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용섭목사

부활은 죽음의 죽음이다!(고전 15:19-26) / 정용섭 목사

새벽지기1 2025. 4. 26. 05:42

부활주일, 2025년 4월 20

 

 

부활의 노래, 고전 15

 

21세기를 사는 현대인들에게 그리스도교의 부활 신앙이 설득력 있게 들릴까요?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로 들릴까요? 이보다 먼저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당신은 부활을 실제로 믿습니까?’라거나 부활을 믿지 않고도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라는 설문을 돌린다는 어떤 대답이 나올지가 궁금합니다. 여기에는 기본적으로 부활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놓여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질문 안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부활을 가장 깊이 있게 다루는 신약 본문은 고전 15장입니다. 고전 15장을 부활 장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바울에 따르면 부활 신앙이 없으면 그리스도교 신앙 자체가 무너집니다. 고전 15:14절에서 그는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라고 했고, 17절에서 다시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부활 신앙 없이는 그리스도교 신앙이 성립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매우 성실하게 교회 생활을 하고 세상에서도 모범적으로 사는 사람이라도 부활을 모르거나 소홀하게 여긴다면 그 모든 노력이 헛수고가 되는 겁니다. 부활까지는 잘 모르겠고, 예수를 믿어서 마음의 평화를 얻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수준의 교회 생활이 바울에게는 헛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을 놓치고 겉모양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오늘 설교 본문 첫 구절인 고전 15:19절에서 이를 다시 이렇게 강조합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러라.'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것만이 중요할 뿐이고, 죽음 이후의 삶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고린도 교회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왜 잘못인지를 19절에서 짚은 겁니다. 그리스도인이 더 불쌍한 이유는 세상 사람들보다 인생을 재미없게 살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좋은 음식을 먹고 명품을 몸에 지닌다고 해서 인생이 행복한 거는 아니니까요.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인이 더 불쌍한 이유는 부활 신앙이 없을 때 그리스도교 신앙이 가짜가 된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 세상의 삶으로 모든 게 끝장난다면 부활 신앙은 가짜가 되니까요. 가짜를 믿고 사는 사람은 인생을 재미있게 살았나, 하는 것과는 관계없이 불쌍한 사람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과격하게 말하는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본질인 부활 신앙을 우회하지 말고 직면하라는 것입니다. 본질이 아니라 겉모양에 머물면 그리스도교 신앙의 체력이 약해지고, 그런 약한 상태가 이어지면 병듭니다. 만약 부활 신앙이 영혼의 중심에 자리 잡는다면 교인들끼리의 작은 차이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겁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부활 신앙을 영적인 화두로 삼는 이들이 얼마나 될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교의 부활 신앙이 분명한 진리라는 바울의 자신감입니다. 그런 자신감이 없으면 믿음이 헛것이라거나 그리스도인이 불쌍한 자라는 식으로 과격하게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바울이 말하는 부활은 무엇일까요?

부활을 그림처럼 묘사하는 내용은 복음서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처형당한 후 안식일 다음 날 새벽에 몇몇 여성들이 예수 시신에 바를 향유를 들고 무덤에 찾아갔다가 무덤 안에 시신이 없는 걸 확인하고 제자들에게 와서 그 사실을 전했다고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읽고 어떤 이들은 예수께서 실제로 죽지 않고 임사 상태에 떨어졌다가 목숨이 돌아온 거로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복음서를 기록한 사람과 바울을 비롯한 초기 제자들과 교부들은 예수께서 실제로 죽었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죽었다가 처음의 육신으로 회귀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죽기 전의 상태로 돌아왔다면 그는 다시 죽어야 합니다. 신약성경이 일관되게 말하는 핵심은 예수께서 앞으로 우리가 모두 맞게 될 죽음을 우리와 똑같이 당했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제자들 앞에 살아있는 자로 현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바울은 오늘 설교 본문 고전 15:20절에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예수 그리스도는 잠자는 자들이 얻게 될 부활의 첫 열매입니다. 그 이전에는 인류 역사에 부활은 그림자처럼 인식되었으나 예수님에게서 부활은 실체가 되었습니다. 종말에 완성될 부활이 예수님의 운명에 선취(先取)된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가르침이 신학적인 교언영색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부활한 예수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따지고 싶겠지요. 부활한 예수를 제자들과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 이유를 설명해 보라고 다그치고 싶을지 모르겠습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그리스도인의 삶과 비그리스도인의 삶이 나뉩니다. 우리는 인과율에 근거한 자연과학적인 방식으로 증명할 수 없어도 믿음으로 예수의 부활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런 근거가 없이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사도들의 경험이 옳다는 사실과 예수께서 아빠 아버지라고 부른 그 하나님을 우리도 믿는다는 사실에 근거해서 받아들입니다. 그 하나님은 창조 능력이 있는 분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하나님과 하나가 된 분이시기에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게 분명하다고 말입니다.

 

모든 사람의 부활

 

이와 관련해서 바울은 오늘 설교 본문에서 매우 중요한 관점을 짚었습니다. 저도 의외라고 생각한 관점입니다. 21-22절을 <새번역>으로 읽겠습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왔으니, 또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은 사람의 부활도 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써 낙원을 쫓겨난 아담 이후로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아담은 죽을 운명의 인류를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게 된 것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난다.’고 합니다. 죽음에서 살아나는 게 부활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이 부활하는 게 아니라 예수를 믿는 사람만 부활한다고 생각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지옥의 불구덩이에서 영원히 고통당한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과 전혀 다른 말을 합니다. 구원과 부활이 보편적이라는 겁니다. 우리가 잘못 생각한 건가요? 혹시 바울의 이 진술에 다른 뜻이 있는 걸까요?

이 대목에서 어떤 이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모든 사람이 살아난다면 굳이 지금 예수 믿고 교회에 다닐 필요가 없다고 말입니다. 정말 유치한 생각입니다. 구원에서 배척되는 사람이 있어야만 자신의 구원이 빛을 발하는 듯이 생각하는 겁니다. 저는 평소에도 구원 이기주의가 그리스도교 신앙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씀을 여러 번 드렸습니다. 구원의 확신 가운데서 사는 건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으나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인이 왜 자기만 구원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지를 저는 이해하지 못합니다. 저는 오히려 반대로 생각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께서 우리와 다른 종교 전통에 서 있는 사람과 무신론자들과 공산주의자들까지 모두를 우리가 모르는 비밀스러운 방식으로 구원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속된 표현으로 그들이 우리처럼 구원받는다고 해서 우리가 손해나는 거 하나도 없습니다. 지금 예수 믿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그리고 성령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탕자였던 둘째 아들까지 사랑하는 아버지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첫째 아들과 다를 게 없습니다.

바울은 무엇을 근거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걸까요? 대답은 간단명료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서 죽음의 세력이 파멸되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서 그 사실을 경험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십자가에 처형당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그들은 살아있는 자로 경험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무덤에 머물러 있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를 살아있는 자로 경험했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두려움이 사라지게 되자 세상과 일상이 제대로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을 리얼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를 생각하기 전에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는 게 좋겠습니다. 이유는 무슨 이유가 따로 있느냐, 죽음은 그것 자체로 공포요 두려움인데, 하고 말할 수도 있긴 합니다. 우리는 매일 잠을 잡니다. 잠은 죽음과 비슷합니다. 그런데 잠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잠에서 깨어나는 게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깨어날지 아닐지가 확실하지 않다면 잠은 두려움의 대상이겠지요.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잠에서 깨어난다는 건 우리의 운명이 죽음으로 끝장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삶으로 변화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품 안에 받아들여지는 겁니다.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게 무엇인지를 절감했습니다. 그들은 다음날 깨어나는 게 분명하니까 두려움이 아니라 편안하게 잠들 듯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삶에 죽음의 세력이 더는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 세상에서는 종종 오해됩니다. 현대에 널리 퍼진 생명 경시 사상이 그것입니다. 얼마 전에 사업 실패로 늙은 부모와 아내와 두 자녀를 약물로 죽이고, 자기도 죽으려고 하다가 실패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른 나라에도 그런 일이 얼마나 자주 일어나는 제가 잘 모르겠으나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일이 너무 흔합니다. 그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게 아닙니다. 욕망의 실패로 절망한 겁니다. 얼마 전에는 유명 정치인이 10년 전 자기 비서에게 행한 성폭력이 사회 문제로 확대되자 극단적인 선택을 했습니다. 자기 목숨을 스스로 끊는 행위에 대해서 제삼자가 말하기가 정말 조심스럽기는 하나 명예심의 손상이 생명 경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만은 짚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죽음의 죽음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은 생명 경시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에 속합니다. 오히려 생명의 심연과 충만을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그 생명의 심연과 충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는 사실을 경험함으로써 죽음까지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여기 결혼을 앞둔 두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들은 soul mate입니다. 그들은 소박한 한 끼 식사를 함께하면서 무한한 기쁨을 경험합니다. 함께 먹는 밥 냄새가 생명의 감수성을 자극합니다. 된장찌개가 옛날 어머니 손맛을 기억나게 합니다. 김치만으로도 침샘이 솟구칩니다. 그들은 이제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소박한 한 끼 식사를 영혼의 깊이에서 서로 느낄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제자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생명의 심연과 충만을 경험했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외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아주 강렬한 문장으로 26절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맨 마지막으로 멸망 받을 원수는 죽음입니다.'

 

죽음(ὁ θάνατος)이 죽는 순간이 곧 이 세상이 끝나고 새로운 세상이 시작하는 종말입니다. 이를 다른 말로는 영생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지금의 세상에서는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서 모든 것들이 낡고 늙고 병들고 결국에는 죽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가 우리의 삶을 철저하게 지배합니다. 바울은 그런 세력을 가리켜서 24절에서 통치와 권세와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를 두렵게 하는 세력입니다. 그런 세력의 눈치를 봐야 합니다. 그 두려움을 잠시라도 잊기 위해서 자기 욕망에 매달립니다. 부자 되는 게 인생살이의 목표이고, 더 맛있게 먹고 더 즐겁게 살려고 애를 씁니다. 이런 삶의 태도가 무조건 잘못은 아닙니다. 문제는 거기에 예속되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주어지는 삶을 거부하고 파괴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그런 죽음의 세력들이 폐기되는 때를 생각합니다. 세속 정치와 경제 권력이 가소로워지는 때입니다. 죽음이 죽는 때입니다. 죽음이 파멸하는 순간이 오면 모든 사람이 죽음의 숙명을 벗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22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난다고, 즉 부활한다고 진술한 겁니다.

이게 실감이 되시나요? 우리의 현실에서 너무 거리가 먼 이야기인가요? 어떤 이들은 베르디의 <레퀴엠>에 나오는 진노의 날이라는 대목을 들어도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선 인간의 영적 실존을 실감하지 못하듯이 죽음과 부활 문제도 실감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저는 설교자로서 다음의 사실을 생각하시라고 말씀드릴 뿐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근본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로 사랑할 때만 그를 통해서 일어난 죽음의 죽음이 무엇인지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환원주의처럼 느껴질 정도로 반복해서 예수를 믿으라고, 예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예수를 사랑하면 예수에 관해서 알게 되고, 그를 아는 것만큼의 깊이에서 죽음의 폐기가 느껴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2025년도 부활절입니다. 첨단 과학 기술이 우상의 자리를 차지했고, 정치와 경제 권력이 우리의 삶을 점점 더 강력하게 옥죄는 시대를 우리는 삽니다. 기술과 권력의 묵시적 왕국입니다. 현대인은 그런 묵시적 왕국 안에서 죽음과 허무라는 늪에 빠진 형국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저와 여러분은 부활 신앙으로 죽음의 두려움을 벗어났으며, 죽음의 충동(프로이트, 타나토스)에서도 벗어났습니다.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죽음이 끝장나는 그 마지막 때를 일상에서 삶의 능력으로 살아내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