그와 ..

대림절에 대해(3) / 정용섭목사

예수 재림이 일어날 때의 장면을 머리에 그려보시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보도에 따르면 예수님은 구름에 싸여 하늘로 올라가신 그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신다 하오. 신약성서 시대에 구름과 승천은 어떤 궁극적인 사건을 설명하는 은유(메타포)였소. 오늘 그것을 사실적인 것으로 믿는 사람은 없소.     성서읽기의 어려움이 바로 여기에 있소. 성서에는 많은 종류의 글쓰기 형태가 들어 있소. 역사, 시, 잠언, 묵시, 율법, 예언, 비유, 편지 등이오. 그리고 성서가 기록되던 당시의 세계관이 그대로 담겨 있소. 성서만이 아니라 텍스트로 된 모든 문헌이 비슷하오. 텍스트를 이해하려면 언어(문자)를 뚫고 그 안으로 들어가야 하오. 그런 작업을 해석학이라 하오. 해석 작업 없이 텍스트를 이해할 수는 없소. 이해할 수 없..

대림절에 대해(2) / 정용섭목사

대림절(待臨節, Advent)은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을 주제로 하는 절기요. 성탄절인 12월25일 이전의 4번에 걸친 주일을 차례대로 대림절 첫 주일, 둘째 주일.... 이렇게 계산하오. 세계 교회의 전통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첫 주일에는 초를 하나 켜고, 둘째 주일에는 두 개를 키오. 넷째 주일에는 물론 네 자루의 초를 키오. 초는 빛으로 오신 예수를 가리키는 메타포요. 금년에는 성탄절이 주일과 겹쳤소.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 그리고 오신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해보셨소? 여기서 예수님은 메시야를 가리키오. 예수가 메시야인 근거가 무엇이오? 도대체 메시아가 우리에게 왜 필요한 것이오? 하나님은 왜 직접 세상을 구원하시지 메시야를 보내서 구원하신다는 말이오? 더 근본적으로, 구원이 무엇이요..

대림절에 대해(1) / 정용섭목사

오늘은 2011-2012년 대림절 첫째 주일이었소. 그대는 교회 절기에 대해서 알고 있소?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일반적으로 교회력에 대해서 관심이 없소. 나의 젊은 시절을 돌아보면 그게 맞는 말이오. 신학공부를 마치고 목사가 된 뒤에도 교회력은 나와 거리가 멀었소. 그게 나의 잘못은 아니었소. 중학생 때부터 나름으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지만 교회력을 별로 접해보지 못했소. 기껏해야 성탄절, 부활절, 맥추감사절, 추수감사절만 지켰소. 그런 절기의 공통점은 헌금을 낸다는 것이오. 그러니 내 머리에는 교회력이 헌금 내는 날로만 각인이 된 것이오.     교회력 망각은 한국개신교회의 큰 약점이오. 한국교회가 교회력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신앙의 근본이 주로 부흥회 관점에 치우쳐 있기 때문이오. 지금 당장..

오직 믿음(14) / 정용섭목사

우리는 마틴 루터가 말하는 ‘오직 믿음’을 신앙의 중요한 원리로 삼는 사람들이오. 이 문제를 그대는 훨씬 진지하게,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깊이 생각해야만 하오. 혼자서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오. 신앙 선배들의 글을 읽어야 하오. 그것도 신앙적인 바탕이 탄탄한 선배들의 글을 읽어야 하오. 그렇지 않은 글들을 오히려 그대로 하여금 믿음을 왜곡하게 만들 것이오. 신앙의 왜곡이 한국교회에서는 흔하게 일어나오. 거의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오. 그대의 신앙이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를 확인해보려면 그대를 감싸고 있는 가장 심오한 신비를 얼마나 실질적으로 경험하고 있는지를 살피면 되오. 한국교회에서는 신비가 매우 비현실적인 망상 정도로 취급되오. 헛것을 보면서 그것을 신비경험이라고 주장하오. 건강한..

오직 믿음(13) / 정용섭목사

가능하다면 믿음은 우리를 감싸고 있는 가장 심오한 신비에 접하게 한다는 말을 화두로 삼아 보시오. 여기서 많은 대답을 들을 수 있소. 예를 들어, 신앙의 세계로 바르게 들어간 사람은 결코 독선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소. ‘예수천당, 불신지옥’ 같은 생각을 아예 할 수가 없소. 공격적인 선교를 하지 않소. 감히 누가 구원을 받았느니, 아니니 하고 말하지 못하오. 자기의 믿음을 절대화하지 않소. 왜냐하면 삶의 신비를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오. 오해가 없었으면 하오. 믿음이 깊어지면 자기의 신앙마저 상대화한다는 말이 아니오. 상대성에 빠지면 믿음 자체가 성립되지 않소. 자기가 믿는 하나님이 절대적인 분이라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건 믿음이 아니오. 믿음은 절대적인 신뢰를 가리키오. 그러나 독선으로 빠지지는 않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