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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녹슬지 않는 증인 (행 23:1~11, 31~35) / 이재훈목사

새벽지기1 2024. 10. 26. 06:57
예수님이 “모든 족속을 제자 삼으라”는 명령만 주시지 않고,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도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 엄청난 고난과 위협 속에서도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자신의 용기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임재가 그와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선교 여정 내내 결정적인 순간마다 예수님이 다양한 채널을 통해 그와 함께하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고린도에서는 환상 가운데 “두려워 마라. 잠잠히 잊지 말고?말아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아무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전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에는 환상 속에서 “서둘러 즉시 예루살렘을 떠나거라. 이곳 사람들은 네가 나에 대해 증언해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는 직접 임재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더욱 담대하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할 것이다”
“그날 밤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담대하여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에 대해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나에 대해 증언해야 할 것이다’”(11절).
‘그날 밤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라는 이 문장이 얼마나 위로가 되고 또 능력이 됩니까? 예루살렘에서 담대하게 증언한 사도 바울에게 주신 말씀은 “이제 수고했으니 쉬어라”가 아니었습니다. 더 큰 일을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더욱 담대하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할 것이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 자신의 증언이 예루살렘에서 끝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예루살렘에 왔고, 예루살렘에서 일어나는 여러 상황을 볼 때 죽음을 예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계획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이 끝이 아니라 로마에서도 사도 바울의 증언이 이어져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계획이 바뀐 게 아니라 사도 바울에게 모든 것을 알려 주지 않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늘 앞날에 있을 일을 지하철노선 보듯이 모두 알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로 미리 알려 주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순종하는 걸음을 내딛을 때 그 다음을 알려 주십니다. 매 순간 우리에게 순종의 발걸음이 있을 때 다음 발걸음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담대하다
예루살렘까지 죽기를 각오하고 순종했던 사도 바울에게 이제 “로마에서도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임재 가운데 사명의 발걸음을 하는 사도 바울을 통해 배우는 그리스도의 증인된 모습이 어떠합니까?
첫째, 그리스도의 증인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담대합니다. 1절을 보면 사도 바울이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얻었을 때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담대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자신을 죽음에 처하게 할 수 있는 사람들 앞에서도 그는 비굴하게 고개 숙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 달라고 애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선한 양심을 따라 행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공회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내 형제들이여, 나는 오늘까지 모든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위해 살아왔습니다’”(1절). 
사도 바울은 어찌하든 어려운 상황을 모면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경험한 진실, 곧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신다는 것과 살아계신 예수님이 자신을 부르셨다는 것,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모든 세상에 전해져야 한다는 것, 그분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것, 그 진실만 드러내려고 했습니다. 
여러분, 세상을 살아가며 험난한 여정을 겪고, 예리한 공격 앞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내적인 힘은 선한 양심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곁에 서 있는 사람에게 “입을 치라”고 명했습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얼마나 세속적이고 탐욕적이고 불같은 성격인지를 보여줍니다. 사도 바울은 위축되지 않고 더욱 담대하게 반응하며 지적했습니다. 
“그러자 바울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치실 것이오. 당신은 회칠한 무덤과 같소! 당신은 거기 앉아 율법에 따라 나를 심판하면서 도리어 당신 자신은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명령하고 있지 않소!’”(3절).
자신을 치라고 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당신을 치실 것이오”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담대한 말입니까? ‘회칠한 무덤 같은’이라는 표현은 위선적인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의 모습이었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의 모습은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에게 회개를 촉구했던 세례 요한과 같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신사적  
그런데 사도 바울의 입을 치라고 했던 사람이 대제사장 아나니아라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감히 네가 대제사장을 모욕하느냐?”라는 말에 비로소 대제사장이라는 걸 알고 사도 바울이 그의 위치와 권위를 존중하는 태도를 보입니다. 대제사장의 권위를 존중합니다. 여기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태도가 있습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증인은 어떤 상황에서도 신사적입니다.  
“바울이 대답했습니다. ‘형제들이여.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몰랐습니다. 기록되기를 ‘네? 백성의 지도자를 모욕하지 말라’고 했으니 말입니다’”(5절).
원수 같은 이에게도 예의를 갖춥니다. 담대함이란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에게 욕하고, 저주하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은 담대하며 동시에 신사적입니다.
요즘 사회를 보면 양극단으로 대치되어 있습니다. 나와 의견이 다르면 무조건 적이 되는 사회가 되고 있습니다. 다른 의견과 인격을 구분하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내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내 인격을 무시했다’고 생각하며 분노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서로 다른 의견에 대해서 얼마든지 토론하고, 치열하게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격은 존중해야 합니다. 그것이 신사적입니다. 담대하게 상대방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과 동일한 대상을 신사적으로 대하는 게 때로 어려울 수 있습니다. 담대하다보면 비신사적이 되고, 또 신사적이 되다보면 담대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선한 양심을 따라 그리스도의 증인은 담대하며 또한 신사적인 인격을 잃어버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증인은 
상황을 반전시키는 지혜가 있다 
셋째, 그리스도인의 증인은 상황을 반전시키는 지혜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모인 사람들, 공회원들 가운데 일부는 사두개파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사두개파’는 구약시대 사독의 후예들입니다. 사독은 성전을 관리하는 직임을 맡은 사람이고, 그 이후 사독의 후예들이 성전을 관리했습니다. 문제는 성전을 매개로 그들이 이득과 사명을 추구하고, 권력화 되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부활을 믿지 않고, 천사도 믿지 않고, 영의 세계도 믿지 않는 지극히 물질주의적이고 현실적인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초월성,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영역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물질주의적이 됩니다. 사두개파 사람은 오늘날 유물론자들과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시 바리새파 사람들은 구약에 나타난 부활에 대한 약속, 죽은 자를 일으킬 수 있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 영의 세계, 천사의 영역에 대해서 인정했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부활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지만, 죽은 자의 부활을 인정했던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 틈을 이용한 것입니다. 지혜로운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나는 바리새파 사람이요. 내가 이처럼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은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소망 때문입니다”라고 호소합니다. 틀린 말이 아닙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어떻게 그리스도의 부활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기 전에 이미 구약에 죽은 자의 부활 소망을 보여 주셨고, 여러 표적과 약속을 통해 죽은 자의 부활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바리새인들도 그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제가 그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한 소망 때문에 이러한 상황에 있습니다”라고 하자 바리새파 사람들이 마음을 돌이키기 시작했습니다. 사두개파 사람과 바리새인들이 처음에는 사도 바울을 죽이려고 연합 했다가 균열이 생기고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천부장이 개입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아마 그들이 하나로 뭉쳐 있었다면 천부장이 개입하기가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틈을 벌리는, 상황을 반전시키는 지혜가 사도 바울에게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세상의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도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흉악한 모습으로 우리의 신앙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선으로 가장하고, 자유로 가장하고, 인권으로 가장해서 우리의 신앙을 녹슬게 만듭니다. 우리가 싸워야할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인데, 칼을 칼집에서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유사시에 칼이 칼집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어떤 위기가 닥쳤을 때 하나님 말씀을 아무리 찾아봐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녹슨 칼집에 칼이 들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녹슬지 않았습니다. 성령 안에, 말씀 안에 깨어 있었기에 위기 상황에서 상황을 반전시키는 지혜의 칼날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엄청나게 무서운 이데올로기가 신앙을 녹슬게 하고 있습니다. 그 이데올로기의 거짓을 파헤치고, 그것을 무너뜨릴 수 있는 지혜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무너뜨리고, 인간의 성이 부여 된 게 아니라 자기가 선택할 수 있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어제는 여자로 살고 오늘은 남자로 살고 내일은 어떤 성으로 살지 자기도 모르다고 주장합니다. 이 무서운 이데올로기에 맞서서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믿고, 이 문제를 뚫고 나가려면 우리의 신앙이 녹슬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증인은 
역설적인 하나님의 보호하심 경험
넷째, 그리스도의 증인은 역설적인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경험합니다. 사도 바울이 천부장의 보호를 받습니다. 사두개인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서로 싸우고 소동하는 가운데 천부장이 사도 바울을 보호하려고 빼냅니다. 
그때 유대 사람 40명이 헌신합니다. “사도 바울을 죽이기 전까지는 먹지도 마시지 않겠다”고 결의합니다. 무서운 테러리스트들이 나선 것입니다. 그들이 음모를 꾸밉니다. 천부장에게 사도 바울을 다시 공회로 데려오도록 요청을 합니다. 감옥에서 공회로 오는 길목에서 사도 바울을 죽이겠다는 음모를 꾸밉니다. 엄청난 암살음모입니다. 하나님이 이 음모를 놀랍게도 사도 바울의 조카가 듣게 하십니다. 이름도 모르는 사도 바울의 조카가 이 계획을 엿듣고 천부장에게 달려가 사실을 알립니다. 
천부장은 밤 9시 어두울 때 사도 바울을 로마 총독부가 있는 가이사랴로 급송하는 계획을 세웁니다. 이를 위해서 200명의 보병대, 70명의 기마대, 200명의 창을 둔 군인을 동원합니다. 어느 학자는 이 규모가 예루살렘에 주둔하는 병력의 절반에 해당한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 한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 이렇게 많은 병력을 동원했다는 것입니다. 40명의 테러리스트들이 공격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일은 천부장에게 신앙이 있어서 한 게 아닙니다. 사도 바울과 인척관계이기 때문도 아닙니다. 자신이 통치하는 영역에서 불필요한 암살로 인해서 소요가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을 안전하게 호송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얼마나 놀랍습니까? 유대인들이 음모가 도리어 사도 바울이 벨릭스 총독에게까지 안전하게 호위를 받으며, 그것도 걸어서가 아니라 말이든 나귀든 동물을 타고 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얼마나 놀랐습니까? 악한 음모가 없었다면 사도 바울은 계속 예루살렘에 머물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사도 바울에게 “로마에서도 증언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악한 음모가 사용 되어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이 악한 음모를 일으켰다는 게 아닙니다. 그 음모마저 사용하셔서 사도 바울이 동물을 타고 호위를 받으며 안전하게 로마로 갈 수 있게 하신 것입니다. 
“사명을 완수하기 전까지는 죽지 않는다” 
여기서 유대 지도자들의 악한 양심과 로마법을 지키는 세속 통치자들의 객관적인 양심이 대조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들은 거짓과 고소, 암살 위협을 하지만, 하나님 믿지 않는 이방 권력은 도리어 공정한 재판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비양심적인 유대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의 증인을 녹슬게 하고, 못쓰게 만들려고 했지만, 함께 하시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사도 바울은 담대하고, 신사적이고, 지혜롭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았습니다. 
19세기 중반 30년 동안 아프리카 정글을 다니며 60만 명 이상을 그리스도께 인도했던 선교사 데이빗 리빙스턴은  의료선교사가 되기 위해 의학을 공부했지만, 선교사로 헌신하며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어느 곳이든 보내 주십시오. 주님이 저와 그곳에 함께 가 주십시오. 어떤 짐이든 주십시오. 오직 견뎌낼 힘도 주십시오.” 
그때 주님의 음성이 그에게 들려왔습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그는 원래 중국 의료 선교사로 가려고 했지만 아편전쟁으로 인해 가지 못하고, 아프리카로 갔습니다. 아프리카 전역을 다니며 지도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선교사가 아프리카로 들어갈 수 있게 해줬습니다. 한편으로는 노예무역을 막으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도리어 노예 무역상들이 그가 만든 지도를 가지고 아프리카를 다녀서 오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는 아프리카 선교 여행을 다니며 맹수와 질병, 어떤 지역에서는 백인은 무조건 죽이는 원주민들의 위협에 끊임없이 시달렸습니다. 그가 이런 고백을 남겼습니다. 
“나는 사명을 완수하기 전까지는 죽지 않는다.” 
그가 죽음을 부인한 게 아닙니다. 자신의 사명을 다할 때까지 하나님이 보호해주실 거라는 의미입니다. 그는 마지막 탐험지 근처 작은 오두막집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습니다. 원주민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시신을 미이라로 만들어 1,600km를 8개월 동안 걸어서 운구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23장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모습과 선교사 데이빗 리빙스턴이 걸었던 모습이 너무나 비슷합니다. 사도 바울과 리빙스턴 모두 살해 위협과 질병,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으로 살았습니다. 세상의 그 어떠한 공격과 위협에도 녹슬지 않는 하나님의 무기가 되었습니다. 담대하고, 신사적이고, 지혜롭고, 하나님의 놀라운 보호하심을 체험하는 증인이었습니다. 우리도 세상에 녹슬지 않는 하나님의 증인으로 쓰임 받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