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의 긴박성 (눅 9:51-62) / 정용섭 목사
성령강림 후 3주, 2025년 6월 29일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중에 벌어진 어떤 이야기를 오늘 설교 본문인 눅 9:51절 이하가 보도합니다. 북쪽 갈릴리에서 남쪽 예루살렘으로 가려면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합니다. 제자들이 먼저 사마리아 지역에 들어가서 예수님이 머물 곳을 찾아보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 일행을 거부했습니다. 이유는 예수 일행의 목적지가 예루살렘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당시 사마리아 지역 사람과 예루살렘이 있는 유대 지역 사람들의 사이가 몹시 좋지 않았습니다. 기분이 상한 제자들이 예수께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라고 말합니다. ‘벼락 맞을 놈들!’이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엘리야 이야기를(왕하 1장) 알고 있었나 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꾸짖고, 다른 마을로 가셨다고 합니다. 꾸짖은 이유는 사마리아 사람들의 잘못이 그리 큰 게 아니고, 그들에게 잘못이 있더라도 그런 일로 하늘의 불 운운하는 제자들의 태도가 옳지 않았기 때문이겠지요.
세 단편
이 일 후에 오늘 설교 본문에는 짤막한 세 가지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첫째는 57-58절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합니다. 이런 비슷한 말은 제자들의 입에서도 종종 나왔습니다. 말은 그렇게 할 수 있으나 실제로 그 말대로 실천하기는 어렵습니다. 일종의 허언인 셈입니다. 예수께서 58절에서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둘째 이야기는 59-60절입니다. 예수께서 다른 어떤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를 따른다는 말은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제자가 된다는 것은 스승의 가르침과 스승의 삶을 배우고 실천한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그런 관계를 찾기 힘듭니다. 대개는 거래 관계이거나 친목 관계입니다. 학교에서마저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지식 정보를 주고받는 차원에 머뭅니다. 앞으로는 인공 지능이 모든 지식 정보를 제공하니까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는 완전히 실종될 가능성이 큽니다. 제자가 되라는 예수님의 요청에 이 사람은 핑계를 댑니다. 일단 집에 가서 아버지 장례를 치르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의 반응이 60절에 나옵니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이런 표현만 들으면 아버지 장례도 치르지 못하게 하는 예수는 인정머리라곤 찾아보기 힘든 인물처럼, 완전히 사이코패스 심리를 보이는 사이비 종교 교주처럼 보입니다.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오겠다는 이 사람의 말은 지금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게 아니라 앞으로 세월이 흘러서 그런 일이 벌어지면 모든 일들을 처리한 뒤에 예수의 제자가 되겠다는 뜻입니다. 이는 비유적으로 어떤 지인에게 교회에 갑시다, 하고 권면하자 그 사람은 돈을 좀 더 벌어서 경제적으로 안정되면 가겠다고 대답하는 거와 같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아버지 장례 운운은 말뿐이지 실제로는 예수의 제자가 될 준비가 안 됐다는 뜻이겠지요.
셋째 이야기는 61-62절입니다. 앞의 이야기를 들었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다른 어떤 사람이 예수께 이렇게 말합니다.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앞의 사람은 아버지 장례를 말했고, 이번 사람은 가족과의 작별을 언급했습니다.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들을 정리한 다음에 예수의 제자가 되겠다는 뜻입니다. 이 사람도 예수의 제자가 되는 일을 사실상 뒤로 미룬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대개 비슷합니다. 그에게 예수께서 62절에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이 구절도 야박하게 들립니다. 가족과의 작별마저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같으니까요. 예수께서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눅 14:15-24절에도 비슷한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고 사람들을 초대했습니다. 초대받았던 이들이 막상 잔칫날이 되자 똑같이 거절했다고 합니다. 어떤 이는 밭을 샀다는 이유, 또 어떤 이는 소를 샀다는 이유, 결혼했다는 이유를 댔습니다. 지금 우리가 바쁘게 지내는 그런 일상에 속한 일들이 이유입니다. 사실 이런 일상은 소중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일상을 소홀히 할 수 없고 소홀히 해도 안 됩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종들에게서 전해 들은 주인은 화를 내고, 거리에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시각 장애인들과 다리가 불편한 자들을 잔치에 데리고 오라고 이른 다음에 이렇게 말을 맺습니다.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들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예수님은 이 세상의 일상을 가치가 없다고 여기는 분이 절대 아닙니다. 오히려 일상의 소중함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일상에 거리를 두고 종교적인 업무에 매달려서 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가리켜서 위선자들이라고 일갈하신 적도 있습니다. 당시 예수께서는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왜 오늘 설교 본문에서 하나님 나라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억지스럽게 말씀하신 걸까요? 그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일상에 은폐된 하나님 나라의 긴박성을 사람들이 놓치면서 사는 것에 대한 엄중한 경고입니다. 사람들이 일상에 과몰입함으로써 오히려 일상의 깊이와 그 신비와 그 생명 충만을 놓칩니다. 예를 들어서 먹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먹방’ 유튜브에서 보듯이 식탐 자체를 목표로 하면 정작 중요한 ‘일용할 양식’의 소중함을 놓칩니다. 무한 성장을 목표로 하는 오늘의 자본주의는 이런 ‘먹방’ 메커니즘의 절정이 아닐까요?
일상과 하나님 나라
예수님이 마음에 둔 하나님 나라는 무엇인가요? 그게 왜 긴박하다는 걸까요? 그게 어떤 이들에게는 별로 절실하게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운명을 결정한 하나님 나라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인가요? 여러분이 알다시피 공생애에 나선 예수님의 일성은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벌써 2천 년 전에 가까이 왔다면 이 세상은 눈에 띄게 달라져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세상은 별로 달라진 게 없어 보입니다. 살아가는 방식만 달라졌을 뿐이지 여전히 전쟁이 일어나고 사람들끼리 배신하고 사랑하거나 미워합니다. 억울한 사람은 여전히 억울하고 잘난척하는 사람은 여전히 잘난척합니다. 지금이 2천 년 전보다 더 평화로운 세상이라는 증거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예수님의 영혼을 충만하게 채운 하나님 나라의 긴박성을 우리는 어떻게 경험할 수 있나요?
아버지 장례, 가족 작별, 논밭, 소, 결혼 등등, 크고 작은 일상을 유보할 정도로 우리 각자의 삶에서 중요한 게 무엇인지를 일단 구체적으로 짚어보십시오. 숨쉬기가 그 무엇보다도 우선입니다. 숨을 안 쉬면 죽으니까요. 밥 먹기와 배설하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조금 생각의 폭을 넓혀서, 돈이 많이 들어가지 않으면서도 우리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확인해 보십시오. 걷기와 책 읽기와 텃밭 가꾸기와 차 마시기와 대화하기와 하늘 보기와 노래하기 등등입니다. 끝이 없을 정도입니다. 이런 데서 삶의 희열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저는 월 2만 원 회비를 내고 테니스 운동을 하고, 몇 달 전부터는 3개월에 10만 원을 내고 헬스장을 사용합니다. 경제적으로 큰 부담 없이 즐겁게 운동할 수 있습니다. 물론 더 넓고 쾌적한 집에 살아야만 한다면 많은 돈이 필요하겠지요. 비싼 해외여행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자주 나가려면 돈이 더 필요하고, 자식들에게 고액 사교육을 시키려면 돈이 엄청 필요하겠지요. 그런 돈을 마련하려면 일상을 바쁘게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논밭을 사야 하고, 소를 사야 하고, 결혼도 해야 합니다. 그런 일에만 마음을 두면 하나님만이 행하실 수 있는 생명의 나라는 우리의 관심에서 멀어집니다.
어떤 이들은 더 현실적으로 어려운 문제를 제기할 겁니다. 가난한 이들은 쪽방촌에서 보듯이 지금만이 아니라 나이 들어서 삶이 더 초라해진다고 말입니다. 노인 문제는 풀기 어렵긴 합니다. 우리나라 노인 빈곤 문제는 세계 경제 수준 10위 내외라는 사실이 믿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노인 자살률도 유독 높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이 앞으로 좋아진다는 보장이 없어서 젊은이들은 더더욱 돈에 매달립니다. 이런 사회적인 문제는 정부가 책임지고 해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최소한 노인들의 일용할 양식은 정부에서 책임지는 복지가 실현되어야 합니다. 생각만 바꾸면 상당한 정도로 해결할 수 있습니다. 제가 다른 설교에서도 말씀드렸듯이 국방비를 10-20%만 줄일 수 있다면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겠지요. 미국 트럼프는 오히려 우리의 국방비 비중을 더 높여야 한다고 압박합니다. 우리처럼 분단국가에서 무조건 국방비를 낮출 수는 없으니까 남북 평화 기조를 조성하는 게 우선적입니다. 북한은 믿을 수 없으니까, 국방비를 더 높여서라도 압도적인 군사력을 갖춰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군수업체들이 박수를 보내겠지요. 저는 사회학자도 아니고 국방이나 국제 관계 전문가가 아니라서 더 구체적인 말씀을 드리지는 못합니다. 다만 방향만 말씀드릴 뿐입니다. 모든 사람은 우리 주님께서 기도의 내용으로 삼은 일용할 양식을 제공받아야 한다고 말입니다.
영혼의 충만
현대인에게 정말 더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문제는 최소한의 생존 조건인 일용할 양식만으로 영혼의 만족을 누리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삶의 조건이 열 배나 좋아져도 행복하게 살아가지 못합니다. 여기 두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한 사람은 누가 보기에도 화려하게 삽니다. 그에게 돈이 모이고 사람도 모입니다. 대형 교회 목사처럼 명예와 존경을 한 몸에 받습니다. 그래도 그의 영혼에는 만족이 없습니다. ‘설마’라고 생각되나요? 괴테의 작품「파우스트」에는 파우스트 박사가 이 세상의 부와 명예로 만족하지 못하여 메피스토펠레스라는 악마에게 자기 영혼을 팔아서 더 자극적인 세상에서의 쾌락을 손에 넣었으나 그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소녀 그레첸의 사랑으로 구원받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 다른 한 사람은 누가 보기에도 단조롭게 삽니다. 친구도 많지 않고, 그가 거처하는 집도 넓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동정을 살만한 인생입니다. 그래도 그의 영혼은 충만할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자기 삶의 곳곳에서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외로울 틈이 없고 자기 연민에 떨어질 겨를도 없습니다.
저는 예수님이야말로 인간 중에서 유일하게 하나님 나라로, 즉 하나님의 사랑으로 영혼이 충만한 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충만하다는 건 하나님 나라가 그의 삶에서 절실하고 긴급하다는 뜻입니다. 사랑에 떨어진 사람에게는 사랑의 능력이 순간마다 긴급한 거와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서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본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쟁기를 손에 잡은 사람이 뭔가 미련이 있다는 듯이 자꾸 뒤를 돌아보면 방향을 놓칩니다. 쟁기질이 어디로 튈지 모릅니다. 쟁기질을 하는 사람은 오직 밭을 가는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쟁기질을 빨리 끝내고 친구들과 놀러 다닐 생각을 하거나 일당이 얼마인지만을 계산한다면 쟁기질이 재미없습니다. 쟁기질 자체에 집중하는 사람은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쟁기질만으로 그의 영혼이 충만해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쟁기질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우리의 생명 지향적 수행입니다. 하나님의 통치와 하나님의 사랑을 더 풍성하고 충만하게 경험하는 일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종교적인 정보에 머무는 분이 아니라 생명의 원천이기에 그 안으로 들어간 깊이만큼 우리가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음악도 그렇고, 테니스 운동도 그렇고, 텃밭 가꾸기도 그렇고, 글쓰기도 그렇고, 아이 양육하기도 그렇고, 설거지도 그렇습니다. 거기에 온전히 집중하는 사람들은 그 세계가 얼마나 아득한지를 깨닫습니다. 뒤를 돌아볼 겨를이 없습니다. 세상살이도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 경험이야 얼마나 더 깊고 무궁하고 풍요롭겠습니까.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고백록> 첫 장에서 “당신은 우리로 당신을 향해 살도록 창조하셨으므로, 우리 마음이 당신 안에서 안식을 얻을 때까지는 평안을 몰랐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가 말하는 저 안식이 얼마나 깊고 아득한지를 아는 사람은 알 것입니다.
이런 영적인 깊이를 아는 사람은 매 순간 거룩한 긴장감을 유지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인 ‘하나님 나라의 긴박성’이 바로 그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6-18)라고 권면했습니다. 내일 초강력 태풍이 몰려온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거대한 해일이나 화산폭발이 일어나거나 외계인이 찾아온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깨어 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얼마 후에 지구 평균 기온이 3도 상승하는 게 분명하다고 합시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신 바짝 차리고 탄소 배출을 최대한 억제할 것입니다. 내일 예수께서 재림하신다면 오늘 우리는 무엇을 할까요? 세상 사람들은 그런 건 다 그리스도인들의 종교적 상상이나 망상이지 실제가 아니라고 여길지도 모릅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들이 확신하는 현재와 미래의 삶은 정말 분명한가요? 그래서 그들의 영혼이 춤추고 싶을 정도로 충만할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개인의 운명과 세계 전체는 하나님 안에서 미래로 열려 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다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우리를 찾아온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런 믿음 가운데서 더 사랑하고 더 참고 더 희망하고 더 신뢰하면서, 그리고 하나님의 시간인 ‘카이로스’를 간절하게 기다리면서, 구원의 순간을 간절히 기다리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