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용섭목사

‘생명’을 얻는다는 사실에 관해서 (요 20:19-31) / 정용섭 목사

새벽지기1 2025. 5. 3. 07:20

부활절 2, 2025년 4월 27

 

 

요한복음은 본래 20장으로 끝납니다. 21장은 요한복음 저자의 제자들이 훗날 추가한 것입니다. 마지막 단락인 20:30-3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 단락에 요한복음의 집필 목적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 집필 목적은 요한복음만이 아니라 복음서 전체와 신약성경 전체에 해당합니다. 집필 목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의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는다는 말은 구원을 얻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생명을 얻는 것이야말로 죽어야 할 인간에게는 구원의 실체니까요.

 

생명이란?

 

세상 사람들은 요한복음의 이런 진술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지금 살아서 보란 듯이 인생을 즐길 수 있으니까요. 사람이 언젠가는 죽겠지만, 죽을 때 죽더라도 지금 살아있는 건 분명하니까요. 그들이 볼 때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생명이나 구원은 별로 현실적이지 않고 건강해 보이지도 않습니다. 세상살이에서 자신감이나 자존감이 없는, 그야말로 의존적인 사람들이 절대자에게 구원해 주시라고, 살려달라고 매달리는 듯이 보이니까요. 그들의 주장이 완전히 잘못된 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오랫동안 반()생명적인 경향을 보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어딘가 우울하고, 청교도적인 결벽증에 떨어진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니체와 프로이트와 마르크스 같은 이들이 그리스도교 신앙을 날카롭게 비판했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 현상을 집단적 노이로제라고 분석한 학자도 있습니다. 그 외에도 그리스도교가 생명에 적대적이라고 비판한 학자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그런 전문적인 학자들만이 아니라 21세기를 살아가는 일반 사람들도 비슷한 방식으로 그리스도교를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그들이 옳게 본 건가요? 오늘 본문이 말하는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는 말은 공허한 주장인가요? 종교적 열광주의자들의 일방적인 넋두리에 불과한가요?

 

요한복음이 말하는 생명은 세상에서 단순히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로마 사람들이 행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한 것과도 다릅니다. 지금까지 인류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행복한 인생을 성취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경제 발전으로 가난을 면하게 되었습니다. 의학의 발전으로 질병을 상당한 정도로 극복하고 평균 수명이 대폭 늘었습니다. 정치적으로도 옛날에 비해서 크게 민주화되었습니다. 언론의 자유가 대폭 늘어났습니다. 저의 청소년 시절에는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지 못했습니다. 자연과학의 발전으로 세상살이가 편리해졌습니다. 집 안 청소를 로봇 청소기가 대신하고, 설거지도 세척기가 대신합니다. 장애인들도 휠체어를 이용해서 어느 정도는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습니다. 현대판 알라딘의 요술램프라 할 스마트폰이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걸로 듣고 싶은 음악을 원 없이 들을 수 있습니다. 제가 1980년대 초 군목으로 철원 지역의 한 부대에 근무할 당시 종종 병사들과 장교들을 찾아가서 대화하곤 했습니다. 어떤 소위 계급의 장교가 일제 소니 트랜지스터라디오를 갖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흘러나오는 FM 음악 방송이 정말 환상적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격세지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계 평균에서 볼 때 대한민국에서의 삶은 아주 높은 수준입니다. 이런 정도면 생명을 다 얻은 듯이 보입니다. 과연 그런가요? 사십여 전 전 당시 젊은이들보다 지금의 젊은이들이 실제로 더 행복한가요? 더 생명 충만한가요? 세상이 살만하다고 실제로 느끼나요? 그래서 아기를 더 낳고 싶다는 열망이 강한가요?

 

저는 경제 성장과 문화 발전 등등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문명 문화 배척론자가 아닙니다. 그런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책도 많이 읽어야 합니다. 음악도 들어야 합니다. 작년에 우리나라 한강 작가가 노벨 문학상을 탔다는 사실은 자랑할 만합니다. 요즘 K문학, K음악, K영화, K푸드 등등, 한류로 통칭할 수 있는 현상이 세계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뿌듯하긴 합니다. 기본적으로 이런 발전을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것만으로 현대인이 생명을 얻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거의 신적인 단계로 올라서는 듯한 과학 발전과 문명의 고도화가 우리의 삶을 근본에서 풍요롭게 하지는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더 깊은 허무에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내면을 도저히 채울 수 없는 소유와 향락에 더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부와 권력을 손에 쥔 로마 황제가 당시에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을까요? 밀리언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면 행복할까요? 1만 명 모이는 교회의 담임 목사가 되면 영혼이 풍요로울까요?

 

창조주 하나님의 생명

 

요한복음이 말하는 생명은 하나님이 주인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선물로 받았을 뿐입니다. 하나님만이 창조주이기 때문입니다. 사도신경의 첫 문장은 이렇습니다.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출발점은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는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이 제법 많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당연한 거고,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사는 거야, 내 행복은 내가 결정할 거야, 하고 생각합니다. 어떤 생물학자는 <만들어진 신>이라는 책을 썼더군요. 신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인간의 뇌가 신을 만들었다는 주장입니다. 뇌의 주인은 인간 자신이니까 생명의 주인도 인간이 되는 겁니다. 인간이 생명의 주인이라면 인간 스스로 언젠가 영원한 생명을 얻겠지요. 일주일 전에 로마가톨릭 프란체스코 교황이 세상을 뜨셨습니다. 앞으로 의료 기술이 더 발전하면 교황이 죽지 않게 될 날이 올지도 모릅니다. 돈만 많으면 약해진 장기를 교체하고, 세포를 회춘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돈으로 영생을 얻고 더욱더 자신의 욕망에 매달리는 그런 인류의 미래야말로 디스토피아(지옥)가 아닐까요?

 

왜 그렇게 비관적으로 보냐, 문명의 발전으로 인간이 노동에서 완전히 해방되고 모든 사람이 사랑하면서 행복하게 사는 미래가 올 수도 있지 않냐,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그 미래가 어찌 될지 제가 어떻게 다 알겠습니까. 다만 지난날과 오늘을 비교하면 대략은 예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고단하게 살던 70-80년대에 비해서 21세기 오늘을 사는 사람들이 더 사랑하고, 더 감격해하고, 더 인간미가 풍성해지고, 더 사람답게 살고 있을까요? 서울과 뉴욕과 런던과 동경 같은 첨단 문명의 대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티베트나 부탄 오지에 사는 사람들보다 더 평화 지향적이고 더 정의롭고 더 관용적일까요? 웅장한 교회당과 파이프오르간과 관현악단이 갖춰진 대형 교회에서 예배하는 이들이 초라한 작은 교회당에서 예배하는 이들보다 하나님을 더 깊이 있게 경험할까요? 어떤 상황에서 살든지 사람의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로마 시대 사람이나 지금의 우리나 똑같이 호모 사피엔스입니다. 대통령 관저에서 사는 사람이나 작은 아파트에 사는 사람이나 그들의 본성이 비슷합니다. 그런 말이 있더군요. 60-70대의 특징은 꼰대론으로 확인하고, 20-30대의 특징은 싸가지론으로 확인한다고 말입니다. 인간은 옛날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비슷한 특징을 보일 겁니다. 인간 본성과 본질은 변하지 않는데, 인공지능과 의료 기술과 경제 성장, 그리고 온갖 놀이 문화의 발전만으로 우리의 생명이 더 풍성해질 것이라는 생각은 큰 착각입니다.

 

우리의 생명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것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의 생명이 의학 기술이나 심리학이나 갖가지 통계나 수치, 그리고 각종 심리 치료 등으로 처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천만다행입니다. 전체는 부분의 합계 그 이상이라는 말처럼 우리의 생명은 부분의 총합을 초월합니다. 부분적인 뇌 작용보다 유기체로서의 전체 인간이 더 상위개념이라는 사실은 생물학에서도 이미 드러난 사실입니다. 인간 창조에 관한 성경의 보도가 이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1:27절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   창조에 관한 다른 전승인 창 2:7절은 이렇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생령(생물)이 되니라.” 여기서 분명한 것은 사람의 창조가 아주 특별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형상은 거룩하고 선한 능력, 즉 살아있는 기운입니다. 그 살아있는 기운은 하나님으로부터만 받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가르침을 실감하지 못하는 이유는 세상의 자극적인 방식으로만 생명을 경험하는 일에 길들었기 때문입니다. 이게 바로 자기 숭배라는 죄의 본질입니다. 단적으로 경쟁에서 이길 때 느끼는 승리감에 도취하는 겁니다. 지금 세상 돌아가는 풍경을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서로 싸우는 데에 집중합니다. 조기 대선 국면에 들어간 우리나라는 정당과 정당이, 후보와 후보가 서로 헐뜯습니다. 상대방을 인정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한쪽은 완전히 나쁜 놈이고, 다른 쪽은 완전히 좋은 놈은 아닐 겁니다. 그런데 서로 싸우는 걸 보면 서로 그렇게 생각하는 듯합니다. 우리나라는 의대 증원 문제 하나 미래 지향적으로 풀어내지 못합니다. 거의 죽기 아니면 살기 식으로 자기를 주장할 뿐입니다. 저도 젊은 시절 부부싸움을 할 때 나의 잘못은 합리화하고 아내의 잘못만 비판하곤 했습니다. 세계를 보더라도 비슷합니다. 지금 미국의 트럼프와 중국의 시진핑이 관세 문제로 전쟁을 벌이듯이 싸웁니다. 트럼프와 시진핑은 먹고사는 데에서는 아무 걱정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들 정치 지도자들로 인해서 서민들의 삶이 망가집니다. 저는 양비론이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시시비비를 가릴 때는 치열하게 다퉈야 합니다. 그러나 한쪽은 완전한 천사이고, 다른 한쪽은 완전한 악마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세상이 본래 그렇게 돌아가는데, 어쩌란 말이냐,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전쟁 통처럼 돌아가는 세상에서 공자왈을 외칠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이런 문제에 관해서 제가 더 구체적으로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각자 여러분이 선택해야 합니다. 다만 세상에서 짜릿하게 승리해도 생명을 얻는 게 아니라는 사실만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대통령이 된다고 해서, 노벨상을 탄다고 해서, 교황이 된다고 해서 생명을 얻는 게 아닙니다. 그냥 인기를 얻을 뿐입니다. 속된 표현으로는, 기분이 우쭐할 뿐입니다. 그는 여전히 먹어야 하고, 배설해야 하고, 불안해하고, 외로워하고, 두려워하고, 죄에 떨어지니까요. 그러니 여러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칭찬은 하되 부러워하지 마세요. 성공하지 못한 사람과 별 차이가 없답니다. 작은 부분에서는 차이가 있으나 정말 중요한 부분에서는 차이가 없습니다.

 

믿음과 생명

 

앞에서 짚었듯이 오늘 설교 본문은 예수를 믿고 그의 이름을 힘입어서 생명을 얻는다고 말합니다. 그 대목에 앞서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가 나옵니다. 도마 이야기가 특이합니다. 부활의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났을 때 도마는 없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에게 부활의 주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으나 그는 믿을 수 없었습니다. 얼마 후에 예수께서 다시 제자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 나타났습니다. 도마에게 2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본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제자들이 없는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부활은 예수께서 단순히 죽었다가 다시 본래의 생명으로 돌아온 게 아니라 하나님께 완전히 받아들여진 사건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께서 하늘로 들어 올림을 받았다는 뜻으로 승천을 증언했습니다. 이를 다시 압축해서 표현하면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셨다.’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신 분이시기에 그를 믿으면 우리도 하나님과 하나가 됩니다. 이게 곧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입니다.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해도 안 되고, 알 수 없어도 무조건 믿어야 하나요? 그럴 리가 있나요. 그리스도교 신앙은 광신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종교나 학문보다 더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삶의 태도입니다. 예수께서 하나님께 받아들여져서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이 제자들처럼 영혼의 눈을 뜨면 보일 겁니다. 영혼의 눈을 뜬다는 게 무엇인지를 조금 더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믿었던 분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예수는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하고 걱정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만 붙들었습니다. 당시의 절대 규범이었던 안식일에도 장애인을 고치셨습니다. 당시 율법이 금한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로 함께 술을 마시기도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하나님 나라를 향해서 삶의 방향을 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인 스스로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불렀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가장 친근한 호칭입니다. 세례 요한이나 성 프란치스코처럼 예수님과 비슷하게 살았던 사람도 있긴 합니다. 그러나 예수와 똑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십자가에 처형당했으나 사흘 만에 제자들에게 살아있는 자로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서 죽음이 극복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들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런 깨달음과 믿음 가운데서 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 즉 구원자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생명을 얻는다는 사실에 관한 설교를 듣고 어떤 생각이 드셨지요? 막연한가요? 생명과 구원에 대한 방향이 잡히나요? 각자가 다를 겁니다. 고유하고 근원적인 차원에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우리의 생명은 우리 인간의 소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두십시오. 사람들은 생명을 절대로 규정할 수 없고 재단할 수 없고 처리할 수 없습니다. 코끼리 털끝에 달린 세균 한 마리가 코끼리 전체를 경험할 수 없듯이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멋진 인생이라고 추켜세운다고 해서 생명을 얻는 게 아니며, 깎아내린다고 해서 절대 훼손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혼의 깊이에서 믿는다면 여러분은 죄와 죽음이 극복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