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용섭목사

예수 '따름'이 답이다! (요 21:15-19) / 정용섭 목사

새벽지기1 2025. 5. 9. 07:13

부활절 3, 2025년 5월 4

 

 

교황 이야기

 

지난 2025 421일에 세상을 뜬 프란치스코 교황은 로마가톨릭교회의 266대 교황입니다. 로마가톨릭은 베드로를 제1대 교황이라고 내세웁니다. 베드로가 콘클라베에서 교황으로 선출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교황이라고 주장하지도 않았으니까 1대 교황 운운은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그렇게 해석한다는 뜻이겠지요. 역사적으로 본다면 베드로보다는 예수의 동생인 야고보가 최초 교회인 예루살렘 교회에서 실질적인 지도자 역할을 감당했다고 보는 게 맞습니다. 어쨌든지 제가 보기에 베드로가 1대 교황이라는 로마가톨릭의 해석은 두 군데 성경 구절에 근거합니다. 하나는 마 16:16절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들은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다른 하나는 오늘 우리가 설교의 성경 본문으로 선택한 요 21장입니다. 여기에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디베랴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베드로를 찾아오신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21:15)라고 묻습니다. 베드로는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내 어린 양을 먹이라.”라고 명령하십니다. 이런 대화가 16절과 17절에 반복해서 세 번이나 이어집니다. 이 구절을 읽는 사람들은 앞에서 짚은 마 16:18절에서 받은 느낌과 똑같이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교회를 돌볼 책임과 권한을 맡기셨다고 생각할 만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이런 책임과 권한 부여로 끝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고난을 겪을 것이라는 말씀이 18절에 이어집니다. <새번역>으로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네게 말한다.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를 띠고 네가 가고 싶은 곳을 다녔으나, 네가 늙어서는 남들이 네 팔을 벌릴 것이고, 너를 묶어서 네가 바라지 않는 곳으로 너를 끌고 갈 것이다.'

 

요즘 교황이 되는 것처럼 당시 전체 그리스도교를 책임지는 자리에 오르는 건 일단 멋진 일이지만,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씀은 두려운 것입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로마 제국의 네로 황제가 로마 대화재의 책임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돌리면서 전개된 박해 시절에 순교 당했다고 알려졌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서 처형당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고난은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했다는 명백한 사실이 이를 가리킵니다. 예수를 본받아 예수처럼 살겠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자신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면 취소할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는 결혼하지 않았고, 높은 자리에 오르지도 않았습니다. 재산도 없었고, 당시 종교 지도자들에게 인정받지도 못했습니다. 이국적인 풍경이 있는 지역으로 여행을 해본 경험도 없습니다. 기껏해야 갈릴리 호수 지역에서 예루살렘까지 성지 순례를 떠났을 뿐입니다. 급기야 삼십 대 초반에 로마 정치범에게 해당하는 십자가 처형으로 죽었습니다. 유대교 창시자라 할 모세나 불교 창시자인 부처나 이슬람교의 마호메트처럼 생전에 종교적 업적을 쌓을 기회도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그의 운명은 아주 단조롭고 짧았으며, 그래서 모두가 피하고 싶은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이나 여러분의 자녀가 예수처럼 살기를 바라는 분은 없겠지요?

 

기복신앙과 자본주의

 

21세기 현대인은 예수의 삶과 정반대로 럭셔리한 멋진 인생을 매일 꿈꿉니다. 세상 사람들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인도 비슷한 인생관으로 삽니다. 소위 삼박자 축복이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3 1:2절은 이렇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기복주의의 산실이라 할 순복음교회가 내세운 캐치프레이즈 구절입니다. 영혼의 축복, 범사의 축복, 강건의 축복을 가리켜서 삼박자 축복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거기에 혹한 그리스도인들이 여의도에 있는 순복음교회에 몰려들었고, 그 교회는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가 되었습니다. ‘잘 살아보세.’라는 새마을 운동의 열기와 맞물려서 한국교회는 복을 빌고 복을 보장하는 종교 기구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예배와 헌금과 기도를 중심으로 하는 교회 생활 잘하면 복을 받아서 부자가 되고 건강하게 오래 산다는 주장입니다. 지금은 이렇게 노골적으로 설교하거나 가르치지는 않지만, 그리스도인의 영혼에 이런 생각이 깊이 각인되어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21세기 들어서 그리스도인의 숫자가 줄어드는 이유 역시 사람들이 이런 종교적 욕망을 교회에서 채울 필요가 없는 시대가 되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일종의 유사 종교 역할을 하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멋진 인생을 펼치는 것으로 만족스러워합니다.

기복주의 신앙이 왜 나쁜데,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늘 남에게 민폐를 끼칠 정도로 가난하고 구질구질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냐, 출가 수도승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이냐, 하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딱 떨어지는 대답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육체를 안고 사는 사람이 어떻게 부와 재물 자체를 부정할 수 있겠으며, 풍요로운 삶 자체를 누가 기분 나쁘게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복된 삶 자체가 잘못이 아니라 세속적인 복만을 목표로 하는 삶의 태도가 잘못입니다. 그런 삶의 태도로 인해서 알게 모르게 영혼이 병들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해서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의 기복주의는 세상의 자본주의와 맥을 같이 합니다. 양쪽 모두 기본적으로 물질주의입니다. 오늘날 아무도 자본주의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경제 수준이 높아진 데에는 자본주의 역할이 컸습니다. 사회주의를 선택한 북한은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돈과 물질 중심적 사고방식이 도를 넘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머리 좋은 청소년들이 선택하는 직업은 대부분 연봉 높은 직업입니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볼 때 안타까운 일입니다. 자본주의의 작동원리는 무한 경쟁을 통한 무한 성장입니다. 그런데 무한 성장이 실제로 가능하지 않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빈부격차는 더 벌어지고, 그뿐만 아니라 크게 보면 단 하나뿐인 지구 생태계는 훼손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증상이 오늘날 지구적인 차원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납니다. 독일 본 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마르쿠스 가브리엘은 <왜 현대사의 시간은 거꾸로 흐르는가>라는 책에서 과학기술과 세계 경제 문제를 기업가들에게만 맡겨두지 말고 윤리학자들을 참여시켜야 한다고 외칩니다. 그는 오늘날 세계 4대 초대형 IT기업인 구글(Google), 애플(Apple), 페이스북(Facebook), 아마존(Amazone)이 세계 지배가 위험한 수준이라고 짚었습니다. 이 네 기업의 이니셜을 따서 GAFA라고 부르더군요. 유발 하라리는 이런 IT 기업과 인공지능이 지금보다 훨씬 발전한 세상이 가져온 인류의 미래를 크게 걱정합니다. 거대 자본과 인공지능을 소유한 소수의 기술자와 기업가가 인류를 지배하는 세계말입니다. 그들은 일반 대중을 노예처럼 다룰 가능성이 크다는 겁니다. 실제 세계보다 스마트폰을 통한 가상공간을 더 실제적인 현실로 여기는 현대인들은 이미 그들에게 종속된 건 아닐까요?

 

나를 따르라.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어떤 고난과 순교를 당할 것인지에 관해서 말씀하신 뒤에 아주 인상적이고 강력한 명령을 베드로에게 내렸습니다.

 

'나를 따르라.'

 

베드로는 교회의 대표자로서 목자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에게는 고난과 순교가 그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교회를 섬기는 일도 어렵고, 고난과 순교 문제도 어렵습니다. 교회를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에 관해서 사람들의 생각이 다르고, 고난과 순교 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도 다 다릅니다. 교회에 목사 제도가 필요한지 아닌지, 교회 일치는 어떻게 가능한지, 교회가 정치 문제에 어느 정도 개입해야 하는지, 그리스도인은 자발적인 가난을 선택해야 하는지 등등, 모든 문제가 늘 골치 아픕니다. 베드로가 활동하던 60년대나 요한복음이 기록된 90년대 교회에서도 이런 복잡한 문제들이 겹쳐 있었습니다. 바울의 편지에는 그런 어려운 문제들이 종종 언급됩니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 아무도 확정적인 결론을 내릴 수 없습니다. 꾸준히 대화하면서 중지를 모아서 최선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를 따르는 것입니다.예수 따름이 그리스도교 정체성이라는 뜻입니다. 불교에서는 부처를 따르기보다는 자기 안의 부처를 찾는 게 중요합니다. 공자를 따르기보다는 공자의 가르침대로 사는 게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에서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보다 예수라는 인격체를 따르는 게 더 중요하고 더 본질적입니다. 예수와의 관계에서만 생명을 얻기 때문입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만 잘 따르고 잘 믿으면 뭐 하냐, 제대로 살아야지, 하고 비판합니다. 그런 비판이 일리가 있기는 하지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겁니다. 제대로 살기 위해서라도 예수를 제대로 믿어야 합니다. 믿음이 없는데 어떻게 제대로 삽니까? 설교하는 저 자신을 돌아봐도 제대로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알겠습니다. 목사이면서 지성인이고 나름으로 진보적인 생각으로 살았으나 무엇이 옳고, 무엇이 잘못인지를 판단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제대로 착하게, 그리고 정의롭고 평화롭게 산다는 게 무엇인지 실제로 압니까? 법대로 사는 게 제대로 사는 건가요? 대법원판결은 무조건 존중해야 하나요, 거꾸로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무조건 반대해야 하나요?

인간이 혼자서 무인도에 사는 게 아니라 아주 복잡한 네트워크 가운데서 살기에 제대로 산다는 게 아예 불가능할지 모릅니다. 예를 들어서 어느 동네에 E마트나 롯데 대형마트가 들어섰다고 합시다. 대다수 주민은 살기 편해지고 집값이 오른다고 환영할 겁니다. 그 동네에 있던 작은 마트는 모두 문을 닫아야 합니다. 빚을 얻어서 마트를 열었던 업주 가족은 거리에 나 앉을지 모릅니다. 기후 위기 시대에 우리는 지금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 소비를 대폭 줄여야 할까요, 경제가 원활하게 돌아가게 하려고 소비를 늘려야 할까요? 어려운 문제입니다. 삶 자체가 늘 어렵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무엇보다도 우선적인 것은, 제대로 살기 위해서라도 영혼의 중심에 놓아야 할 문제는 바로 예수를 따르는 일입니다. 예수의 제자가 되는 일입니다. 그걸 본문은 앞에서 예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보다 더 사랑하면 그제야 그는 교회를 책임지는 역할을 감당할 수 있고, 고난과 순교마저 대처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갈 수 있는 저력이 생깁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생명이 무엇인지가 눈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삶의 내공

 

이런 이야기가 여전히 멀리 느껴지는 분들에게 조금 더 일상적인 이야기를 드려야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 세상에서 서로 관계를 맺고 삽니다. 부부관계이고, 형제 관계이고, 학교 친구와 직장 동료와 교회 교우 관계입니다. 관계 맺음에서 상대를 배려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관계를 잘 맺는 사람들은 똑똑하다기보다는 배려심이 큽니다. 여기까지는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상대를 배려한다는 게 정말 힘들다는 사실입니다. 형식적으로는 배려하는 척할 수 있으나 실제로는 어렵습니다. 억지로 배려하다 보면 상대 반응에 따라서 속이 상하기도 하고, 혹은 짜증이 나기도 합니다. 그런 일들이 쌓이면 상대방에게 잔소리를 쏟아냅니다. 어느 정도 인격 훈련이 된 사람은 겉으로 표시를 내지 않을 수 있으나 속으로 상대를 무시합니다. 중요한 것은 상대방을 배려할 줄 아는 내공입니다. 내공이 생겨야 상대방의 무례함까지 담아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내공은 그럴듯하게 보이는 교양이 아니라 삶의 내면적인 능력입니다. 오늘의 말씀으로 바꾸면 그 삶의 능력이 바로 예수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끊임없이 예수를 믿으라고, 예수를 사랑하라고, 예수와 하나 되라고 호소합니다.

다른 바쁜 일이 태산인 인생살이에서 예수의 제자라는 문제를 생각하면서 사는 게 가능할까요? 그것은 목사나 선교사나 신학자처럼 전업으로 교회 업무를 감당하는 사람에게 해당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목사나 일반 신자나 아무런 차이가 없이 예수의 제자일 뿐입니다. 교사로서 예수의 제자이고, 노동자로서 예수의 제자이고, 버스 운전기사로서 제자이고, 시인으로서 제자이며, 연극 배우로서 제자이며, 전업 주부로서 제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무슨 직업으로 살든지 모두 예수의 제자이고, 그를 따르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비유적으로 테니스를 배우려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가 테니스 교본만 읽거나 테니스 유튜브 영상만 보고 테니스를 잘할 수 없습니다. 그는 실제로 테니스 실력이 탄탄한 코치에게 가서 레슨을 받아야 합니다. 손과 팔과 몸에 힘을 빼고 공을 정확하게 라켓으로 쳐서 날리는 능력은 머리로 알아서만 되는 게 아니라 몸으로 느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테니스 역사에서 최고수의 경지에 오른 페더러나 조코비치나 나달처럼 하나님 경험에서 최고 절정 고수이시기에 그와 함께하면 하나님을 가장 정확하게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걸 실감하는 사람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되는 거고, 실감하지 못하면 구경꾼으로 머물게 되겠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살이에서 복잡하고 골치 아픈 일이 많을 겁니다. 어떻게 살아야 가장 의미 있는 건지도 확실하지 않을 때가 종종 있을 겁니다. 삶이 힘겹거나 지루하기도 할 겁니다. 갑자기 허무에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그 모든 문제를 단번에 완벽하게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방황하거나 돈이나 온갖 향락에 치우칩니다. 모든 문제의 답을 찾은 것처럼 떠벌리는 사람들의 주장에 솔깃해하지 마세요. 대개는 사이비입니다. 베드로에게 명령하신 예수님의 말씀만이 혼란한 세상에서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진 궁극적인 대답입니다. 나를 따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