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정용섭목사

택함 받은 증거 (사 43:16-21) / 정용섭 목사

새벽지기1 2025. 4. 23. 04:36

 사순절 5, 2025년 4월 6

 

 

인류 역사는 발전하는 걸까요, 퇴행하는 걸까요? 지금까지 인류가 찾은 정치제도 중에서 가장 낫다고 여기는 민주주의는 여전히 건강한가요? 김일성 왕조를 이어가는 북한도 자신들의 정체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고 부르는 실정이니까 대답하기가 어렵긴 합니다. 미국은 세계 초일류 강국입니다. 자본주의도 크게 발전했고, 민주주의에서도 모범적인 나라로 불립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금 펼치는 국내외 정치는 민주주의 국가 지도자라기보다는 황제에게나 어울립니다. 미국 국민이 그를 대통령으로 뽑았다는 말은 그가 지금 미국의 시대정신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세계와 관세 전쟁을 펼치면서 세계를 좌지우지하려고 합니다. “캐나다는 미국의 51번째 주가 돼야 한다거나 캐나다 총리는 미국의 51번째 주지사다라는 공개 발언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세계 평화를 위한 보편적 가치는 의미가 없습니다. 무조건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웁니다. 트럼프로 대표하는 오늘의 미국 정신은 인류 역사에서 반복된 안하무인의 제국주의를 빼닮았습니다.

 

하나님이 택한 민족

 

이사야 선지자가 활동하던 시대의 제국은 바벨론이었습니다. 기원전 587년에 남유다는 바벨론에 의해서 무너졌습니다. 많은 유대인이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런 세월이 50년 정도 흐릅니다. 이사야는 유대 포로들이 이제 바벨론 제국에서 해방될 것이라는 신탁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에게 말씀을 주신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약속을 맺으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분의 선택을 전제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고 약속하신 겁니다. 이후로 고대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이 바로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사야는 다시 그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2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이라.'

 

문장이 상당히 고급스럽습니다. 승냥이와 타조를 비롯한 들짐승도 하나님을 높이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광야를 지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물을 줄 것이고, 사막을 건널 때에도 오아시스를 만나게 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가나안까지 가려면 실제로 광야와 사막을 지나야 했습니다. 거기서 생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마실 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택한 고대 이스라엘 백성의 생존을 책임지겠다고 약속하신 겁니다. 이어서 21절에서 이사야는 그 말씀의 확실성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지으셨다는 표현이 아주 강렬하게 들립니다. 떼려야 뗄 수 없는 결속 관계를 가리키는 문학적 표현입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20절과 21절을 연결해서 읽으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삶이야말로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증거가 됩니다.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높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를 찬송하고, 자기를 높이라고 가르칩니다. 자기 찬송, 자기 영광, 자기 숭배가 현대인의 생활 방식으로 굳어졌습니다. 그게 자연스럽긴 합니다. 일단 다른 사람에게 칭송받으면 기분이 좋고, 우쭐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정받으려고 애씁니다. 성경은 그걸 죄라고 말합니다. 죄는 생명을 파괴하는 세력이니까 자기 찬송은 사람의 생명을 파괴합니다. 그런데도 사람은 반복해서 자기 숭배에 떨어지고, 자기를 찬송하는 일에 매달립니다. 그러다가 지칩니다. 현대인의 영혼에 번아웃 현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삶이 탈진되는 자기 찬송이 아니라 생명이 풍성해지는 하나님 찬송으로 삶의 방향을 바꾼다는 건 무슨 뜻일까요? 그게 실제로 가능할까요?

 

오늘 본문에서 이사야가 반복하는 표현이 있습니다. 16절에는 바다 가운데에 길을, 큰 물 가운데에 지름길을 내고라는 표현이 나오고, 19절에는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라는 표현이 나오며, 20절에 다시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런 일들은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누가 바다 가운데에 길을 내고 사막에 강을 만듭니까? 돈이 너무 많이 들어가기도 하고, 만들어도 효용가치가 없습니다. 요즘 표현으로 가성비가 ‘1’도 안 되는 일입니다. 가능한 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대도시에 도로를 내고, 관개시설을 갖추고, 예술극장을 짓는 게 효과적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그런 하나님의 일을 새로운 일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사람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새로운 일을 말입니다. 완전히 새로운 일이기에 하나님만이 찬송을 받아야 합니다. 사람은 아무리 뛰어난 과학자나 정치가나 예술가나 신학자라고 하더라도 적당하게 근사한 일을 하지만 새로운 일은 행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지만, 사람은 인공지능을 탑재한 로봇을 만듭니다. 사람 창조는 새로운 일이지만 인공 로봇 발명은 흉내입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일이 바로 하나님을 찬송할 이유입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일을 느끼지 못하면 하나님을 찬송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일을 사람이 놀라워하는 초자연적인 기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런 일에 관심이 컸습니다. 바울이 그들을 가리켜서 표적을 구하는 민족이라고(고전 1:22) 묘사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유대인들은 영적으로 뛰어난 민족입니다. 그러나 홍해가 갈라지는 일이나 만나를 먹고 광야를 횡단한 일은 말 그대로 표적(sign)일 뿐입니다. 그것 자체가 신앙의 핵심은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습니다. 그 표적이 가리키는 대상을 보는 게 중요합니다. 이런 표적과 기적에만 마음을 두면 그런 일들이 눈에 드러나지 않을 때 실망합니다. 하나님을 의심하고 떠납니다. 하나님을 진실하게 믿는 사람은 그런 표적과 기적이 없어도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더 정확하게는 이미 주어진 일상 자체를 표적과 기적으로 경험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는 일상의 홍해와 일상의 만나를 경험하고, 광야와 사막의 강줄기를 일상에서 경험합니다. 일상의 신비에 놀라워합니다.

 

일상에서의 표적

 

그게 어떤 경험인지를 가장 단순한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심한 몸살에 걸려서 일주일간 밥 한 숟가락 먹지 못하면서 앓았다고 합시다. 비몽사몽의 시간이었습니다. 몸이 회복되어서 처음으로 흰죽을 먹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내나 남편이 숟가락에 흰죽을 떠서 먹여주었습니다. 마치 천사를 만난 듯한 느낌이겠지요. 따뜻한 흰죽이 깔깔한 입안을 촉촉이 적셔 주었습니다.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는 느낌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황홀했습니다. 그 순간에 이 사람은 생명 충만감에 사로잡힙니다. 다른 것으로 채워지지 않아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순간입니다. 그는 누군가에게 원망도 없고, 짜증은 더더욱 없고, 아쉬움도 없고 지루함도 없습니다. 그는 자기가 살아서 흰죽을 먹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기뻐하면 춤을 출 것입니다.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하나님을 찬송하겠지요. 흰죽 한 숟가락이 바로 만나라고 말입니다.

 

제가 최근에 경험한 한 가지 예를 더 들겠습니다. 요즘 봄을 맞아서 시간이 날 때마다 텃밭과 정원 가꾸는 일을 합니다. 지난 금요일 설교 원고를 작성하다가 늦은 오후에 아내가 주문 배달시킨 수선화를 적당한 곳에 심으려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먼저 삽으로 땅을 파야 합니다. 대수롭지 않게 삽을 땅에 밀어 넣고 흙을 퍼 올렸습니다. 삽날에 잘린 순이 흙 위에 나뒹구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겉으로는 아무것도 없었는데, 땅 밑에서는 알뿌리 순이 땅 밖으로 나올 준비를 마친 것입니다. 그게 작년 늦가을에 심었던 튤립 순인지,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꽃의 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부드럽고 옅은 녹색의 순이 딱딱한 땅속에서 형체를 갖추고 몸집을 키우고 있었다는 사실이 놀라웠습니다. 요즘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사인 지브리가 챗지피티에서 공개한 지브리 풍으로 그려줘!’라는 유행어와 함께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오래전 거기서 제작한 <마루 밑 아리에티>를 보았을 때 느꼈던 감동이 삽질을 하면서 다시 밀려왔습니다. 저게 바로 하나님께서 일으킨 홍해의 갈라짐이나 사막에 흐르는 강물과 다를 게 없구나, 하고 말입니다.

 

일상에서 이와 비슷한 경험이 없는 분은 오늘 설교를 듣는 분 중에는 없을 겁니다. 문제는 우리 일상에서 벌어지는 하나님의 새로운 일을 생동감 넘치게 경험하는 일이, 즉 영적 긴장감이 유지되지 않는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과거에 매달리기 때문입니다. 삶의 타성에 젖는 겁니다. 더 엄격하게 말하면 과거의 일들이 우리에게 트라우마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18절에서 이렇게 충고합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이들에게 이전 일은 바벨론 제국의 체제입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그들이 소수 민족으로 살던 애굽 제국의 체제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제국은 막강하고 매력적입니다. 주변 나라를 지배할 정도로 강력합니다. 군사와 경제만이 아닙니다. 건축과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합니다. 그런 세력 범위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제국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의 눈치를 봐야만 합니다. 그런 세월이 길어지면서 그들의 내면에 아주 강한 트라우마가 형성됩니다. 지난 기억을 떨쳐낼 수가 없습니다.

21세기 현대인은 자본주의라는 제국에 의해서 영혼이 손상되는 트라우마를 앓는 중으로 보입니다. 거칠게 표현하면 빨리 출세해야지, 돈이 최고야, 무시당하면 큰일 나, 고급스럽게 살아야지, 예쁘게 보여야지, 하는 생각이 머리에 가득합니다. 다른 걸 돌아볼 여유가 없습니다. 빈부격차 해소와 세계 평화와 생태 균형 등등에 마음이 가지 않습니다. 잠시 그런 생각이 들다가도 마약 중독자들처럼 즉시 자본과 지배와 성공 신화에 휩쓸립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그게 실제로 가능할까요?

 

향유를 붓는 여자

 

오늘 성서일과(lectionary) 셋째 말씀이( 12:1-8) 우리에게 주어진 대답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예수께서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 남매가 사는 집을 방문했습니다. 마르다는 손님들을 위한 음식 준비에 바쁘고 나사로는 손님들과 담소하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고가품의 향유를 들고 예수 앞으로 와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취했습니다.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예수의 발을 닦았습니다. 오늘 주보 표지에 이를 주제로 하는 그림이 나옵니다. 인물들이 유색인으로 묘사된 탓인지 전달되는 메시지가 아주 강렬합니다. 마리아는 무릎을 꿇고 앉았습니다. 눈물을 흘립니다. 예수의 발과 향유와 마리아의 손과 눈물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곳에 여러 손님이 있었으나 그녀는 손님들을 의식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쏟은 향유가 아깝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그 옆에 있던 가룟 유다는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게 좋았을 것이라고 꼰대 짓을 하다가 마리아 일에 참견하지 말라. 그녀는 나의 죽음을 준비한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핀잔이라면 핀잔을 받았습니다. 마리아는 죽음의 선취라 할 가장 낮은 자리로 자기를 낮춤으로써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절정의 기쁨을 경험했습니다. 이런 경험에서만 우리 영혼의 트라우마가 근본에서 치료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런 경험이 우리 인생에서 얼마나 있을까요?

 

말이 낮은 자리이지 실제로 그런 일이 가능하냐, 그런 자리로 내려가면 기쁨은커녕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느냐, 하고 질문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무조건 자기를 낮추는 것이 늘 옳은 게 아닙니다. 저항할 때는 저항하고 화를 낼 때는 화를 내야 합니다. 악과 불의 앞에서 침묵하는 게 항상 옳은 게 아닙니다. 이런 문제는 상황에 따라서 자신이 판단하고 처신해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낮춤의 영성에 이르지 못하면 하나님의 새로운 일을 실감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걸 실감하지 못하니까 이전 일과 옛날 일에만 매달리면서 삽니다. 악순환입니다.

 

지난 4 4일에 헌법재판관 8명의 전원 일치로 헌재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파면되었습니다. 상식적인 결정이었습니다. 탄핵 심판 과정을 국민이 생중계로 보았습니다. 윤 대통령은 비상계엄 선포가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라고 강변했으나, 헌재는 그의 행위가 헌법에 어긋난다는 사실을 조목조목 건조한 문장으로 명백하게 짚었습니다. 여기에 제가 더 보탤 말은 없습니다. 다만 자기를 땅바닥까지 낮추지 않으면 사람은 자기 중심성과 자기 높임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는 사실을 이번에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만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대통령은 자기에게 국가를 운영할 만한 능력이 본래 없다는 사실을 먼저 뚫어봐야 합니다. 자기를 바닥으로 낮춰야 합니다. 그럴 때만 나라를 위해서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일이 눈에 들어옵니다. 앞으로 그런 대통령이 우리나라에서 나올까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사야가 살던 기원전 6세기는 오늘의 우리와 상관없는 먼 옛날이 아닙니다. 그가 전하는 이야기는 오늘 우리의 생생한 이야기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이 바벨론 제국을 한편으로 두려워하고 다른 한편으로 부러워했듯이 오늘 우리도 이 세상을 한편으로 두려워하고 다른 한편으로 부러워합니다. 특히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더 그렇습니다. 자살률이 유난히 높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지난 일과 옛날 일들로, 풍문과 괴담으로 늘 가슴 졸이거나 망상에 휩싸여 사는지 모릅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행하실 새로운 일을 보라고 호소합니다. 이런 신앙 전통을 이어받은 장로 요한은 보좌에 앉으신 이의 말씀을 이렇게 외쳤습니다.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21:5) 하나님께서 이루실 새로운 일을 여러분의 삶에서 찾아보십시오. 그게 눈에 들어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택함 받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영혼의 중심에서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